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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인 Jun 11. 2022

당신이 알고 있는 '이스털린의 역설'은 틀렸다


돈을 얼마나 벌어야 행복할까?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

 

모두가 어디선가 한 번쯤은 맞닥뜨려보았을 질문들일지도 모르겠다. 이 질문들에 나름의 대답을 모두가 갖고 있겠지만, 그 대답들은 유보하자. 내가 궁금한 건, 일개 개인의 인생 철학이 아니라 이 질문들에 대한 '사회과학적' 답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떤 '사회과학'이 이 질문들에 답해줄 수 있을까? '돈'의 원리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은? 경제학이다. '돈'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는 사회과학은? 행복경제학이다!


그래서, 행복경제학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이스털린의 역설'로 대답했다.

(물론, 오해하지는 말자. 행복경제학의 발전이 '이스털린의 역설'이라는 현상을 중심으로 이뤄져온 측면이 크기야 하지만, 행복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들 모두가 이 대답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최근까지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논쟁적 주제다.)


자 그럼, '이스털린의 역설'은 무엇인가? 경제학자가 아닌 우리가 답을 구할 곳은 포털 사이트 검색창이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검색엔진 '네이버'에게 물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행복도와 소득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현상"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래서, 네이버에 '이스털린의 역설'을 검색했을 때 검색 결과의 최상단에 노출되는 이 지식백과를 클릭해보았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정의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론"



자, 의심이 많고 조심스러운 누군가는 다시 검색 결과 화면으로 돌아가 스크롤을 내려, '지식백과 더보기'를 클릭해서 더 많은 정보를 확인해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니, 위의 지식백과에서 찾은 것과 비슷한 내용의 정의를 제공하고 있는 더 많은 지식백과 검색 결과를 아래와 같이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공영교육방송 EBS에서도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이론"이라고 소개되고 있지 않은가!



EBS에서 제공하고 있는 이 동영상을 클릭해보면, '이스털린의 역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리처드 이스털린은 1946년부터 1970년까지 전세계 30개국의 소득 수준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는데요, 기존의 경제 논리라면 소득 증가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죠. 그런데 이스털린 교수는 소득이 일정 시점을 지나게 되면 행복도가 그와 비례하지 않는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EBS는 시청자들이 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아래와 같은 그래프도 추가했다. x축의 소득이 일정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y축의 행복도도 계속 증가하며 그래프가 우상향하는 모양을 그리고 있지만, 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자, 이런 상관관계는 사라진다.



자, 이쯤이면 아무리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이스털린의 역설'이란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라고 결론을 내릴 법하다.


물론, 이 정의는 틀렸다.

그렇다. 당신은 낚였다. 지식백과와 EBS에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는, 한국어로 되어 있는 거의 모든 자료에서 이스털린의 역설을 위와 같은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틀렸다"니? 하지만, '이스털린의 역설'에 대해 가장 정확한 정의를 구하려면, 이스털린 본인이 '이스털린의 역설'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마침, 이스털린이 2020년에 쓴 논문 이름이 "이스털린의 역설(The Easterlin Paradox)"이다. 이 논문(링크)을 확인해보자. 아래 사진은 해당 논문의 도입부(Introduction) 첫 문단이다.



여기서 이스털린은 이스털린의 역설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The Easterlin Paradox states that at a point in time happiness varies directly with income, both among and within nations, but over time happiness does not trend upward in correspondence with income growth”.  

즉, 한국어로 간단히 번역하면, ‘이스털린의 역설’은, 주어진 한 시점에는 소득과 행복 사이에 상관관계가 나타나지만, 시간 흐름에 따라 소득이 증가한다고 해서 행복도 함께 증가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란 거다. 다시 말해, "소득은 일정 수준을 넘으면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거나, "소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아무리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 그런 의미였다면, 이스털린의 역설은 사람들의 상식과 직관에는 부합하지 않는 현상일지언정, '역설'이라고 불릴 이유는 없을 것이다. 역설은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데, 일정 구간을 지나면 소득이 행복을 증가시키지는 않는다는 주장이 논리학적 의미에서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스털린의 역설이 ‘역설’인 이유는, 소득과 행복 사이 상관관계가 횡단면 비교에서는 존재하는데, 시계열 비교에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횡단면 비교란, 주어진 한 시점에 나타나는 소득과 행복 사이의 관계를 비교한 것이다. 시계열 비교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나는 소득의 추세와 행복의 추세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지를 비교한 것이다. 한 시점에는 돈이 더 많은 사람일수록, 돈이 더 많은 나라일수록, 더 행복했다(횡단면 비교). 하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른 추세를 비교해보면 소득이 더 많이 증가한 나라라고 해서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다(시계열 비교).  


