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제2장 고독한 여정 - 맹골수도
2013년 12월 31일 밤, ‘MBC 가요 대제전’은 방송국 공연홀에 마련된 주 무대와 과천 경마장의 ‘씨엔블루’ 야외 특설 무대를 교차로 내보내며 장엄하게 막을 올렸다.
경마장의 트랙 위에서 잘생긴 세 청년이 어깨에 느슨히 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다섯 손가락이 길쭉한 기타 넥의 아래위를 신들리듯 오르내리고, 피크를 쥔 손이 현란한 솜씨로 기타 줄을 튕기거나 죽죽 내리그을 때마다 현장에서 지켜보는 관객들은 어쩔줄 모르고 비명을 질러댔다.
가수들의 무대 틈틈이, 근육질의 말들이 양발을 높이 치켜들고 콧김을 내뿜었다. 그 시간 경마장의 말인지 빌려온 자료화면인지는 모르나 곧 맞이할 새해를 축복하는 것일 터였다.
2014년, 갑오년은 청마(靑馬) 해였다. 그러나 청마처럼 역동적이고 희망적인 해가 되지는 못했다.
계절이 먼저 불길한 징조를 띄웠다. 2월 중순에 영동 지방에서는 백 년만의 폭설로 사람 키가 눈에 파묻혔고, 매화꽃이 피는 3월의 며칠 동안은 난데없는 초여름 날씨가 전국을 후끈 달궈놓았다. 그 때문인지 4월 중순에 피던 여의도의 벚꽃이 3월 말에 진해와 여의도에서 동시에 화르르 폈다가 무슨 각오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화르르 떨어졌다. 사람들 사이에 불길한 시선이 오갔으나 금방 잊었다.
그해 4월 16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제주도를 향해 가던 여객선 하나가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에서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세월호’란 이름의 그 여객선에는 승객 414명과 선원 62명을 포함하여 모두 476명이 타고 있었다. 승객 중 325명은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이었고, 나머지는 교사 14명, 여행 인솔자 1명, 그리고 일반 승객이 74명이었다.
해경의 구조함이 사고 현장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구조함 위로 뛰어오른 사람은 선장이었다. 선장과 함께 기관부 선원 일곱 명이 승객을 버리고 탈출하였고, 조타실 선원들도 뒤이어 도착한 구조함에 올라탔다. 어떤 선원은 배로 돌아가 잊고 나온 휴대폰을 챙겨 나오는 여유까지 보였다. 탑승객들에게는 선내 방송을 통해 각자의 선실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한 뒤였다.
선장이 팽목항에 도착하여 젖은 돈을 햇볕에 널어 말릴 때에도 여객선에 남은 승객들은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을 믿고 기다렸다.
해경의 구조선과 병풍도의 어선들과 헬기까지 동원하여 구조 작업을 벌였으나 구조는 난조를 보였고, 배는 천천히 기울었다. 배는 선수 부분을 물 밖에 내놓고 3일 동안을 버티다가 4월 18일 오전 11시 58분에 맹골수도의 물결 아래로 가라앉았다. 선미가 완전히 물속으로 빠지자, 그 자리에는 잠깐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이내 파도가 배 빠진 자리를 지워버렸다.
보이던 배가 보이지 않자 팽목항에서 TV 화면을 지켜보던 학부모와 가족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고, 주먹으로 돌바닥을 쳐서 피를 뚝뚝 흘렸다. 급기야는 여러 사람이 실신했다.
