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유령

(10회) 제1장 악연(惡緣) - 공작의 기획자들

by 해암

공작의 기획자들






광화문광장을 휩쓸었던 광란도 가을 해수욕장처럼 잊혀갈 즈음 석홍과 태선이 탑골공원 서문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팔각정 바닥에 햇빛이 비스듬히 비쳐 드는 늦은 오후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은 저기 팔각정 오른편에 있었더군. 손병희 선생과는 팔각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자리였어.”

언젠가 석홍이 물었던 걸 상기하고 태선이 말했다. 석홍은 고개만 끄덕였다.


태선이 팔각정에 시선을 둔 채로 물었다.

“나를 다시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석홍은 잠시 태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길 선생, 생각을 고쳐주시오. 지난번엔 길 선생이 내 부탁을 무시했지만 이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어. 빨리 돌아와야 해!”


“호의라도 베풀듯이 말하는군.”


“우정이오! 난 평생을 친구란 걸 모르고 살았어. 나도 늙었나 봐. 이 나이가 되어 한국에서 생각나는 사람은 길 선생 하나뿐이오.”


“그런 말은 혁명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잖소! 양심, 의리, 종교, 우정 등등··· 눈에 보이지 않는, 소위 감상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념은 무자비하게 끊어내야 한다고 우리 함께 배우지 않았소?”


“그건 아마추어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 그런 건 예전에 초월했어.”


“초월했다?”


“그럼, 초월했어!”


태선이 손을 뻗어 석홍의 손등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덮었다.

“바로 그 점이야. 인간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삶을 살지 못해, 절대로. 마르크시즘에 내재 된 가장 치명적인 오류가 무엇이겠소? 바로 인간의 본성에 반한다는 거잖소? 그건 구십 년 동안 이미 결론이 난 문제야. 이제 그만하고 돌아와!”


“오류는 어느 쪽에든 존재해. 끊임없이 보완해 가는 거지. 그리고 우리는 이번 쇠고기 투쟁으로 충분히 가능성을 확인했어!”


“이번이 아니라 훨씬 더 이전이겠지. 이미 십수 년도 더 전이야. 한 사기꾼이 조작하여 퍼뜨린 소위 ‘병풍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이 바뀌었지. 그자가 아니었다면 대통령은 분명 다른 사람이었어. 그 사기꾼이 심심해서 장난친 건 아니잖아, 그자의 배후에 누가 있었을까? 당신들은 속임수를 동원하면 나라를 뒤엎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그때 얻었던 거야.”


석홍은 빙그레 웃고, 태선은 말을 계속했다.

“공작의 기획자들은 자신감이 붙었겠지. 나중에 발각돼도 무사했으니까. 대통령을 바꾼 그 사기꾼만 고작 1년 9월형을 받았고, 그 허위 사실을 진실로 위장하여 나팔을 분 공영방송 책임자들은 누구 하나 내부 징계조차 받지 않았어. 정권을 거머쥔 쪽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입을 씻었고. 사기극의 배후 기획자들은 그 후 모두 승승장구 출세 가도를 달렸지.”


석홍은 목소리가 가팔라지는 태선을 조용한 미소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참 순수해. 그러니 질 수밖에."


태선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하던 말을 계속했다.

“사기꾼의 도움으로 거머쥔 정권이 5년 만에 도로 넘어가자, 당신들은 이번에는 광우병 공작으로 시동을 건 거야. 백 퍼센트 조작된 거짓 정보를 MBC의 ‘PD 비망록’이란 프로그램이 보도하면서 공작에 불을 댕겼지. 그 후 수개월간 나라를 뒤흔들었고, 천문학적인 경제적 손실까지 초래했어. 그러나 이번 역시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는다는 말은 못 들었어. 엄연히 밖으로 드러난 주모자인 ‘광우병 대책 회의’마저도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늠름해. 그 누구도 시비 거는 자가 없어. 그만큼 세상이 기울었다는 것도 알아!”


석홍이 한 손을 들어 올려 태선의 말을 막았다.
“길 선생,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상,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세상을 만들기가 그리 간단한 줄 알았소? 대가 없이 공짜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아시오? 그런 따위의 공염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그리고, 두고 보시오. 이번은 이 정도로 끝났지만, 다음번엔 그렇지 않을 거요. 반드시 마침표를 찍고 말아. 진지 구축은 이미 끝냈거든.”


“소름 돋는 일이야. 이런 자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버젓이 돌아다니다니.”


“옛동지에게 너무 그러지 말게. 난 곧 일본으로 건너갈 예정이라 얼굴이나 보려고 온 거야.”


“그렇다면 잘 되었어. 이젠 그만하고 여생을 편히 쉬는 데나 신경 쓰게.”


“조국의 현실이 날 쉬게 놔두지 않을 것 같네만.”