즉, ‘소득과 행복 사이에 플러스 상관이 있다’는 똑같은 명제가 횡단면에서는 참인데 시계열에서는 거짓인, 모종의 모순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역설'이다. 위의 문단 마지막 문장에서 이스털린이 직접 이렇게 말한다: “The paradox is the contradiction between observations on the relation of happiness to income at a point in time (cross-section data) and evidence on happiness and income over time (time-series data)”.

소득과 행복 사이에 나타나는 횡단면적 관계와 시계열적 관계의 불일치가 이스털린의 역설이라는 것.


아직도 의심스러운가? 위에서 확인한 많은 한국어 자료들이 이스털린의 역설을 이스털린이 1974년 연구를 통해서 발견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므로(그리고 이건 딱히 틀린 설명은 아니므로), 바로 그 1974년 논문(링크)을 보며 실상을 확인해보아도 좋다. 이 글의 맨 위에서 네이버 검색을 통해 찾아냈던 지식백과에 따르면, "1946년부터 빈곤국과 부유한 국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국가 등 30개 국가의 행복도를 연구"한 이스털린이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행복도와 소득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현상을 발견"해 1974년에 '이스털린의 역설'을 주장했는데,  당시 논문에서 "비누아투, 방글라데시와 같은 가난한 국가에서 오히려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나고,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서는 오히려 행복지수가 낮다는 연구 결과""주장의 근거"로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논문 어디에도 이스털린이 그 이상 소득이 증가해도 더 이상 행복은 증가하지 않는 ‘일정 수준’을 새로이 찾아냈다는 내용은 없다. "1946년부터... 30개 국가의 행복도를 연구"했다는 설명도 출처 불분명의 잘못된 설명이다. 이 1974년 논문에서 이스털린이 시계열을 추적 조사하고 있는 나라는 오직 미국 하나뿐이다. 바로 이 미국의 시계열이 1946년부터 시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30개 국가"는 뭐란 말인가? 이 논문에서 이스털린이 여러 나라의 서베이 데이터들을 통해 소득과 행복 사이의 관계를 조사하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이건 모두 주어진 한 시점의 횡단면적 관계에 대한 조사였으며, 심지어, 이스털린이 국제 횡단면 비교를 수행한 나라들 중에 ‘방글라데시’, ‘바누아투’같은 나라들은 없다. 논문에 이런 나라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스털린은 여러 국가들에서 시행된 서베이 데이터들을 통해, 1) 국가별로 그 국가의 시민들 사이에 나타나는 소득과 행복의 횡단면적 관계를 조사했고(국가내 횡단면 비교) 2) 평균 소득 수준과 행복 수준을 국가별로 비교하는 횡단면적 비교를 수행했으며(국가간 횡단면 비교), 마지막으로 미국의 자료를 통해 3) 국가의 평균적 소득 수준과 행복도의 시계열을 비교했다(국가내 시계열 비교). 이 연구를 통해 이스털린이 발견한 것은? 소득과 행복 사이의 관계가 국가내 횡단면, 국가간 횡단면, 국가내 시계열 비교 모두에서 일관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결과였다. 국가내 횡단면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소득과 행복 사이의 상관관계가 국가간 횡단면, 국가내 시계열에서는 훨씬 희미하다는 것. 이 1974년 논문의 발견을, 이스털린은 후속 연구들(Easterlin, 1995, 2001)을 거쳐, 일정 시점의 횡단면적 관계와 시간 경과에 따른 시계열적 관계의 모순, 즉 '역설'로 정립해간다. 바로 이 '역설'에, '이스털린의 역설'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그렇다면, 도대체 왜 사람들은 이스털린의 역설을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라고 알고 있는 걸까? 사실, 이건 ‘이스털린의 역설’이라는 현상에 대해 제기되었던, 하나의 유력했던, 하지만 정작 이스털린은 동의하지 않는, 해석에 가깝다. 이 해석을 가장 정치하게 이론화한 경제학자 앤드류 클라크 등의 2008년 논문(링크)은 이스털린 본인의 후속 연구들 못지않게 많이 인용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해석과 이스털린의 역설을 혼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해석이 가능했던 것은, 시계열적으로는 소득과 행복 사이에 상관관계가 없다는 이스털린의 발견이, 처음에는 주로 부유한 서구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앞서 확인했듯, 이스털린이 1974년 논문에서 소득과 행복의 시계열을 비교할 수 있었던 나라는 미국뿐이었으며, 후속 연구인 1995년의 논문에서도 유럽 9개국과 일본의 시계열을 추가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스털린의 역설’이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미 부유한 나라들에서는 소득의 증가가 행복을 증가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해석"이, 한국에서는 '이스털린의 역설'의 "정의"로 둔갑해버렸다(물론, 한국에서만 '이스털린의 역설'을 오해해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량 상 이 내용은 다음 글의 몫으로 넘기겠다). 온라인 포털 사이트 상에 한국어로 제공되고 있는 거의 모든 자료들이 이런 잘못된 '정의'를 제공하고 있으니, 그간 '이스털린의 역설'을 한국어 자료로만 접하고 알게 된 사람들은 거의 전부, 이런 오해를 하고 있을 테다. 사실, 포털 사이트에서만 이런 오류들을 찾아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스털린의 역설’을 언급하고 있는 국내 논문에서도 마찬가지의 오류를 확인해볼 수 있다! 일례로, KCI에 '이스털린 역설'을 검색하면 비교적 검색 결과의 상단에 노출되는 2014년 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학회지에 게재된 한 논문(링크)은, 이스털린이 1974년에 "주관적 만족도와 소득간의 관계를 실증적으로 분석"하여 "일정한 소득이 넘어서면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스털린 역설을 제시"했다고 말하고 있다(p. 30).


