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유령

(9회) 제1장 악연(惡緣) - 교적(敎赤)

by 해암

교적(敎赤)






2008년 6월 18일,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가 발표한 대국민 사과 성명은 안쓰럽고도 슬펐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청와대 뒷산의 중턱에 홀로 앉아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바라보며, 국민을 편안히 모시지 못한 저 자신을 눈물로 자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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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원하지 않는 한 30개월령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일은 결코 없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정부로부터 확고한 보장을 받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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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비서진과 내각을 대폭 개편하겠습니다. 대선 공약이었던 대운하 사업도 국민이 반대한다면 추진하지 않겠습니다.’


성명이 발표되자 정권 퇴진 시위에 동참하던 시민의 발걸음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여론 역시 폭력시위로부터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길 교수는 석홍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시위도 끝난 듯하니, 자네는 그만 일본으로 돌아가게. 그리고 다시는 이 땅을 밟지 마!”


“천만에, 쉽게 끝나지 않을 걸세. 두고 보면 알아!”

석홍은 코웃음을 쳤다.


결과는 석홍의 말이 맞았다. 시위대의 숫자는 줄었으나 시위의 양상은 더욱 극렬해졌다.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격렬한 충돌이 이어졌다. 연속 3일간 지속된 이때의 시위를 나중에 ‘48시간 릴레이 투쟁’이라 불렀다.


시위대는 경찰버스에 불을 지르거나 밧줄과 와이어를 걸어 넘어뜨렸다. 망치와 쇠 파이프로 차량을 부수고 정차된 차량의 주유구에 불순물을 투입하거나 칼로 타이어를 찢었다.


‘48시간 릴레이 투쟁’이 진행 중이던 늦은 오후. 길태선 교수와 커널 문, 배흥수는 북인사마당에 나란히 서서 광화문 쪽을 바라보았다. 광화문 앞에서 경찰버스가 불길에 휩싸여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평소 복잡하던 율곡로에 바퀴 달린 거라곤 자전거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때, 안국역에서 북인사마당 쪽으로 걸어오는 동지가 보였다. 늘 그렇듯 그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걸어왔고, 태선이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려 반색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정 사범 아니오? 어딜 다녀오시나 보오?”


“네, 병원에서 오는 길입니다만, 세 분은 어쩐 일로···?”


“우린 저 난리 통을 구경하고 있었소. 그래 윤 작가께서는 아직 의식이···”

태선은 말끝을 흐리며 재희의 안부를 물었다.


“네, 아직···”

짧게 대답한 뒤, 동지는 몸을 돌려 인사동길로 향했다.

길 교수는 ‘자, 우리도 이만 들어갑시다.’ 하며 나머지 두 사람과 함께 동지의 뒤를 따라 일묵서예로 걸음을 옮겼다.


길 교수의 제안으로 네 사람은 일묵다실로 들어가 앉았고, 배흥수가 일회용 차 팩을 찻잔에 하나씩 담아, 뜨거운 물을 부어 각자의 앞에 놓았다.


태선이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고 나서 먼저 입을 뗐다.

“정 사범, 오늘은 내가 심중에 오래 담아 두었던 얘기 하나를 털어놓고 싶어요. 어쩌면 정 사범이 겪고 있는 오늘의 고통과도 무관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태선은 잠시 틈을 두며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혹 ‘교적’이란 말을 들어본 적 있소?”


“처음 듣습니다만····” 커널 문이 대꾸했다.


“교적이란 게 있었어요. 참 오래되었지, 어언 육십 년 전 일이니까.”


태선은 과거 어느 시점을 회상하듯 잠시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이 없다가, 짧은 한숨을 불어내고는 짧지 않은 얘기를 풀어놓았다.


“휴전 후 1959년 1월에 북한은 ‘노농적위대’란 조직을 창설합니다. 전 인민 무장화를 위한 조치였어요. 6.25 전쟁이 휴전으로 끝을 맺었지만, 김일성은 여전히 한반도 적화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요. 한편, 남쪽에서는 지하로 숨어들었던 남로당 세력들이 틈만 나면 죽순처럼 고개를 내밀었는데, 그들은 노동계, 교육계, 농민까지 여러 분야에 스며들었어요.

교육계에서 표적으로 삼은 대상은 교사들이었어요. 그들은 교사들을 포섭해서 교원 노조 결성을 시도합니다. 학생들을 이념적으로 세뇌하기 위해서지요. 그러나 휴전 후, 워낙 공산당에 대한 경각심이 높았던 때라서 이미 이들의 정체가 간파되었고, 이들은 단식투쟁을 벌이며 끈질기게 맞섰지만 어림없었어요.

그리고 1961년, 군사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혁명 공약의 첫 번째 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는다.’라고 못을 박았잖아요. 그 바람에 남로당은 다시 두더지 신세가 되었고, 교원 노조 결성의 주모자들은 더러 잡혀가거나 해외로 도피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공산주의자의 속성은 그런 일로 위축되지 않아요. 이들은 합법적인 교원 노조 결성에 실패하자 교적(敎赤), 즉 ‘교원 적위대’란 비밀 조직을 결성합니다. 이는 북한의 ‘노농적위대’를 본떠서 만든 남로당의 하부조직이었지요. 굳이 합법적인 조직에 매달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기도 하고.

