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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기린 Oct 06. 2020

스무 살에는 알 수 없던 책임이라는 무게

조별과제, 흔히 있는 무책임 팀원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광고홍보학과는 그렇게 조별과제 수업이 많대'


광고홍보학과로 입학한 제가 그 무서움에 대해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조별 과제를 처음 경험해본 건

1학년으로 들어오고 난 두 번째 수업부터였습니다. 교수님이라는 호칭조차 익숙하지 않았던 그때,

우리는 각자 처음 보는 얼굴들과 함께 같이 과제를 이어나가야 했었죠


그렇게 시작된 조별과제의 운명은 학기마다 적게는 3개, 많게는 6개 정도로 이루어지면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는 생활이 4학년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죠.


운이 좋아서 좋은 팀을 만나던 적, 운이 나빠 조장이 되어 나 혼자서 준비에 발표까지 했던 적,

그럼에도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해 심적인 책임까지 껴안았던 적,


좋았던 기억보다 나빴던 기억이 더 선명하게 기억나듯

조별과제의 기억은 나에게 좋았던 기억보다 책임이라는 부담스러운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왜 이런 걸 하는 거지?'


새벽 2시쯤이 되면 언제나 드는 생각,

느지막한 시간이 되면 다들 예민해집니다. 시간은 지나가고 있는데 진전은 없으니 말이죠.

책임감 없이 회피해버린 다른 팀원들을 욕하면서 학점이라는 시시한 이유로 그 늦은 시간에 과제를 부여잡고 있는 나를 뒤돌아 보면 '그냥 네들처럼 다 때려치울까' 이런 생각도 했었어요.


물론 그 시시한 이유를 포기할 수 없어서 때려치우지 못하긴 했지만요.




그로부터 6년 후, 스물여섯이 된 지금


종종 시시하지 않은 이유로 밤을 새우곤 합니다. 물론 그때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일의 능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진 않습니다. 일을 하는 것, 그리고 글을 쓰는 건 손이 아닌 엉덩이로 하는 거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대학을 졸업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때의 일과 지금의 일은 전혀 다르다고 할 정도로 큰 차이가 난다고 느낍니다. 마치 그난 4년 동안 했던 과제와 공모전은 어린아이의 재롱이었다고 생각될 정도로요.


다른 것보다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PT를 보는 대상이 돈을 받는 교수에서 돈을 주는 클라이언트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학점이라는 시시한 성적표를 주지 않습니다. 몇 배는 더 깐깐하게 비교하고 분석하면서 맘에 들면 우리와 계약을 하고 맘에 들지 않으면 다른 대행사를 찾아갑니다.  


더 이상 그저 그런 시시한 이유로 나에게 책임감을 안기지 않더라고요.





가끔씩 발표 당일 날 출석하지 않았던 발표 담당 그 친구가 생각납니다.


'그 책임감 없는 모습은 우리에게만 보여줬던 모습일까?'

'그 사람도 학점이라는 시시한 이유로 인해 책임감을 가지지 않았던 것일까?'

'지금도 책임감 없는 모습으로 초지일관하게 살고 있을까?'


그 시기에는 흔한 푸념이라고 늘어놓았겠지만, 지금은 그 친구들에 대한 걱정이 앞섭니다. 같은 학과에서 수많은 팀플 수업을 하게 되면 팀이 구성되었을 때 팀원들을 보고 대충 결과가 감이 오거든요.


'이 친구가 우리 팀이구나, 이번 학기는 스트레스 좀 받겠다.'

책임감이 없는 친구들과 팀이 되면 항상 비슷한 결과로 나타납니다. 주변 사람들의 위로와 함께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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