이런 오해는 최근까지도 재생산되며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이 ‘이스털린의 역설’에 대한 오개념을 모니터링하던 나는, 이스털린 본인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래에서는, 이스털린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내기로 결심하게 되기까지, 그 경위를 밝혀보며, 이스털린 교수와 직접 나눈 이메일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물론, 이를 통해, 처음 던졌던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할 몇 가지 단초들을 제시해보겠다.




최근, 나는 반가운 번역 출판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스털린의 역설'의 그 이스털린이 펴낸 신간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는 소식이다. 온라인 서점을 통해 이 번역서의 정보를 찾아보던 나는, '이스털린의 역설'이 아래와 같이 소개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위 사진은, 해당 번역서를 번역한 출판사가 제공하는 '카드리뷰'의 한 페이지다. "소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아무리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위에서 이미 설명한 항간에 널리 퍼져있던 오개념이라는 점은 더 이상 부연하지 않아도 될 테다. 소득이 증가하며 행복도 함께 증가하다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그 기울기가 급격히 감소하는 그래프도, '이스털린의 역설'을 지지하는 증거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으니, 딱히 새로울 것은 없다. 눈에 띄는 건, 기울기가 급격히 감소하는 지점을 기준으로 나뉜 '단기'와 '장기'다.


이런 오류가 발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진짜 '이스털린의 역설'로 돌아오자. 이스털린의 역설에 따르면, 횡단면적으로는 소득과 행복 사이에 상관관계가 나타나지만, 시간이 흘러 소득이 증가한다고 행복도 따라 증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처럼 반직관적인 발견이 어디 있을까! 당장 내일부터 내 소득이 오른다면, 나는 얼마간 더 큰 행복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이스털린은 이런 직관적 반문에 대답하고, 그간 그의 발견에 제기되어 왔던 반론들에 체계적으로 답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모델을 제시한다.


