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ing(1980) | 스탠리 큐브릭 | 공포/스릴러
*영화 샤이닝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서와요, 유령의 집
겨울이면 폭설로 고립되는 '호텔 오버룩'. 그곳에서 겨울 관리인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본 소설가 지망생 잭(잭 니콜슨, 이하 조니)은 돈도 벌고 소설도 쓸 수 있는 이 기회를 날리고 싶지 않다. 면접을 위해 차로 3시간 30분을 달려 도착한 호텔 오버룩은 깊은 산세가 에워싼 외딴 호텔이다. 면접관은 간단한 업무 설명과 함께 꽤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몇 해 전 같은 업무를 맡았던 관리인 델버트 그래디(필립 스톤)가 오랜 고독을 참지 못하고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전언. 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니는 호텔 관리직을 맡기로 한다. 평범한 학교 선생이었으나, 위대한 소설을 집필해 팔자를 고쳐 쓰겠다는 단 한 가지의 목표를 가지고.
우주적 적막의 공포
한편, 조니의 5살 난 아들 대니(대니 로이드)는 섬찟한 환영에 시달린다. 피가 쏟아지는 벽과 죽은 아이들의 반가운 인사. 대니가 가진 영적 능력의 발현은 상영시간 내내 지뢰처럼 포진되어 있다. 백화점 로비가 연상되는 높은 층고의 호텔 로비를 거쳐 수백 명의 식사를 책임졌을 주방과 축구장 넓이의 연회장, 몇백 개의 객실은 장대한 미장센으로 놀라움을 자아낸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호텔을 정처 없이 내달리며 자전거를 타는 대니의 뒷모습을 팔로우한 트렉킹숏은 오버룩 호텔의 미로 같은 공간적 이미지를 효율적으로 보여준다. 대니가 휘젓고 다니는 호텔의 공간은 어떤 물질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까마득한 우주적 적막 상태처럼 묘사된다. 아득하리만치 넓은 호텔에 남겨진 오직 세 사람. 그 와중에 섬광처럼 튀어 오르는 서슬 퍼런 장면들. 군더더기 없는 프레임의 연속은 적막의 공포를 우아하게 조명한다.
삐뚤어진 가부장제의 몰락
광막한 로비에 테이블 하나와 타자기 하나를 놓고 혼자 씨름하던 조니.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해진 평범한 나날이 계속되고 조니의 예민함은 끝에 다다른다. 아내를 향한 폭언의 강도는 점점 심해지고, 급기야는 아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조니. 아내 웬디는 과거 술에 취해 대니의 팔을 부순 경험이 있는 조니에 마지막 경고를 날린다. 하지만 그 시점부터 조니는 본격적으로 허상을 보기 시작한다. 럭셔리한 옷을 걸치고 재즈를 즐기는 사람들, 아름다운 여성의 나체와 두 딸과 아내를 죽이고 자살을 한 전 관리인까지. 이 모든 상황에 대한 혼란과 고립된 환경에서의 압박은 순식간에 아내와 아들을 향한 분노로 점철된다.
가장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 줄 알아?
괜한 트집을 잡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아내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아들. 조니는 가장의 권위를 위협하는 아내와 아들의 행적을 바로잡기 위해 도끼를 빼어 든다. 넓디넓은 호텔에서 강박적으로 가족을 찾아 헤매던 조니의 귀에 전 관리인 그레디의 목소리가 들린다. "호텔을 어지럽히는 가족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나약한 인간이라 욕할 거예요."
드디어 찾은 웬디와 대니는 화장실 나무 문 뒤에 숨어있다. 가지고 온 도끼로 문을 부수기 시작하는 조니. 웬디는 아들 대니를 작은 창문 바깥으로 탈출시키고, 혼자만의 싸움을 시작한다. 공포에 사로잡힌 웬디 옆으로 조니의 얼굴이 비친다. 쪼개진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 들고 웬디를 찾는 조니. 여보, 조니가 왔어!
Here's Johnny
흔적을 따라가는 자, 흔적을 없애는 자
영화의 제목인 '샤이닝'은 아들 대니가 가진 영적 능력으로 장소, 사람, 사물과 시공간을 뛰어넘어 교감하는 현상이다. 가령 대니가 과거의 참상을 스치듯 보았던 것처럼 과거의 시간과 공간이 대니와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인간이 종잡을 수 없는 이 초자연적 능력은 영화의 주된 공포 매개체이다. 대니와 같은 능력을 공유하는 오버룩 호텔의 주방장 할로렌(스캣맨 크로더스)은 참혹한 일이 일어났던 237호에 들어가지 말라는 조언과 함께 이와 같은 말을 남긴다.
"아주 나쁜 일이 벌어지게 되면, 그 일로 인해서 어떤 흔적이 남게 된단다. 그리고 어떤 흔적이 또 다른 나쁜 일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
조니가 본 허상은 과거의 흔적이다. 대니의 머리에 스친 공포의 그림자는 죽은자의 흔적이다. 흔적을 따라 과거로 회귀하여 그 영광을 즐기는 조니와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대니의 미래는 어떤 끝을 맺게 될 것인가.
눈이 쉴 새 없이 떨어지던 밤, 대니는 자신을 죽이려는 아버지의 시선에서 사라지기 위해 미로에 들어간다. 엄마와 함께 소풍했던 미로의 틈에서 따뜻한 조언자 할로렌의 말을 되짚는다. 아들의 발자국을 지름길 삼아 뒤따라가던 조니는 끊어진 지도의 끝에서 길을 잃는다. 흔적을 없애는 자, 살아남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