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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azy Scientist Jun 05. 2023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간 아빠에게, <애프터썬>

Aftersun(2022) | 샬롯 웰스 | 드라마 | 영국

고개를 돌려 달빛을 바라봐. 기억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에서 행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새로운 삶이 시작될 거야.

                                                                     -뮤지컬 <캣츠>의 넘버 'Memory' 중-


기억의 발자취를 따라서

영화는 아빠 캘럼(폴 메스칼)에게 11살 딸 소피(프랭키 코리오)가 "내 나이였을 때 아빠는 31살에 뭘 할거라고 생각했어?"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딸의 손에 들려있는 캠코더는 대답을 기다리며 캘럼의 굳은 표정을 찍고 있다. 이후 영화는 암전된 공간 속 번쩍이는 조명에 의존하여 어른이 된 소피의 모습을 비춘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조명 아래 서 있는 소피는 눈을 감고 잊혀진 순간을 떠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리하여 찾아낸 기억의 발자취는 아빠와 떠난 튀르키예 여행에서 멈춘다. 넘실거리는 검은 바닷속으로 아버지가 사라지기 전, 가장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소피는 눈을 뜬다. 


출처 : 다음 영화


31살 생일을 맞이한 소피는 동성 애인과 아기를 키우고 있다. 영화는 이 시점의 소피가 과거를 기억하면서 시작된다. 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여름의 어느 날에 대하여. 아빠가 홀연히 사라지기 전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에 대하여. 아빠와 함께 췄던 긴 춤의 의미에 대하여. 그러니깐 20여 년 전 아버지와 떠난 튀르키예 여행에 대하여.  


행복의 의미를 알 것만 같던 시절

소피의 11살은 아버지의 기억과는 다르다. 여름휴가를 맞아 떠난 튀르키예는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와 포근한 햇살이 있고, 친구이자 근사한 방어막이 되어줄 아빠가 함께 있다. 호텔의 수영장에는 갓 사랑을 시작하는 언니 오빠들이 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세상, 소피는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는 재미에 빠져있다.  



아빠의 11살 생일

아빠 캘럼은 깊은 불안과 우울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들이 버리고 간 담배를 주워 피거나, 소피와 함께 먹은 저녁 밥값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 것으로 볼 때 경제적 빈곤이 그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를 중반부까지 보게 되면, 그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캘럼의 11살 생일은 악몽에 가깝다. 그의 생일을 아무도 몰랐으며, 그 사실을 부모에게 알렸을 때 돌아온 핀잔은 어린 캘럼에게 세상 어디에도 내가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존재의 부정을 겪었을 것이다. 왜 스코틀랜드에 돌아오지 않느냐는 물음에 고향에 한 번도 애착을 가진 적 없다고 대답하는 캘럼은 오랫동안 죽음을 생각하고 있어 보인다. 


출처 : 다음 영화


상실의 불안을 전염시키는 장면들

불안정했던 어린 시절과 늘 표류하는 것만 같았던 스코틀랜드 생활에서 기인 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이 불안은 소피에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라지거나, 차에 치여 죽어 버릴 것만 같다는 불안에 시달리게 한다. 소피가 물안경을 잃어버렸을 때 캘럼은 그것을 주으러 깊은 바다로 헤엄친다. 배에서 그를 지켜보던 소피는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본다. 소피의 시선에서 수면 위를 비추는 이 장면은 길게 편집되었다. 관객의 시선에도 불안이 스친다. 


영화는 튀르키예 여행에서 소피와 캘럼이 찍은 영상과 아버지 캘럼에 대한 소피의 짐작이 교차하며 플롯을 만들어 낸다. 가령 소피가 호텔에서 만난 남자아이와 처음으로 키스하던 저녁, 캘럼은 부서지는 파도 안으로 뛰어든다. 이후 침대에 기대어 앉아 포효에 가까운 울음을 울던 캘럼의 등은 31살이 된 소피의 짐작일 뿐이다. 관객은 단지 소피의 상상을 통해 캘럼의 우울을 볼 수 있다. 영화는 지혜롭게도 암흑 속의 춤사위를 통해 과거를 상상하는 소피의 감정 상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나의 장면 뒤에 따라오는 기이한 춤사위. 그것은 현재의 소피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생생한 감정 상태이다.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은 절규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슬픔이, 죄송스러움이, 안타까움이 소피의 춤에 묻어있다. 죽으려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싶은 마음도.  


출처 : 다음 영화

그렇다면 31살의 소피는 선연한 기억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도망쳤던 기억을 심심히 바라보며 내면의 격정을 마주하던 어느 날, 조용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눈빛에는 슬픔만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깊은 고독 너머의 사랑에 대해서. 아이를 키울 원동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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