"The Easterlin Paradox", p. 24


위의 두 개의 그래프 중 'H'라고 표시된 아래쪽 그래프는 행복의 시계열적 변화를 나타내는 그래프이고, 그 위의 'Y'라고 표시된 그래프는 소득의 변화를 나타내는 그래프다. 그리고, 수직의 점선을 기준으로 경기 순환의 주기가 구별되고 있다. 즉, 불황기에는 사람들의 소득이 감소하기도 하지만, 불황기가 끝나면 곧 회복기가 이어지며, 장기적으로 경제의 성장은 항상 이런 경기순환의 반복되는 주기를 지나며 이뤄진다. 그리고, 이렇게 경기순환의 주기가 반복될 때마다, 사람들의 행복도 "단기(Short-term)"적으로는 소득의 변화에 발맞추어 오르내리고 있다. 불황기에 소득이 감소하면, 행복도 감소한다.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하면, 행복도 다시 증가한다. 하지만, 행복이 소득 한 단위 변화에 반응하는 크기가 호황기일 때와 불황기일 때 서로 다르다. 불황기의 소득 변화에 사람들의 행복은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 탓에, 불황기의 행복 감소가 호황기의 행복 증가를 상쇄하여, "장기(Long-term)"적 관점으로 비교하면 소득의 변화와 행복의 변화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설명은 위에서 언급한 번역서의 내용 중에도 등장한다. 그리고 이 책을 번역한 출판사는, 이런 이스털린의 주장을 그래프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득과 행복 사이의 관계가 뚜렷한 우상향의 상관관계를 띠는 그래프의 왼쪽 구간에는 '단기'라고, 그리고 그 기울기가 급격히 감소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은 오른쪽 구간에는 '장기'라고 써넣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 카드리뷰에 등장한 그래프에는 시간축이 없다. 즉, 이 그래프는 이스털린이 사용한 것과 같은 의미로 '단기'와 '장기'를 구별할 수 있는 그래프가 아니다. 아마도, 이스털린의 역설을 "소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아무리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는 항간에 널리 퍼진 오개념을, 소득이 단기적으로는 행복과 상관관계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는 실제 이스털린의 주장과 조화시키려 하다보니 만들어진 오류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책 소개’, '저자 소개' 등에도(그리고 온라인 서점의 판매 페이지를 통해 제공되고 있는 이 책의 동영상 리뷰에도), 아래와 같이 ‘이스털린의 역설’의 정의에 대한 똑같은 오류들이 발견된다. 온라인 서점의 판매 페이지와 해당 출판사의 홈페이지에 제공되고 있는 아래 '책 소개'에 의하면, 이스털린의 역설이란 "소득이 일정 수준에 이른 다음에는 더 이상 행복이 커지지 않는다"는 이론이며,



역시 같은 페이지들에서 제공되고 있는 '저자 소개'에 의하면 리처드 이스털린은 "일정 소득을 넘어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이 더 증가해도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이스털린의 역설'로 "학계를 뒤흔든 경제학자"다.



이 페이지들에서 제공되고 있는 아래 이미지에서도, 이스털린은 "소득이 일정 수준 이상을 넘으면 소득이 아무리 증가해도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소득의 역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눈치챘겠지만, 모두, 앞에서 이스털린의 논문을 통해 살펴보았던 ‘이스털린의 역설’의 진짜 정의가 아닌, 항간에 널리 퍼져있는 오개념을 그 정의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상의 내용을 출판사의 공식 이메일을 통해 제보했다. 매우 감사하게도, 카드리뷰의 오류를 지적한 이메일에 대해 출판사에서는 빠른 답변을 보내와 오류를 정정하겠다는 뜻을 밝혀주었기에, 감사의 뜻을 전달하며, 위와 같이 '책 소개', '저자 소개' 등에서 자잘하게 발견되는 오류들을 짤막하게 언급해, 함께 시정이 되면 더 좋겠다는 희망사항도 이메일을 통해 전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정된 내용은 이 책의 온라인 서점 판매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카드리뷰뿐이었다. 수정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소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아무리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정의는 고쳐지지 않았다. 다만, 그래프에서 '단기'와 '장기'라는 라벨을 제거하는 대신, 그래프의 x축을 '소득'이 아닌 '1인당 GDP'로 바꾸었고, 그래프의 모양도 1인당 GDP의 증가가 행복을 더 이상 증가시키지 않는 "임계치"가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물론, 새로이 바뀐 내용에도 문제가 있다. 해당 번역서에서 이스털린은 이 그래프를 근거로 소득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 주장하는 것을 오히려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적 행복론>>, pp.227-228


