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유령

(18회) 제2장 고독한 여정 - 기억 채광

by 해암

기억 채광







동지는 팽목항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식을 깊은 바닷물 속에 둔 부모들의 타들어 가는 눈빛이 불쑥불쑥 마음을 들쑤셔 댔다. 그래선지 그해 여름이 지날 때까지 소식이 없다가 늦은 가을에야 시간여행의 기회를 만났다.

지난 네 번의 시간여행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그대로 재연되었다. 옛 의정부터 코너를 돌아서자 넓은 광장 여기저기에 어지러이 흩어진 시위의 잔재들도 그대로였고, 자하문 쪽에서는 들리는 귀에 익은 함성과 확성기 소리 역시 똑같았다. 역사박물관 앞 벤치에서 20분 넘게 지체할 때는 이미 아는 일이라 조용히 서서 기다렸다.


재희가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창수가 보였다. 그는 재희가 일어나 걸어가자, 어디선가 나타나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동지는 비로소 그가 재희의 뒤를 의도적으로 따라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묵서예로부터 재희를 따라온 걸까, 아니면 길에서 우연히 그녀를 본 걸까 궁금했지만, 그때까지 창수에게 특별한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여자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다면 누구나 앞서기보다는 뒤따라가고 싶을 것이었다. 더구나 창수는 평소에도 재희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봤었다.


미국대사관 앞에서 세종로를 가로질러 세종대왕 동상을 향해 가던 재희는 동상을 올려다보며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동상의 바로 등 뒤로 다가섰다.

동지는 재희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은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으므로, 숨을 죽이거나 행동을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돌아보니 창수는 미국대사관 앞을 조금 지나, 작은 가로수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서 있었다.


재희는 동상 아래의 지하 계단으로 한발 내려섰다. 도대체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가지 않고 왜 여길 내려가는 걸까, 동지는 마음이 급했다. 재희가 동상 뒷계단을 몇 걸음 내려갈 때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계단 아래에서 두런두런 인기척이 들렸다.


그때 그 징조가 나타났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이런!··· 안돼!’ 순간 동지는 두 손으로 동상의 기단 모서리를 힘껏 움켜잡았다.


모든 존재가 사라진 후의 찰나의 무··· 그와 동시에 수련실에서 반가부좌로 앉은 동지는 짧은 경련을 일으키며 천천히 눈을 떴다.


동지는 옥상 쉼터롤 올라가 재희가 사고를 당했던 그날 밤의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그날 밤 11시 30분쯤 난 사고 현장 가까이에 있었다. 침대를 박차고 나와 광화문광장으로 달려갈 때까지의 정황은 여전히 기억에 없지만, 그 시간에 분명히 세종대왕 동상 뒤에 서 있었고, 그곳에서 정신을 차린 뒤 어리둥절하여 잠깐 두리번거리다가 곧바로 인사동으로 돌아왔다. 북인사마당에서 지선을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11시 50분이었다. 세종대왕 동상에서 대략 10분 거리니까 11시 40분쯤 그 혼돈의 장소에서 출발한 셈이 된다.

종로경찰서 119에 사고가 접수된 시간은 11시 50분이라 했다. 내가 인사동길에 도착한 시간과 같다. 그렇다면 재희가 사고를 당한 시간은 내가 세종대왕 동상 뒤에서 인사동길로 돌아오기까지의 약 10분 사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광화문광장에서 돌아오기 전에 조금만 더 그곳에서 지체했더라면···'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는 데는, 그것이 먼 우주에서 날아온 별똥별에 맞는 경우가 아닌 한, 사건의 원인이 촉발하여 그것이 사건으로 이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제보자가 사건 현장을 발견한 뒤 신고하기까지의 소요 시간을 계산에 넣는다면, 그날 재희의 사건은 1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원인이 구성되고, 곧바로 사건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건의 원인이 발생한 장소는 사건 현장인 세종문화회관 옆 화단이 아니라 근처의 다른 장소여야 하고, 동지가 떠난 후에 재희와 재희를 해친 범인이 사건 현장으로 이동한 것이어야 했다.




[요양병원]


“안녕하세요!” 병실을 들어서며 동지는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방금 돌아 눕혔어요. 얼굴은 참 편하세요.”

간병인 아주머니가 환히 웃었다. 오십 대로 보이는 그녀는 늘 동지를 따뜻이 반겼다.


“네, 고맙습니다.”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대답하고 동지는 재희의 침대 곁에 다가앉았다.

‘재희야, 이번에도 너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말았어.’


