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유령

(17회) 제2장 고독한 여정 - 지선의 시간

by 해암

지선의 시간







동지가 팽목항을 다녀오던 날 저녁에 지선은 현규를 만났다. 두 사람은 교외로 나가 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먹고, 서울 동쪽 강변의 작은 호텔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둘은 함께 샤워하고 침대로 들어가 서로를 숨죽여 쓰다듬고 길게 안았다.


호텔을 나온 두 사람은 강변의 조용한 찻집의 이층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 창밖에는 강변을 따라 늘어선 키 큰 나무들이 불빛을 머금은 강물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불빛에 반짝이며 떨어져 내렸다.

지선은 먼 강물에 시선을 보낸 채 조금 전 그와 나누었던 사랑의 여운을 더듬었다.


현규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한 달 조금 넘었지?”


지선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우리 잔 거.” 현규는 씩 웃었다.


“그걸 다 계산하시네?”


“유월부터 무슨 이유로 시간 내기가 그리도 어려워졌을까? 월, 화, 수 삼 일은 자유로웠는데, 이젠 그마저도 아니잖아?”


“미안해, 노력할게!”


“문제없는 거지, 우리 사이?”


“네 아무 문제 없습니다요!”

지선은 망설임 없이 웃음을 물고 대답했다.


현규는 언제부터인가 지선에게서 전과는 무언가 다른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 차이는 너무나 미묘해서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 속에 떠도는 냄새 같은 것이기도 했다.

만나는 요일을 월, 화, 수 삼 일로 제한할 때까지는,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주 만나는 편이었고 잠자리에서는 아무런 그늘도 없이 서로를 완벽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만나는 횟수가 현격히 줄어 들었던 6월 어느 때부턴가 잠자리에서도 전과 다른 무엇이 느껴졌다.


현규가 운전하는 옆자리에 앉아 지선은 강변 찻집에서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아무 문제도 없는 거지, 우리 사이?’라고 물었을 때 지선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거짓이 아니었기에 가책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뭔가 허전하다고 말했을 때는 대답을 망설였다.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찔림이 있었다.


아들의 스승이자 그녀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 동지가 주말의 이박삼일 간 함께 기거하고부터는 현규와 만나는 날을 월, 화, 수 중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현규에게도 소홀하지 않으려 애썼다. 매주 한 번은 잠자리를 가지려 노력했고, 그 시간만은 그와 완벽히 하나가 되는 데 집중했다.

재희가 불행한 사고를 당하고, 동지가 서울에 상주한 6월부터 지선은 시간 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현규는 소중한 사람이었기에 만나는 날이면 전보다 더욱 정성 들여 그를 안으려 노력했다. 그런 차이가 그에게는 다르게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변북로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지선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지난 1년여 동안의 자신을 냉정히 되돌아보았다.


‘음성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날 느닷없이 전신을 휘감았던 전율은 그 한순간만으로 잠재워졌던가? 그날 난 흔들리는 나를 가차 없이 꾸짖고 달랬었다. 그의 곁에는 아름답고 현명하기까지 한 재희란 여자가 있었고, 거기다가 난 아이 딸린 미혼모가 아닌가. 그리고 내게는 현규 씨가 곁에 있었다.

되돌아보면 그날 창끝처럼 찔러왔던 전율의 순간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 번 흔들린 마음은 나도 모르게 무시로 나를 혼돈의 미로 속으로 유인했다. 생각해 보면 격랑과도 같았던 전율의 파고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내 온몸을 훑고 지나갔음을 나는 안다. 다만 애써 외면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재희가 곁에 없는 그가 못내 아프기까지 하다.

미국에서의 온몸을 던져 불살랐던 연애는 애당초 피할 수 없었던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며 기억에서 지우는 연습을 해왔었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핀트가 한참 어긋나버린 미국에서의 그 일은 홀로 광야에 선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친 바람이었고, 소나기 속에서 내려꽂히는 벼락같은 것이었다. 난 비바람을 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비루한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아이가 생겼을 때, 그는 낙태를 요구했다. 결국 그가 원했던 건 타국에서 외로움을 달래 줄 여자였다. 그가 그리는 그림 속에 나와 아이는 없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난 아이를 지우는 대신 그를 지우고 돌아와 동해를 낳았다.’