수정된 카드리뷰의 그래프가 등장하는 이 책의 위 부분에서 이스털린은, '이스털린의 역설'이 1인당 GDP가 "일정한 임계치를 뛰어넘을 때에만" 적용된다는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며, 그 주장의 근거 자료는 "잘못된 결론으로 유도하는 횡단면 증거의 또 다른 사례"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수정된 카드리뷰에 등장한 저 그래프가 바로, 이 '횡단면' 자료로 그려진 그래프다!


이 책에서 시종일관 이스털린은 횡단면 관계와 시계열 관계를 잘 구별해 비교해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행복과 소득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스털린의 가장 중요한 발견인 '이스털린의 역설'이, 횡단면 관계와 시게열 관계의 불일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털린은 이 그래프가 보여주는 임계치는 시계열 데이터 분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몇 페이지 뒤에서 이스털린은 아래와 같은 그래프들을 통해 과거에는 가난했다가 급격한 경제 성장을 겪은 중국과 인도, 일본의 시계열을 제시하고 있다. 모두 저 기간 동안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겪었지만 행복은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이터다.


"The Easterlin Paradox", p. 28


사실, 최근까지 이스털린은 저 세 나라의 개별적인 사례들뿐만 아니라,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시행되었던 각각 67개 국가들의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 WVS) 데이터, 123-132개 국가들의 갤럽 월드 폴(GWP) 데이터들을 통해서도, 1인당 GDP와 행복 사이에 장기의 시계열적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계 분석을 내놓고 있으며, 위에서 도입부 일부분만을 인용했던 2020년 논문 "The Easterlin Paradox"가 바로 그런 내용의 논문이다. 처음에는 미국과 유럽 등 몇 개 부유한 국가들만을 대상으로 했던 분석의 범위를, 이스털린은 새로운 자료가 생겨날 때마다 점점 전세계의 여러 나라들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계열이 경기의 확장 국면만 포함하고 있는 이행기 국가들을 제외하면, 장기로 갈수록 경제 성장률과 행복의 변화량은 시계열적 상관이 없다(실선).


다시 문제의 상황으로 돌아오자. 이스털린의 역설에 대해 널리 퍼진 오해를 그 주인공인 이스털린이 직접 바로잡아주고 있는 내용의 이 책을 직접 번역해 홍보하면서, 이스털린이 바로잡고자 했던 그 오해를 다시 유포하고 있는 상황. 이상의 출판사 제공 정보들에서 발견된 오류들은 어쨌든 모두 온라인 공간에 게시된 것들이지만, 사실 인쇄된 이 책의 표지 앞날개에도 비슷한 오류가 발견된다.



이스털린이 "소득은 일정 수준을 넘으면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파격적인 증명"으로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것. 물론, 정작 이스털린 본인은 자신이 이런 증명을 해냈다는 진술에 동의하지 않는다(이스털린에게 직접 물어봤다).