구조된 승객은 476명 중에서 172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304명은 일찌감치 폈다가 화르르 져버린 벚꽃처럼 배와 함께 맹골수도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중 250명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선체가 파도 속으로 사라진 후, 선박 내부의 어느 공간에서 공기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를 생존자를 구조하기 위해, 또는 이미 숨진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잠수부를 동원하여 선박 내부로 들어가야 했지만,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맹골수도는 이름 그대로 물살이 사납기로 악명이 높았다. 조류는 빠르고, 물속 가시거리는 20cm도 채 되지 않아 물속의 잠수부들은 자신의 손등마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 궂은 날씨 탓에 파도까지 높아서 구조 작업은 시작부터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
구조대원이 선체에 진입하려면, 먼저 수면에서 선체까지 밧줄로 유도선을 연결해야 하고, 유도선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빠른 조류에 휘말려 꼬이는 유도선을 풀어가며 손끝으로 더듬어서 선실, 화물칸 입구, 조타실 등을 찾아가야 했다. 진입 지점에 도달하면 유도선을 결박해 진입로를 확보하고, 그곳을 기점으로 자기 몸에 생명줄을 연결한 뒤에야 선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잠수 장비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산소통을 짊어지고 들어가는 스쿠버다이빙이며 다른 하나는 다이빙 헬멧에 공기호스를 연결해 외부에서 산소를 공급받는 머구리 방식이었다. 스쿠버다이빙은 잠수 시간이 최대 30분인데 비해 머구리 방식은 서해의 머구리들이 40미터 해저를 걸어 다니며 키조개를 채취할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한 번 들어가면 세 시간가량을 견뎌냈다.
머구리 방식은 좁고 복잡한 선체 내부에서 공기호스가 꼬이거나 절단될 위험 때문에 처음 며칠 동안은 스쿠버다이빙만 허용되었다. 이에 유가족들은 분노했고, 결국 머구리 방식을 받아들이고서야 사고 발생 후 6일 만에 구조대원이 선체 내부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선체 내부 진입에 성공하여도, 캄캄하고 복잡한 선박 속을 수색하는 일은 매우 난도가 높은 작업인 데다, 선체 내에서 자칫 길을 잃고 미아가 될 위험마저 따라다녔다. 구조대원들은 플래시로 침침한 시야를 확보한 뒤 선체 내부 구석구석을 더듬어 수색했다. 날이 갈수록 누적된 피로는 깊어져 갔고, 충분한 휴식을 갖지 못한 채 장시간 차가운 바닷물에 노출되어 생기는 위험마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급기야는 구조대원 중에서도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승객 예약 기록과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승객이 남아있는 객실을 파악하여 수색하였는데. 그중에는 선체가 무너져 내려 구조대원의 진입이 불가능한 곳도 있었다. 선체가 무너진 곳은 5층 선수의 승무원 객실 통로와 중앙 특실 통로, 4층의 선수 좌현 8인실 통로와 선미 30인실 통로 등 네 곳이었다.
이 네 곳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선체 외판을 절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가족들이 시체의 유실을 우려하여 반대했으나 정부가 선체 부근과 외곽에 세 겹으로 유실 방지를 위한 에어백과 그물 및 안강망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하여 승낙을 얻어냈다.
2층 화물칸은 적재된 차량과 화물 때문에 수색이 아예 불가능했지만 누구도 별다른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사고 발생 후 3개월이 지난 2014년 7월 14에는 사고 해역에서 실종자 수색 작업을 마치고 복귀하던 강원도 특수구조단 소속 헬기가 산으로 추락하여 탑승자 다섯이 모두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실종자 수색 작업은 정부가 수색 작업 종료를 결정한 2014년 11월 11일까지 209일간 지속되었다.
생존자 구조 작업이 한창이던 초기에 동지는 팽목항을 찾았다. 항구는 절망하는 가족들, 기자들,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구조 작업 중에 교대하여 잠시 쉬는 사람들로 분주한 움직임과 무거운 침묵이 뒤엉켜 있었다.
팽목항 방파제 뒤에는 맹골수도에서 구조 작업을 하다 돌아온 구조 요원들이 모여 앉아 쉬고 있었다. 동지는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다가가 부탁했다.
“선체 수색 작업에 동참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머구리 했어요? 그렇게 안 뵈는데.”
“아니, 그런 거 한 적은 없습니다만.”
“장비는 뭐요?”
“장비는 뭐라도 여기서 사용하는 걸 주시면 제가 해보겠습니다.”
“일한 적도 없고, 장비도 없다?”
“····”
“에이 씨팔! 이러는 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까지 와서 이러면, 씨팔!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는 세상 더러운 꼴을 다 본 얼굴로 두리번거리다가, 근처에 경찰이 보이자 쫓아가서 무슨 말인가를 했다.
경찰이 동지에게로 다가왔다.
