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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azy Scientist May 25. 2023

사랑도 가고 청춘도 가도,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 김초희 | 드라마 | 한국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스틸컷 : 영화 프로듀서인 찬실은 함께 일하던 감독이 죽자 실업자가 되어 작고 허름한 방으로 이사한다.

영화를 그만 두는 것을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프로듀서 찬실은 항상 함께 작업 했던 감독의 죽음으로 실직 상태에 놓이게 된다. 찬실은 이제 가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이후 그녀는 함께 일했던 동생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를 하며 생계를 꾸린다. 찬실은 가사 일을 하던 중 불어 과외를 하는 남자 영과 악수를 하다 정전기가 통한 것을 느낀다. 지난 10년 동안 찬실은 남자를 못 안아보던 참이었다. 


‘40대 싱글 족의 성장담’이라고 이 영화를 축약한 김초희 감독은 동그란 단발을 하고 인터뷰에 응했다. 실직을 하였을 때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있었다는 감독은 찬실과 닮은 점이 많아 보인다. 이 점은 김초희 감독의 캐스팅 능력에서도 명징하게 드러난다. 김초희 감독의 단편 영화 <산나물 처녀(2016)>의 주연 배우는 윤여정, 정유미, 안재홍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도 우리가 익히 알던 얼굴들이 자주 등장한다. 김초희 감독은 복이 참 많다. 


산나물처녀(2016) : 윤여정, 정유미, 안재홍이 출현했다.


찬실은 “나는 이 나이먹도록 결혼도 못하고, 애도 없고...”로 요약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간다. 씩씩한 걸음걸이로 장을 보고, 주인 집 할머니의 요청을 늘 흔쾌히 응하는 찬실은 사실 ‘결혼도 못하고 애도 없는 불쌍한 여자’ 기준 밖의 사람이다. 조금은 귀찮아질 법도, 부끄러워질 법도 한 상황에서 기세등등한 찬실을 쫓는 카메라는 그녀를 매우 사랑하고 있다. ‘애인 필터’라는 말이 있듯, 주인공을 찍는 카메라는 그녀를 이쁘게 비춘다. 찬실이 모과 나무를 바라보다 장국영 귀신을 보게 되더라도 카메라에 담긴 찬실의 얼굴에는 따뜻한 볕이 있다. 내가 엄마와 사랑하는 언니의 뒷모습을 보고는 가끔씩 이상한 웃음을 짓듯이 찬실의 뒷모습은 작은 웃음을 형성한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수처작주 입처개진 ; 어디를 가던지 주인이 된다면 모든 것이 참되다.”라는 말이 있다. 성철스님의 책 임제록 속 문장이다. 우리는 가끔 ‘수행’의 영역을 잊고는 한다. 때로는 자신에 대한 비관 때문에, 휘둘린 감정 때문에, 욕망 때문에 작업 수행의 가치를 떠올리지 못한다. 영화는 그런 자그마한 조언들은 가끔 떨어뜨리는데, 이 지점이 기껍지 않다. 영화가 꼰대의 위치가 아니어서 일까. 자신과 같아지라고 고하는 대신, 김초희 감독은 낮은 위치에서 청자를 높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찬실이 전하는 소박한 가치가 끄덕일 수 있게 들리는 이유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사실, 40대에 당도해버린 여성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가 없다는 점은 큰 복이다. 대한민국 영화 산업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 찬실이가 씩씩한 걸음걸이로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다. 찬실이와 우리는 살아가고 있음으로 잘 하고 있다. 찬실이 친구와의 우정을 놓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가길. 재미없는 농담일지라도, 반복하면 재미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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