이스털린의 책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가, 그의 책을 판매하며 이스털린은 정작 반대하는 해석을 이스털린의 주장인 것처럼 유포하고 있는 상황은 분명 문제적이었다. 이메일을 통한 제보에도 불구하고 오류가 제대로 시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즈음, 나는 이보다 더 놀라운 또 하나의 심각한 오류를 알게 됐다. 이스털린을 인터뷰한 기사의 내용이 그것이다(미리 말해두자면, 난 이 인터뷰 기사에서 발견된 오류를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님께 제보하였으며, 매우 감사하게도, 빠른 시정이 이뤄졌다. 즉, 아래와 똑같은 내용의 인터뷰 기사는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의 인터뷰 문답에서 이스털린은 "소득이 일정 수준에 이른 다음에는 더 이상 행복이 커지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이스털린의 역설'을 소개하고 있으며,  "소득이 낮은 경우에는 소득이 늘면 행복도 증가"하고, "한 국가 내에서도 소득이 낮은 과거보다 현재가 행복이 더 높았"지만, "연 소득이 7만 5천 달러를 초과하면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까닭은 "소득이 임계치에 이르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돈을 더 많이 받을 때만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내용들이 놀라웠던 이유는 이스털린이 이전에 이렇게 말한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저 문장들과 정확히 반대의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논문과 책에서 최근까지도 확실히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2020년 논문 "The Easterlin Paradox"를 보자. 17쪽을 펴보라! 이스털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there is no time-series evidence of a happiness threshold at an individual income level of $75,000 or any other value(p. 17)." 즉, 7만 5천 달러든 아니면 다른 어떤 값이든, 소득이 행복을 더 이상 늘려주지 못하는 임계치가 있다는 시계열 증거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Contrary to the cross-section data, the time-series evidence demonstrates that the Paradox holds for both rich and poor, whether countries or groups of individuals within countries. Social comparison is at work everywhere. As incomes rise, even from very low levels, so too do people’s notions of what constitutes the good life. The result is no improvement in happiness, even though material conditions have noticeably improved.


이스털린의 역설은 소득 수준이 낮든 높든 그와 상관없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내 소득을 다른 사람의 소득과 비교하며 만족감이 달라지는 '사회적 비교'의 메커니즘 역시 모든 소득 구간에서 작동한다는 내용이다. 소득이 매우 낮을 때에도("even from very low levels"), 사람들의 눈높이가 소득의 향상과 함께 높아지기에, 소득의 증가가 행복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이스털린은 말하고 있다(이 내용은 앞에서 언급했던 그의 번역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덧붙이자면, "연 소득이 7만 5천 달러를 초과하면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털린이 아니라, 앵거스 디턴과 대니얼 카네먼이 2010년 논문(링크)에서 2008-9년에 걸쳐 이뤄진 미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서베이 자료를 근거로 발견한 내용이다. 즉, 7만 5천 달러라는 임계치는, 미국 내에서 그 시민들 사이에 나타난 행복과 소득의 횡단면적 관계에서 관찰되는 임계치다. 소득이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을 일렬에 세워놓고, 그들의 행복 수준을 비교해보니, 소득이 많은 사람일수록 행복도도 높아지는데, 7만 5천 달러 이상 버는 사람들부터는, 소득이 더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더 행복한 건 아니더라는 얘기다. 자, 앞의 책 속에서 이스털린이 이런 "횡단면" 증거에 대해 어떻게 얘기했었는지 상기해보자. "잘못된 결론으로 유도하는 횡단면 증거의 또 다른 사례(pp. 227-228)". 이런 부류의 횡단면 관계는 소득과 행복이 실제로 걸어온 역사적 궤적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스털린은 이 책에서도, "횡단면 데이터와 달리 시계열 증거는 제가 제시한 행복에 관한 역설이 고소득 국가뿐 아니라 저소득 국가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분명히 얘기하고 있다.


<<지적 행복론>>, p. 231


2021년까지 쓴 책과 논문들에서는 이렇게 말했던 이스털린이, 유독 한국 언론사와 한 인터뷰에서만은 입장을 완전히 반대로 바꿔 그가 비판했던 주장을 설파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위의 인터뷰에 등장한 문제의 문장들이, '이스털린의 역설'에 대해 오해하고 계셨던 기자님께서 이스털린의 대답을 한국어로 의역하고 윤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오류라고 판단했다.


