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발표된다.
매년 노벨상 수상 유력 후보를 예측해온 클래리베이트(Clarivate)가 선정한 피인용 우수 연구자(Citation Laureates)에, 올해는 행복경제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리처드 이스털린 역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 게 2-3일쯤 전이다.
널리 퍼진 이스털린의 역설에 대한 오해를 다룬 마지막 포스팅에서, 다 못 한 말을 이어질 2편에 다루겠다고 했는데, 여하간 계속 미루다가 이스털린의 노벨상 후보 선정 소식에 이제라도 좀 써봐야지 싶었다(월요일에 수상자가 최종 발표되는데, 이번 수상자는 아마 애쓰모글루가 아닐까 싶기에, 월요일이 지나면 이 핑계로도 글을 쓸 수 없게 되지 싶었다).
사실, 마지막 포스팅을 작성한 이후, 그 내용을 바탕으로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두 편 발행했다. 처음에는 한 편만 쓸 생각이었는데, 분량 문제로 첫 번째 기사에서 다루지 못한 내용들에 아쉬움이 남아, 두번째 기사를 작성하게 되었고, 리처드 이스털린 본인과 진행한 이메일 인터뷰의 문답을 기사화하였다.
이 인터뷰 기사에서도 역시 분량 상 채 다루지 못한 문답이 있는데, 그 내용을 이전 포스팅에서 미뤄둔 내용과 함께 이 포스팅에 담아보고자 한다.
‘이스털린의 역설’이란 행복과 소득 관계의 횡단면과 시계열 사이 불일치를 일컫는다. 즉, 주어진 한 시점에는 소득과 행복 사이에 상관관계가 나타나지만, 시간의 변화에 따른 1인당 GDP의 성장률과 평균적인 행복의 변화에는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
그럼, ‘역설’은 왜 나타나는가? 아래는 첫번째 기사 내용의 일부.
이스털린의 신간 <지적 행복론>에서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사회적 비교가 역설을 만든다(p. 49)." 요컨대,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소득의 절대적인 값어치가 아니라, 그 상대적 가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 성장을 통해 모두가 소득이 다 함께 늘어나는 것은 사회적 행복의 증가와 별로 상관이 없지만, 사회적 비교가 이뤄지는 횡단면 차원에서는 높은 소득과 높은 행복 사이의 분명한 상관 관계가 나타난 것.
즉, 소득은 그 상대적인 가치를 통해서 행복에 기여하기 때문에, 더 부유한 사람이 덜 부유한 사람에 비해서 행복하지만, 상대적 소득지위를 변화시키지 않는 평균적인 소득의 증가(경제 성장)는 행복을 더 증가시켜주지 못하는 것.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역설'을 설명할 길이 하나 있다. 실제로는 사람들이 경제 성장으로 인해 더 부유해지며 더 행복해졌지만, 행복의 증가와 더불어 행복을 보고하는 척도를 옮김으로써, 측정치에는 차이가 없어졌기 때문에 시계열적 상관을 관찰할 수 없다는 것.
이게 무슨 말일까? 설문조사에 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감을 0점에서 10점(혹은 1점에서 10점)의 유한한 범위 내에서 점수로 답한다. 하지만 실제 '행복감'의 크기에는 10점 만점 같은 것은 없다. 지금 자신의 행복감이 10점 만점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자신이 10점 만점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앞으로는 더 이상 행복해질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가 현재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을 누리고 있기에, 더 이상 행복해지는 것이 불가능할까? 확실한 것은, 그가 생각한 최상의 행복보다 더한 행복이 있다고 해도, 10점 만점의 척도로는 그 크기를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한 행복이 있다는 걸 의식하게 되었을 때, 그의 대답은 어떻게 달라질까? 척도를 은근슬쩍 옮기는 것이다!
응답자들이 느끼는 실제 행복감을, 좌우로 무한히 길게 뻗어 있는 하얀 벽 위의 점이라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점의 위치를 말하기 위해 그 위에 임의로 길이 10의 자를 갖다대어 그 눈금을 읽어온 셈이다. 문제는 시간이 꽤나 흘러 점의 위치가 바뀌었을 때이다. 우리가 그 점의 위치를 다시 자를 갖다대어 측정하고자 할 때, 그 전에 자를 갖다댄 위치에 그 자를 정확히 갖다댈까? 아니면 점의 위치가 달라졌으니 자를 갖다댄 위치도 그 방향으로 은근슬쩍 옮겨갈까? 같은 응답자들을 시간 간격을 두고 추적 조사한 패널 자료를 이용한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응답자들이 실제로 이렇게 행복을 측정하는 척도를 은근슬쩍 옮겨왔다고 한다(Kaiser, 2020).
물론, 이 척도 이동(Scale Shift)의 효과가 그간의 행복 연구들의 발견을 모두 뒤집을 정도로 크지는 않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변수들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의 크기를 실제보다 과소 평가하거나, 혹은 적응(adaptation)의 효과를 과대 평가할 수는 있다는 것.
그렇다면, 이 '척도 이동'은 이스털린의 역설을 부분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사람들이 소득의 증가와 더불어 더 행복해졌지만, 그런 사실을 척도 이동으로 인해 우리가 다만 설문 자료를 통해서는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이스털린과의 인터뷰 기사에서 이스털린에게 실제로는 물어봤지만 채 다루지 못한 질문이 바로 이 질문이었다. 그리고 아래는 이 질문에 대한 이스털린의 대답.
