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제1장 악연(惡緣) - 광장은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광화문광장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광기와 증오의 굿판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세종로를 지나다니는 차량의 행렬은 석양빛 속에서 물 흐르듯 평화로웠다. 변한 것이라곤 계절뿐이었다. 어느덧 광장 주변의 나뭇잎이 윤기를 잃어가고, 성급하게 물든 나뭇잎들은 하나둘씩 떨어졌다. 세종대왕 동상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햇살은 따스했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 다녔다. 대개 젊은 남녀인 그들은 끊임없이 재잘대며 이따금 크게 웃었다.
광장은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재희는 여전히 죽음의 문턱을 밟고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의 계단에 앉아 광장을 바라보는 동지의 명치 깊은 아래에서 뜨거운 무엇이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마치 묵은 화산 터의 틈새에서 가스가 새어 나오듯이.
동지에게 분노란 익숙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는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는 오랜 수련을 거치기도 하였지만, 재희가 사고를 당한 후 오직 그녀를 살리는 데만 매달려 오는 동안, 그 안의 분노를 직시할 겨를마저 없었는지도 몰랐다.
가슴 속 어디에 뜨거운 돌덩이가 박힌 것같이 아팠다. 이처럼 분노의 감정에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휩싸이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분노와 함께 떠오른 생각은 복수였다. 동지는 만약 범인을 찾아 복수한다면 재희가 코마 상태를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마저 했다.
대학 졸업 후 몇 년 동안 중학교 국어 선생 노릇이 다인 재희가 타인과 큰 원한을 맺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혹여 그녀에게 접근했다가 거절당한 남자 중에 혼자 원한을 키워온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에 대해 그가 들은 바는 없었다.
동지가 아는 건 그가 직접 본 두 사건이 전부였다. 하나는 재희가 대학 2학년 때 그녀를 괴롭혔던 의대생 스토커이며 다른 하나는 역사 선생 박일수였다.
역사 선생 박일수를 수소문해 보았으나 그는 학교에 없었다. 서무과의 젊은 여직원은 박 선생이 교직을 떠났으며 그 후의 행방은 모른다고 했다. 박이 살던 아파트를 찾아가 보았으나 이미 이사한 뒤였다.
동지는 창수에게서 도움을 받을 생각으로 여러 번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창수의 목소리 대신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멘트만이 돌아왔다. 창수는 언제부턴가 일묵서예에 나타나지 않았다.
재희가 알려준 스토커는 이종규라는 의과대학 본과 3학년으로, 삼 수 끝에 대학에 합격한 학생이었다. 동지가 휴가 중에 재희의 대학 캠퍼스를 찾아갔을 때였다. 그날 재희는 평소와 달리 동지를 데리고 교정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기억하기로는 대운동장을 거쳐 아크로폴리스와 중앙도서관 앞 광장을 돌아 나왔고, 문과대학 앞을 거쳐 숲이 있는 산책길을 천천히 걸었다.
재희는 친구들과 마주칠 때면 손짓으로 아는 체를 했다. 친구들은 눈을 찡긋하거나,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손만 살짝 들어 보이며 지나쳤다.
숲길을 돌아서 정문을 향해 가던 중에, 재희가 동지를 벤치에 끌어 앉히며 속삭였다.
“오빠, 쳐다보지는 말고 들어요. 오른쪽으로 오십 미터쯤에 남학생 하나가 막 벤치에 앉았어요."
“왜?, 누군데?”
동지는 고개를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스토커! ”
“스토커?”
“줄곧 우리 뒤를 따라왔어요. 의대 본과 3학년인데, 석 달쯤 됐어요.”
“그건 재희에게 자연스러운 현상 아닐까? 아마 잠재적인 스토커는 더 있을걸?”
“문제는 저 학생이에요. 어떻게 나를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매주 두 번쯤 나타나서 힘들게 해요. 먼 길을 와서는 강의실 앞이나 학교 식당이나 어디든 내 주변에서 서성거려요. 우리 집까지 알고 있어요. 언젠가는 아침에 집을 나오는데 우리 집 담벼락에 기대서서 퀭한 눈으로 쳐다봤어요. 아주 끔찍하고, 무서워서 기절할뻔 했어요!”