정리해보자. 모처럼 이스털린의 새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출판사는 이스털린 본인은 정작 바로잡고자 했던 잘못된 개념으로 이 책을 마케팅하고 있었으며,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그의 인터뷰 기사는, 정작 이스털린 자신은 비판했었던 내용을 그가 한 말로 오역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반박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문제의 내용들이 모두 오류이고 오역이라는 내 주장은, 그간 공신력 있는 매체들이 '이스털린의 역설'에 대해 얘기해온 것과는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으므로. 그래서, 이번에는 리처드 이스털린 본인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내보았다.


이스털린에게 보낸 이메일의 내용은 길지만, 핵심은 질문 두 개였다:

"'소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아무리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스털린의 역설'의 올바른 정의인가요?"

"저 인터뷰 기사의 문장들이 정말 당신이 말한 내용인가요?"


그리고 뜻밖에도 매우 빨리, 내가 예상했던 대답을 이스털린에게서 받을 수 있었다(본인께 허락을 받아 그 내용을 아래에 게시한다).



문제의 오류들에 대한 내 지적이 "절대적으로 옳(absolutely correct)"으며, 문제가 된 책에서 자신이 직접 일본과 중국, 인도를 특별히 예시로 들어 급속한 경제 성장이 소득 수준이 낮았던 나라들에서도 행복을 증가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했다는 내용이다. 당신이 발견한 이스털린의 역설이 이렇게 심하게 오해되고 있는 줄은 몰랐다며 매우 실망스럽다고도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덕분에, 인터뷰 기사의 오류 내용을 이스털린의 대답과 함께 기자님께 제보할 수 있게 되었고, 매우 감사하게도, 빠른 시정이 이뤄졌다. (P.S. 그리고, 출판사에 의해 온라인 페이지에 제공되고 있던 정보들에서 발견된 오류들도, 매우 감사하게도, 2022년 6월 16일 현재 모두 수정되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여기에 이 일화들을 기록하는 까닭은, 이 사건들이 한국에서 '이스털린의 역설'에 대한 오해가 얼마나 널리, 심하게 퍼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오류들은 누구 하나의 잘못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되고 있는 '이스털린의 역설'에 대한 한국어 자료들에 몇 년째 뿌리박은 해묵은 오류들이 지금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때문에 이 오류들을 놓고 누구를, 혹은 무언가를 비방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난 오히려 개인적으로 그 인터뷰 기사의 기자분께서 그간 써오셨던 기사들이 꾸준히 좋은 화두를 던져왔다고 생각하며, 그 작업들에 대한 존경을 갖고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나는 거듭, 이 해묵은 오류가 그만큼 널리 퍼져 더 심각한 오류를 재생산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기록해, 누군가가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물론 인터뷰 기사는 수정되었지만, 이미 그 기사를 읽고나서 기억의 구석 한 켠에 치워둔 사람들은, 여기에 이런 오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기회가 없었을 테다. 더욱이, 출판사의 마케팅에 의해 재생산된 오류는(p.s. 비록, 온라인상에 제공되고 있는 정보들은 수정이 되었지만), 출판된 책의 인쇄본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완벽한 시정이 채 이뤄지지 못한 상태다. 이런 기록이라도 남겨둔다면 누군가는 이런 문제를 깨닫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




돈을 얼마나 벌어야 행복할까?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했건만, 행복경제학이 내놓은 '이스털린의 역설'이라는 답의 의미를 해독하는 데에만 벌써 너무 긴 분량을 할애했다.

자, 그럼 '이스털린의 역설'이 무슨 뜻인지 알았으니, 답을 찾은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영 시원찮은 구석이 남아있다. 대체 왜 '이스털린의 역설'이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그 전에, 많은 학자들이 '이스털린의 역설'을 두고 논쟁하였다는데, 그 중에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걸까?

지금 당장 이 질문들에 답을 내놓을 수는 없어도, 어디서부터 탐구를 시작해야 할지, 그 단초들은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어 자료들에 널리 퍼져 있던 오류들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소득과 행복의 관계를 놓고 이뤄지는 학자들의 논쟁 한복판에서 어떤 사례와 증거들이 다뤄지고 있는지를 훑어볼 수 있었다는 데에 이 글의 의의를 두고 싶다.


남은 의문들에 대한 답은, 다음에 이어질 2편의 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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