“가세요! 여기 이분들 정말 목숨 걸고 하시는 분들입니다. 지금은 쉬어야 한다구요. 한가한 분들이 아니에요.”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TV로 이곳 사정을 지켜보다가 제가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어서 온 겁니다. 저는 물속에서 10분 정도는 숨을 참을 수도 있고, 그 밖에도 남들이 견디기 어려운 극한 상황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시험 삼아 동참시켜 주면 안 될까요?”
경찰은 한심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높은 파도가 울렁대는 바다를 가리켰다.
“저 바닷속에 깊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저건 풀장도 아니고 거실에서 보는 TV 화면도 아니잖아요. 저런 일에는 따로 전문가가 있는 겁니다. 꼭 하고 싶다면 저기 가족분들이 텐트 생활을 하고 계시니까, 저기 가셔서 자원봉사를 하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원봉사에 동참하리라 기대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방파제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어떤 사람은 뭔가 맡은 일을 하느라 의도 있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대부분은 맹골수도 방향을 망연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맹골수도는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작은 섬들 뒤쪽 먼바다 어딘가에 맹골수도가 있다고 했다. 텐트 곁에 설치해 놓은 대형 스크린에 비친 맹골수도에는 거친 파도 사이에 바지선과 작은 배들이 어른거렸다. 잠수 장비를 머리에 쓴 사람과 맨얼굴인 사람이 섞여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팽목항에서 보기에 느리고 한가했다.
노인 한 사람이 방파제 앞에서 맹골수도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헌팅캡에 쥐색 점퍼를 입은 노인은 마른 체격에 자세가 반듯했다. 여객선 침몰 사고를 소재로 글이라도 쓰기 위해 타지에서 왔다면 어울릴 것 같은 차림새였다.
동지는 노인 곁에서 맹골수도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노인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비틀거리다가 그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그는 쪼그려 앉으려는 듯 보였으나, 마음 같지 않았던지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동지는 얼른 노인을 부축해 안고 팽목항에 나와 있는 이동 구급대로 달려갔다.
한 시간쯤 후, 정신을 차린 노인과 동지는 구급대 뒤편의 통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보아하니 여기 분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혹 자원봉사를 하시는지요?”
노인은 깍듯한 존댓말을 썼다.
“아닙니다. 원래는 실종자 수색에 참여하려고 왔습니다만, 비전문가란 이유로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아, 왜 그랬을까요. 멀리서 돕겠다고 찾아온 분을.”
노인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무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체 수색을 방해하는 장애들을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직접 와서 보니 현장은 멀리서 본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오래 머무르지는 못할 사정이 있어서 허락받았더라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노인이 다시 물었다.
“서울에서 오셨나 봐요?”
“인사동에 기거하고 있습니다.”
“아, 인사동, 연 전에 그쪽 탑골공원에 간 적이 있었는데. 옛날과는 참 많이 변했더군요.”
“····”
“원래 그곳은 탑동공원, 탑골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렸었는데, 아시겠지만, 그 이유는 국보 2호인 원각사지십층석탑이 거기 있기 때문이지요. 중종과 연산군 시대를 거치며 절은 없어지고 지금은 탑과 탑비만 남았지만.”
노인은 숨이 찬 듯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한 게 1902년이었지요. 그해 영국인에게 설계를 의뢰해서 공원이 조성됐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었답니다. 당시엔 주로 이왕직 군악대가 연주 연습을 하는 장소로 쓰였고, 일요일에만 일반인에게 개방됐다고 하더군요. 본격적으로 시민에게 개방한 건 일제강점기에 와서였답니다. 합방 후에는 유리 온실이 새로 생기고, 다리가 놓인 일본식 연못도 만들어졌지요. 공중변소며 전등, 수도 시설도 갖췄고요. 여름밤이면 경성 시민들이 더위를 식히러 나오는 산책 명소가 됐다고 합니다.”
“아, 네····”
동지는 잠자코 노인의 말을 들었다.
“해방 이후 공원 주변에 판자촌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근처에 ‘종삼’이라 불렸던 사창가가 형성되었어요. 그 후 군사정권 시절에, 별명이 ‘불도저’였던 당시 서울 시장이 공원 주변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공원 둘레에 이층 아케이드를 건축하였고, 그와 함께 일본식 철제 정문을 헐고 지금의 맞배지붕으로 바꾸었어요. 그 후로는 공원을 유료화하였는데, 그러면서 룸펜이나 노인들이 접근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아, 네.”