재희는 짧고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끝내 거절하면 언젠가는 대문 앞에서 시체를 보게 될 거래요.”
“오늘 일부러 저 학생 보라고 시위한 거야? 그렇다면 오히려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않았을까?”
“오늘은 다목적!”
말을 하며 재희는 웃었다.
"저 학생 이름이 뭐지?"
동지가 물었다.
"이종규"
이튿날, 동지는 혼자 수소문하여 의과대학으로 이종규를 찾아갔다. 그가 혼자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손가락으로 어깨를 살짝 노크했다.
“실례합니다!”
동지는 편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무척 놀란 듯했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의 태도나 눈빛은 동지를 모르지 않았고, 이미 어떤 상황인지를 간파한 듯했다. 그의 눈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으나, 한편 밀리면 안 된다, 기선제압을 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더듬거리는 목소리였으나 그는 분명 평소 자신의 성량보다 큰 목소리로 말했다.
동지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힌 시간은 삼사 초쯤이었다.
“왜, 왜 이러세요?”
그는 고르지 않은 걸음으로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동지는 한 발짝 성큼 다가섰다.
“아무 짓도 안 합니다. 다만 재희를 괴롭히지 말라는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괴롭힌다고요? 사람의 진심을 그렇게 함부로 취급해도 되는 겁니까?”
그는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오기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거 알지 않습니까? 그만두세요!”
동지는 다시 한 발짝 다가섰다.
이종규, 그는 상대의 눈빛이 두려웠다. 상대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대의 말을 스스로 만들어서 들었고, 그 모든 것이 참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입받고 있었다.
상대의 요구에 불복했을 때는 어떤 무서운 제재를 받을 게 확실하지만, 그 제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데서 오는 두려움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당신은 오기를 부릴 만큼 강한 멘탈이 아닙니다. 더는 무가치한 일로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동지가 말했다.
그날 이후 이종규는 재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 2시경, 진주 도심의 상가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이종규 내과의원에 한 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미색 면바지에 단추 달린 검정 셔츠를 밖으로 빼서 입고, 어깨에 작은 배낭을 걸친 그는 동지였다.
대기실에는 서너 사람이 대기 중이었다. 동지는 데스크 앞으로 다가가 접수를 한 뒤 대기실 벽에 붙은 흰색 아크릴판에 돋움체로 쓴 이종규 원장의 약력을 읽었다.
진료실 안에는 체격이 왜소한 젊은 의사가 순서에 따라 들어오는 환자를 맞았다.
진료실 문을 밀고 들어 온 동지와 이종규, 두 사람의 시선이 섞이는 순간 이종규는 눈을 부릅뜬 채로 입술을 떨었다.
‘너무나도 선명한, 잊을 수 없는 눈빛’ 그는 의자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일어나려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어, 어떻게 여길···”
“올해 5월 31일, 금요일 밤에 선생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동지가 물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기억합니까? 넉 달도 더 전이잖습니까? ···금요일이라면 퇴근하고 집에 있었겠죠”
“댁은 여기 진주인가요?”
“그럼요. 여기가 제 고향이고, 서울은 웬만해선 안 갑니다. 저는 서울이 싫은 사람이니까요!”
말을 주고받는 동안 동지의 시선은 상대의 눈동자를 뚫고 들어갈 듯이 쏘아보았다. 그러고는 ‘미안합니다.’ 한마디를 남긴 채 돌아섰다.
뒤에서 ‘아니,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그가 외쳤지만, 동지는 ‘당신은 아니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병원 문을 밀었다.
그날로 진주의 이종규는 범인의 범주에서 제외했다. 혐의 대상으로 떠올린 두 사람 중 나머지 한 사람, 박일수의 행방은 몰랐으므로 동지의 복수 계획은 일단 벽에 부딪힌 셈이었다.
동지는 서울에 도착하여 바로 재희의 병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