“천만에! 당신들은 허상을 좇고 있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착각이야!” 태선의 목소리가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석홍은 개의치 않고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물길의 방향은 바뀌었네. 60년 전의 전쟁에서는 실패했지만, 그 후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는 우리가 이긴 거야. 이젠 학계, 교육계, 언론, 법조, 노동, 문화계까지 이미 헤게모니는 넘어왔네!”


“아직은 소수야. 우리 국민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지 마!”


“소수? 이미 소수가 아닐세. 설사 소수라 쳐도 마찬가지야. 산술적 숫자는 의미가 없어. 그만한 거야 길 선생도 잘 알잖아? 그리고 마음에 없는 소리는 그만 해! 길 선생은 이미 충분히 알고 두려워하고 있어!”


“일본엔 언제 갈 텐가?”


태선이 화제를 바꾸려 했지만, 석홍은 무시했다.

“가장 직접적으로 효과가 나타나는 분야는 언론과 법조계였어. 그중에서 내가 오랫동안 공을 들인 분야는 법조였지. 내 얘기 좀 해줄까?”


석홍은 자기의 말에 도취 된 듯 태선을 힐끗 쳐다보고는 자신의 지난 업적을 자랑스럽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1973년 4월에, 김일성 수령 동지께서 대남공작 담당 요원들을 불러서 말씀하셨지. ‘앞으로는 남조선에서 머리 좋고 똑똑한 아이들을 데모에 내몰지 말고 고시 준비를 시켜야 한다. 열 명을 준비시켜 한 명만 합격해도 목적은 달성된다. 각급 지하당 조직들은 대상을 잘 물색하여 그들이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고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야 한다.’

그 교시가 나온 뒤, 남조선의 지하조직들은 바쁘게 움직였어. 그 후 삼십 년, 우리가 운영한 고시원만 열두 곳이었고, 관리한 학생만 오천이 넘어. 내가 주로 한 일은 자금 조달이었지. 어때, 그중에서 지금까지 몇이나 합격했을까?”


“몇이야?”

태선은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되묻고 만다.


“허허, 상상에 맡기겠네. 어느새 역사가 깊어. 이미 오래전에 한 바퀴 순환이 이루어졌으니까. 고위직까지 오른 뒤 퇴직하여 변호사가 되기도 하고. 나중에는 그들 중에서 고시 출제를 하고, 채점도 하였다면··· 어떻겠나, 잘 생각해 보게.”


“그것이 사실이었구나···”

태선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혁명 전사들이 부득이 체포되었을 때 그들을 전담해서 변호해 줄 변호사 조직이 존재하고, 도와주는 판검사가 있다면, 어떻겠어? 허허허!”


석홍은 한 차례 작위적인 웃음을 보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간과하기 쉬운데, 고시에 붙지 못한 학생도 그걸로 끝이 아니야. 그들 중에서 공무원도 되고 국정원에도, 경찰에도 들어가고, 언론계로도 진출하고 그랬거든. 그렇게, 그렇게 세상은 바뀌었어. 언론이든 법조든 정치든 문화든··· 절대로 배신 못 해. 교적의 역사는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란 말이오!”


거기까지 말을 마친 석홍은 지긋이 태선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한마디를 툭 던졌다.

“언론계는 또 어떻게 됐는지 말해줄까?”


“그만해, 듣기 싫어!”

태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만하자구! 언론계는 길 선생도 대강 짐작할 거야.”


“이번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마! 자네를 또 보고 싶지 않아!”


“천만에!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올 것이네. 며칠 후 원로회의에 참석한 뒤 당분간 한국을 떠날 생각이야.”


“자네 거기에도 참석하는군. B가 좌장이지?”


“사실 길 선생도 함께 있어야 할 자린데 말이야.”


“이젠 대놓고 못하는 말이 없군. 이 선생은 아직도 나를 동지로 보나?”


석홍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도로 앉았다.

“허허, 그러면 우리 사이를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렇게 묻고는 한차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내, 마지막으로 당부하겠네. 지난번엔 길 선생이 내 부탁을 거절했네만, 다시 만날 때는 잘 생각해 봐. 그리고 우정이란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기억해 두게!”

그 말을 끝으로 석홍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동길을 걸어 올라가며 태선은 몇 번이나 걸음을 휘청거렸다. 마음은 좌절과 분노가 뒤범벅된 수렁에서 허우적대었고, 육신의 구석구석이 실제로 무너져 내리거나 서서히 부식되어 소멸해 가는 것같이 아프고 삐걱거렸다.

다만 그의 생각만은 ‘이보게 석홍, 저울의 추가 기울었다는 건 나도 알아. 그러나 기울기는 다시 복원되기도 해. 그리고 난 레닌의 후예와 친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네.’라고 거듭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짐이 온전한 신념에서 비롯된 자신감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내면에서 대책 없이 피어 나오는 두려움의 크기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그는 한낮의 남인사마당에서 놀이마당을 벌이는 패거리가 없음에도, 환청 인양 둥둥거리는 북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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