“공원의 운명은 한 번 더 바뀌어요. 83년에 공원 주변의 아케이드를 철거하여 시야를 확 텄어요. 그리고 88년 서울올림픽을 기해 무료 공원으로 전환하고, 이름도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바꿨지요. 그 무렵부터 노인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답니다. 원래는 종묘공원이 더 큰 노인 집결지였는데, 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출입이 까다로워졌나 봐요. 그래서 풍선효과로 노인들이 탑골공원에 몰려든 거지요. 그때 이후 지금의 ‘노인 공원’ 이미지가 자리 잡았다는군요.”
“탑골공원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시는데… 혹시 문화재 관련 일을 하셨습니까?”
딱히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아, 예만 반복하기가 민망해서였다.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사실은 젊은 시절에 봤던 공원이랑 너무 달라서, 최근에 벼락공부를 좀 했습니다.”
“혹 외국에 오래 계셨습니까?”
“이십 대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살았어요. 가끔 볼 일이 생길 때면 귀국하였고.”
“그럼, 이번에는···?”
“이번에 들어온 이유는 이 나이에 돈 되는 일은 아니고, 어쩌면 여객선 침몰 사고와도 연관이 있긴 하지만···”
노인은 더는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몇 차례 끄덕이며 말을 아꼈다.
이야기를 마친 노인은,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까’ 하며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내밀었다. 명함에는 ‘이석홍’이라는 한글 이름과 그 옆에 일본 글자로 쓴 이름이 보였고, 이름 외에는 전화번호와 일본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해 10월에 발표된 검경합동수사본부의 세월호 사고 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세월호의 침몰 원인은 화물 과적, 무리한 선체 증축, 평형수 부족, 고박 불량 등이었다.
그러나 합동 수사본부의 보고가 있기 전부터 이미 수많은 억측과 괴담이 전국을 휩쓸었고, 수사본부의 발표와 무관하게 유가족 중 일부와 그들의 이름을 빙자한 투쟁 전문가들은 시청 앞과 대한문 광장에 텐트를 치고 대정부 투쟁을 벌이기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맨 처음 등장한 괴담은 미군 잠수함과의 충돌설이었다. 어느 명문대 교수가 TV에 나와서 마치 자신이 천재인 걸 자랑하고 싶은듯 미군 잠수함과의 충돌일 수밖에 없는 논거를 조목조목 제시하였는데, 그 주장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대신 우리 해군 잠수함과의 충돌설이 등장했다. 우리 해군 잠수함이 무사고 세계 신기록을 세우기 위해 충돌 사실을 숨겼다는 주장이었다. 어느 TV 방송은 이 소설 같은 잠수함 충돌설을 한 시간 특집으로 내보냈다.
어느 개인 방송인은 여자 대통령의 정부가 세월호를 일부러 침몰시킨 뒤 항적 데이터를 조작했다는 ‘고의 침몰설’을 퍼뜨리고는 그 주장을 담은 영화를 제작하여 돈을 벌었다.
‘항적은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통해 다른 나라의 배와 기지국에서도 같은 데이터를 공유하기 때문에 항적을 조작하려면 전 세계 기지국의 데이터를 모두 조작해야 하므로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이 SNS상에 나돌기도 했으나 괴담은 괴담대로 여전히 왕성한 보폭을 줄이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 언론은 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일부러 희생시킬 이유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극히 상식적인 질문마저 외면한 채 누군가가 코미디 프로에나 나올 법한 말이라도 한마디 던져놓으면 그것을 여과 없이 보도하기에만 바빴고, 합동조사단은 헛바퀴 돌 듯 재조사에 착수했다.
조사는 총 아홉 차례 반복되었지만, 처음 조사 보고와 다른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 후 인양된 선체에서도 충돌 흔적은 발견되지 않아서 괴담은 모두 거짓임이 밝혀졌다.
괴담을 만들어 유포한 자들은, 대다수 국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입을 닫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그들은 또 다른 괴담을 준비 중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