‘교적’은 태생적으로 폭력 지향적인 조직이었는데, 그 후 남한의 시대별 정치 지형에 따라 지하로 숨어들거나 다시 고개를 내밀거나를 반복하면서 명맥을 유지해 왔어요.”


동지는 반쯤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그의 모습만으로는 교수의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처럼 보였으나, 그에게 교수의 말이 들릴 리 없었다. 말의 의미도 생소해서 ‘노농적위대’니 ‘교적’이니 하는 말들은 소리로만 들릴 뿐, 말로서 개념화되지 못한 채로 귓등을 비켜 갔다.


“교수님, 저는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교수가 말을 멈춘 틈을 타 동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교수가 동지의 손을 잡았다.

“이해해요, 정 사범. 가기 전에 내 한마디만 더 하리다. 내가 이런 얘기를 두서없이 한 이유는, 요즘 내 마음이 어렵고 심란한 탓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윤 작가를 해친 범인의 그림자와 저자들의 행태가 내 눈에 자꾸만 겹쳐 보이기 때문이오.”


말하는 도중, 교수는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창밖 광화문 쪽을 가리켰다.


“윤 작가가 당한 사고는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면, 학습을 통해 폭력성을 습득한 자의 행위로 볼 수밖에 없기에 하는 말이오. 극에 달한 광기가 아니라면 짧은 시간에 타인을 치명적으로 가해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잖소?”


“교수님께서는 혹시 그 ‘교적’이란 조직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동지가 물었다.


“단정 짓지는 맙시다. 지금은 ‘교적’이란 말조차 쓰이지 않아요. 초기에 내걸었다가 스스로 숨긴 이름이니까. 그러나 그 뿌리는 여전히 살아 있어요. 마치 바이러스처럼 형태를 바꾸며 더 강성하게 살아남았지요.”


동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옥상 쉼터로 올라갔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광화문 방향을 바라보았다.
시위대의 모습은 눈앞의 현실이라기보다는 악몽의 한 조각 같았다. 그가 오늘 설핏 본 시위대의 모습은, 전쟁터가 아닌 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질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는 상상할 수 없는 그야말로 야만의 현장이었다.


‘저들과 설사 관련이 있다고 한들, 범인을 밝혀내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폭력시위는 며칠 더 지속되었다. 시위대는 대치한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고 박카스 병에 염산을 넣어 투척했다. 경찰을 끌어내 고립시킨 뒤 쇠 파이프와 각목으로 폭행하고, 피투성이가 된 경찰을 후송하기 위해 진입하는 구급차를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무고한 사람을 끌어와서는 프락치라며 폭행하고 억류하는 일도 벌어졌다.

폭력시위를 돕지 않는 언론사 건물에 돌과 화분을 던져 유리창을 파손하고 건물 안에 오물을 투척하였으며, 시위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들을 폭행하고 취재 장비를 빼앗았다.

청계광장에서 열렸던 6.25 사진 전시회에 난입하여 전시된 사진을 불태우기도 했다.

어떤 학교에서는 전교조 교사들이 수행평가 가산점을 미끼로 학생들을 시위에 끌어들이는 일도 벌어졌다.


폭력시위를 지켜보는 시민의 시선은 점점 싸늘해졌다. 그러자 시위 주동자들은, 8월 15일 대학로에서, 오천오백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백일 기념 촛불집회’를 끝으로 시위를 중단했다. 재희가 사고를 당한 때로부터 두 달 반 만이었다.


시위가 끝난 후, 정부는 시위로 인한 피해를 조사하여 발표했다.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2008년 5월 2일부터 8월 15일까지 총 2천 398회의 시위가 벌어지는 동안 500여 명의 경찰이 다쳤고, 177대의 경찰버스가 불에 타거나 부서졌으며, 총 2조 6천억 원의 경제적 피해를 보았다.


정권 퇴진 시위가 벌어지던 두 달 반 동안 수많은 괴담이 나돌아 국민을 현혹했다. 그중 ‘다 죽습니다!’란 제목의 전단지에는 이런 글들이 적혀 있었다.


‘우리 부모, 형제, 자식들이 위험하다! 에이즈보다 무서운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를 학교와 군대에 일차적으로 보급할 계획.’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뇌가 스펀지처럼 뚫리고 사지가 마비되어 고통스럽게 죽는다. 라면수프, 생리대, 기저귀, 젤리, 약 캡슐, 각종 화장품, 설렁탕, 과자 등 생필품에 모두 미국산 쇠고기 성분 사용.’


‘이런 사실을 감추기 위해 대통령이 매스컴을 봉쇄 조치.’ 등의 괴담들이었다.


이들 유언비어는 단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는 그 거짓을 믿었다.

학생들이 뇌에 구멍이 뚫려 죽게 됐다며 울부짖는 등 사회 전체가 발작 증세를 보였고, 언론은 이런 현상들을 그대로 뉴스로 내보냈다. 전국의 쇠고기 구이집은 텅텅 비었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제로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 괴담들이 거짓이며 과장됐다는 글을 쓴 한 교수는 살해 위협을 받아 한동안 바깥출입을 못 했다.


그리고, 그 거짓 괴담의 뒤에 누가, 어떤 집단이 도사리고 앉아 악마의 미소를 짓고 있는지는 아는 이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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