지선은 언제부턴가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그들’이라 칭했다. 그 호칭은 그들이 지닌 공통된 특성에 대한 냉정한 평가로서, 존경도 적의도 내포되지 않았으나, 굳이 말하자면 부정 쪽에 가까웠다.

그녀는 그들을 향한 갈구를 쉽게 떨쳐내지 못하면서도, 그들이 보내는 미소를 다 믿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경험한 연애의 뒤끝은 무덤 속에서 꺼낸 천 조각만큼이나 허물어진 육신과 마음뿐이었다. 그런 연애 뒤에 유기질이라고는 남지 않은 거친 땅에서 놀랍게도 새싹이 돋아났다. 현규, 그를 만난 지도 3년이 흘렀다.


그녀가 혼자 동해를 낳아 키우는 동안은 스스로 정신과 육신 모두를 폐쇄된 공간에 유폐한 채 살았다. 희망과 긍정 편에서 삶을 바라보았던 기억은 까마득한 옛일로서 돌아갈 수 없는 동화 속의 섬 같은 것이었다. 그랬는데, 현규를 만났고, 그를 만난 뒤로 그녀는 다시 희망을 떠올렸다. 그것은 마치 지하철이 지상으로 빠져나올 때 덮어쓰듯이 만나는 밝음과도 같았다.

그는 옷 입는 법을 잘 아는 남자여서 대강 걸쳐도 멋스러움이 뿜어 나왔다. 그리고 지선을 향한 그의 시선은 오랫동안 변함없이 따뜻하다. ‘그의 사랑은 얼마나 진실일까?’ 의구심이 들 때면 그녀는 그 의문을 일단 보류 서랍 속에 넣어두기로 한다. 그러는 편이 편리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들에 대한 내면의 깊은 천착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선 지도 몰랐다.


그녀는 현규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여놓고도 동해의 스승을 생각하는 자신이 불편하고 혼란스럽다. 그래선지 동지를 대할 때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신을 억제하는 힘이 작동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를 마주할 때마다, 내면 어딘가에서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어떤 생명체 하나가 자라고 있었다. 처음엔 그녀가 그것의 고삐를 잡았지만, 점차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로 자라서 마침내 그것이 그녀를 끌고 다니려 한다.


그녀는 아직 사랑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몸과 마음을 가리지 않고 아프고도 안타까운 무언가가, 뭉그적거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안다. 재희가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로 누워있고부터 그것은 좀 더 구체적인 모습을 띠며 다가오고 있다. 그 점이 그녀는 더욱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리고 무섭기도 하다.




2년 전, 2006년 3월 1일 오후 3시경,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승강장에서 한 젊은 여자가 유치원에 다닐만한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열차를 기다렸다. 오후의 어중간한 때여서 승강장은 한산했다. 스피커에서 열차가 곧 도착한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아이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신기한 듯 자꾸만 엄마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그때 여자의 어깨에 멘 가방에서 휴대폰의 신호음이 울렸다. 여자가 휴대폰을 꺼내기 위해 아이의 손을 놓자, 아이는 바로 공처럼 튀어 나갔다. 그리고 “악!”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여자는 아이가 떨어진 철길로 뛰어내리려다가 멈칫했다.

그때 한 청년이 여자의 팔을 잡아 바닥에 끌어앉히고는 승강장 아래로 뛰어내렸다.

청년은 순식간에 아이를 한쪽 팔에 안고 승강장 위로 훌쩍 올라섰다. 청년이 승강장에서 뛰어내리고부터 아이를 안고 승강장 위로 올라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삼사 초쯤이었다.

청년은 아이의 몸을 여기저기 만져서 확인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와락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고 멍한 채 승강장 바닥에 주저앉았던 아이도 왕하고 울기 시작했다.

청년은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동행한 여성과 함께 곧이어 도착한 열차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주변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조차도 그 정황을 제대로 알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어떻게 그분이 승강장 위로 올라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람이 꼭 나르는 것 같았거든요. 그분이 올라오자마자 바로 열차가 들어왔구요.”