"사실, 역설이 나타나는 주요한 이유가 바로 그 척도의 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두의 소득이 증가할 때 사회적 비교에 의해 행복을 평가하는 척도도 따라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카너먼과 트버스키의 발견으로 말미암은 준거 기준(reference level)에 대한 제 책의 논의를 참고하세요. 행복을 평가하는 척도의 기준이 올라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올라간 척도를 기준으로) 5년 전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하죠. 하지만 실제 5년 전엔 그 척도의 기준이 낮았기에, 그들은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행복했던 겁니다. 척도의 상향 이동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 사람들의 행복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에 관한 요점을 놓친 것입니다. 제 책의 10장 3절이 우리가 과거에 소득이 낮았을 때의 행복을 어떻게 잘못 기억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어떻게 제한적인 분량의 기사에 그 내용을 풀어내야 할 지도 난감했고, 그래서 이 문답은 기사에서 아예 생략하였다.
이런 답이 나온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털린이 한 사람의 행복 수준을 어떤 사람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과 그가 마음 속에 보유한 준거 기준(reference level)의 함수로 보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스털린이 위의 인터뷰 답변에서 언급하고 있는 책인 «지적 행복론»의 한 부분이다(p. 53).
최근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과 에이머스 트버스키가 발견한 것은 이 모든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를 줍니다. 이 둘은 사람들이 특정한 상황을 평가하는 경우, 그들이 상황을 판단할 때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기준인 준거 기준을 대체로 염두에 둔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러한 준거 기준은 대부분 사회적 비교, 즉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관찰하면서 설정됩니다.
즉,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내적 기준을 그 마음 속에 갖고 있고, 그 기준에 비추어 현재 자신의 삶을 평가한다. 그리고 이스털린에 따르면, 그 준거 기준은 사회적 비교에 의해 설정된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소득을 준거로 제 소득을 평가하기 때문에, 주어진 한 시점에는 소득이 많은 사람이 더 행복하지만, 경제 성장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더 행복해지는 것이 행복의 증가를 가져오지는 않았다는 것이 '이스털린의 역설'을 이스털린이 해명하는 방법이다.
답변 마지막 문장에서 이스털린이 언급한 «지적 행복론» 10장 3절의 내용(pp. 178-180)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그들이 5년 전에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5년 전의 준거 기준이 아닌 지금의 더 높아진 준거 기준을 염두에 두고 과거의 상황을 평가해 답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 자신이 지금보다 행복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지만, 지금보다 낮은 준거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했던 5년 전에 실제로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행복했다는 것. 이스털린에 따르면 현재의 상황을 바탕으로 과거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경향은 행복에만 국한되지 않고, 정치 영역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과거에 자신의 정치 성향에 대한 질문을 받은 사람들에게 몇 년 후 그 당시 자신의 정치 성향에 대해 물으면, 실제로는 정치적 입장이 바뀐 사람들이 바뀌지 않았다고 응답한다는 것.
이스털린은 "역설이 나타나는 주요한 이유가 바로 그 척도의 이동"이라고 말하지만, '이스털린의 역설'이 나타나는 까닭이 응답 척도의 이동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준거 기준이 이동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 매우 상반된 함의를 갖는다. 첫번째 설명에 의하면, 사람들이 실제로는 더 행복해졌는데도 그들의 응답에서 그러한 사실을 읽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되지만, 이스털린의 두번째 설명에 의하면 사람들이 실제로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문제는, 과거 자신의 행복 수준에 대한 응답자들의 기억과 과거 그들의 실제 응답이 차이가 나는 현상을 두고, 상반된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해보인다는 점이다.
그럼, 둘 중 어느 쪽의 해석이 진실인지 가려낼 방법은 없을까? 0점에서 10점 범위의 유한한 척도를 이용하지 않고 사람들의 행복을 평가할 수는 없는 걸까?(척도를 가령 4점짜리 척도로 바꾸는 것이 딱히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건 물론이다)
이 어려운 질문은 일단 후속 연구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다음 포스팅에서는 이 질문을 조금 더 파고들어볼 수 있을지도.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보단, 행복을 증가시켜주는 효과가 분명한 몇 가지 변수들에 집중하는 것이 실용적일 테다. 위의 인터뷰 기사에서 이스털린은, 행복경제학자로서 코로나 팬데믹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
"건강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천 중 하나죠. 팬데믹이 우리 모두의 행복에 미친 부정적 결과가 바로 이 점을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편적 의료 보장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긴요하다는 점 역시 알 수 있지요."
더 나아가 이스털린은 "복지국가의 수립"을 주문한다. 아래는 «지적 행복론» 135쪽.
과거의 데이터는 복지국가 정책과 행복 사이에 정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국가들은 정부가 복지국가 정책을 포기하면서 행복 수준이 급격하게 하락했지요. 복지국가 정책을 도입하는 데 앞장선 북유럽 국가들은 세계에서 행복 수준이 가장 높습니다.
하지만 이건 부유한 국가들만의 처방이 아닐까? 다시, 인터뷰 기사의 일부.
"저소득 국가들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코스타리카는 비록 가난한 나라였지만 복지국가를 건설했고,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들 중 하나입니다. 한국이나 미국보다도 더 행복하지요."
«지적 행복론» 134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에는 복지국가 정책을 지원할 수 있을 정도로 소득이 높은 국가들이 많습니다. 덴마크는 1880년대에 이러한 정책을 도입하는 데 선두주자였지요. 당시 덴마크의 1인당 GDP는 오늘날 가치로 환산했을 때 3000달러가 조금 넘는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저개발 지역 인구의 약 4분의 3이 1인당 GDP가 3000달러 혹은 그 이상인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냐고? 글쎄, 경제 성장이 행복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서 이스털린은 회의적이지만, 돈으로 행복을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물어본다면 아마 그 돈을 사회 복지에 쓰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이스털린 교수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을 바라며. (2022. 10. 10)
P.S. 결국 올해 수상자는 이스털린도, 애쓰모글루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