아이 엄마가 리포터를 향해 말했다.


“아, 그러니까 그 남자분께서 아이를 승강장 위에 올려놓은 뒤에 승강장 바닥을 짚고 올라오셨군요.”


리포터는 그때의 상황을 보충 설명한 뒤 다시 물었다.

“아이를 구해준 분이 누구인지는 확인하지 못하셨나요?”


“네, 그분은 곧바로 도착한 열차를 타고 가셨나 봐요. 저는 그분에게 말을 붙일만한 정신이 없었구요.”


“그렇군요. 아들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못 하셔서 무척 안타까우실 텐데 그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지금 해주시죠.”


“네, 이건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 돼요. 꼭 제게 감사 인사를 드릴 기회를 주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간절히 호소하는 젊은 여자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 뒤 카메라는 리포터에게로 옮겨갔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아이를 승강장 위에 올려놓고 자신도 뛰어 올라왔다면 아마도 고도로 훈련된 기계체조 선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차가 들어오기 직전 일촉즉발의 순간에 아이를 구한 뒤 말없이 떠나버린 의인이 누구인지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아이의 어머니는 아들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리포터는 흥분된 목소리로 그날의 상황을 전했다.


며칠 후, 은색 제네시스 승용차 하나가 중부고속도로의 음성 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운전석에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래위 짙은 감색 투피스에 화이트 핑크 블라우스를 받쳐입고 체크무늬가 들어간 은회색 머플러를 목에 두른, 격식을 갖춘 차림새였다.

조수석에는 운전하는 여인에 비해 조금 어려 보이는 미모의 여성이 앉았고, 뒷좌석에는 유치원에 다닐만한 사내아이가 얌전히 안전띠를 두르고 앉아 있었다.

제네시스는 청주와 충주를 연결하는 36번 도로에서 충주 쪽으로 대략 십분가량 달린 뒤 왼쪽의 들길로 꺾어 들어 야트막한 산기슭의 농장으로 진입했다. 생명의 은인을 찾는 아이 엄마의 간절한 마음을 외면하지 못한 재희가, 동지의 허락을 구한 뒤에, 지선을 음성의 농장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


“선생님!”

선생님이라는 첫 한마디를 말하기 전에 지선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선생님! 제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겠습니까?”


지선은 아들 동해와 나란히 서서 동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절을 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은혜를 갚아야 한다. 은혜를 갚기까지 나의 시선은 저분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동지는 아이를 보자마자 아이의 눈에서 뿜어 나오는 총기가 흔치 않은 기재이며 기혈의 흐름이 특별히 순함을 알아보았다. 동지가 아이를 제자로 삼아 가르쳐보고 싶다고 하자 지선은 그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후 1년쯤 지선은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음성을 오가는 수고를 감내했다. 동해는 스승의 가르침을 놀랍도록 묵묵히 학습해 나갔다. 스승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기를 각오한 아이 같았다. 아이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스승을 향한 어머니의 절대적이라 할 만큼 수용적인 태도가 크게 작용했을 테지만, 그러기 전에 이미 아이의 내면에는 스승을 향한 특별한 신념이 싹터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지하철 승강장에서 있었던 일은 아이에게 생애를 통해 지울 수 없는 사건이었을 테고, 아이는 그 사건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만큼 총명했다.


음성을 오가던 일 년 동안 지선은 인사동 집의 안채를 새로 지었다. 서예학원인 바깥채와 지선 모자가 거주하는 안채는 모두 네 칸짜리 단층 목조 기와집이었는데, 그 중 안채를 헐어내고 그 자리에 현대식 이층집을 새로 올린 것이다.

새집의 이층에 수련실과 스승의 침실을 마련하고, 그 사이의 좁은 공간에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냈다. 옥상은 화단과 수목 화분을 들여 정원을 꾸미고, 정원 가운데에는 몇 사람이 앉아 쉴만한 아담한 움막 쉼터를 만들었다.


건물이 완공되자 동지는 서울과 음성을 오가며 어린 제자를 가르쳤다. 그 두 달쯤 후에 유현서와 조용학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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