(또 그 꿈 얘긴가요. 오빤 왜 매번 똑같은 꿈을 꿀까? 오빠의 꿈속에서 난 아직도 오빠를 못 보나요? 가엾어라. 왜 우린 자꾸 엇갈리는 걸까? 오빠의 꿈속에서는 내가 오빠를 모르고, 여기에 병원에서는 오빠가 나를 모르고···)


‘근데, 넌 왜 동상의 뒷계단을 내려가려는 거니. 거긴 아주 기분 나쁘게 음침해 보였어.’


(모르겠어요. 내겐 아무런 기억도 없어요. 그냥 발길이 가는 대로 걸어갔나 봐요.)


‘생각해 봤는데, 그 터널이 문제의 발단인 것 같아. 터널이 마음에 걸려.’


(터널? 내가 터널에 들어갔어요? ···아, 이제 생각나! 그날 난 동상 뒷계단을 따라 지하 터널로 들어갔었어. 참 이상해. 아무 기억이 없다가 오빠가 말해주니까 그제야 생각이 나. 근데 오빠는 그 모든 걸 꿈속에서 보나 봐. 오빠는 그날 나의 행적을 꿈속에서 추적하고 있어. 오빠는 그런 능력도 가진 건가? 그리고 오빠가 나의 묻혀버린 기억을 추적하여 알려주면 나의 기억도 그만큼씩 되살아나고 있어. 이게 뭘까? 마치 광부가 채광하듯이 오빠는 나의 단절된 기억을 파고 들어가는 거야. 오빠의 행위와 나의 의식 사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연결된 것 같아. 아, 모르겠다. 아무튼 오빠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인 건 분명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 눈으로 꼭 그날의 현장을 확인하고 말겠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오늘도 또 이렇게 넘어가려나 보다. 오빠는 오래전에 이성학 박사에 대해 궁금증을 내비친 뒤로 다시는 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빠는 이 박사를 마음에 떠올리는 걸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기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다. 남자들이란 참 이상하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채 묻어버려도 괜찮은 걸까? 나 같으면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할 텐데.)


동지는 한 손은 재희의 이마 위에, 한 손은 단전에 얹었다.

재희는 손님용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동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을 때 꼭 두 다리를 올려 양반다리를 했다.


(어느덧 7년째다. 오빠는 7년 동안 저러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린 서로를 잘 안다고 믿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오빠도 날 속속들이 몰랐고, 나도 오빠를 다 알지는 못했어. ···그나저나, 내가 오빠를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어. 이젠 놓아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 그래야 할 것 같아!)


동지가 기치료를 끝내고 심호흡을 몰아쉴 때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희경이 문을 열었다. 희경의 등 뒤에서 회색 가사 아래 하얀 운동화를 신은 여승 한 분이 그림자처럼 따라 들어왔다.

스님은 다른 어떤 것에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오직 침대에 누운 재희와 그 곁에 앉은 동지만을 바라보았다. 곁에서 보는 스님의 눈길에는 마음의 작용이라 할만한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시선은 그저 고요하고 맑기만 했다.


동지는 희경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뒤, 스님을 바라보았다.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났다. 초등학교 육 학년 때 조락헌을 찾았던 세 여인 중 한 분이었다. 셋 중 한 분은 희경 아주머니, 또 다른 한 분은 지금 파리에 계시는 영숙 아주머니다. 영숙 아주머니는 어머니와 가끔 국제전화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한두 해마다 귀국하여 조락헌에 들린다. 나머지 한 분이 스님인데, 스님만 그 후로 처음이었다.

마음속으로 세월을 헤아려 보니 24년이 흘렀다. 스님은 예순을 넘긴 세수임에도 처음 보았던 때와 구분이 안 될 만큼 고우셨다. 눈에 띄게 균형 잡힌 체형이나, 단아한 이목구비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무엇보다 피부가 맑은 물속처럼 투명했다.


“스님, 안녕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동지가 의자에서 일어나 스님에게 인사했다.


스님은 동지를 향해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초등학교 육 학년 때 봤는데 그동안 어른이 되셨군요.”


“어느새 마흔이야.” 희경이 말했다.


“재희는 서른여덟이랬지?”


“응, 서른여덟.”


“오래 누워있는 사람치고는 얼굴색은 괜찮은데, 많이 여위었구나.”

스님은 재희의 손을 당신의 두 손으로 감싸 잡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 언젠가 엄마가 말해줬던 그분이구나! 대학 동창이시고, 엄마의 영원한 ‘소울메이트’)


“앉자!”

희경이 의자를 스님 곁에 끌어다 놓고 자신은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스님이 앉으려 하자 재희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미여 스님께서는 서울에서 할 일이 있어서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하셨어. 어제 암자에서 내려오셨고.”


“아, 네. 그러셨군요.”


“동지님은 참 멋진 어른이 되셨어요. 보기에도 늠름하시고, 느낌도 좋으시고···”

스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져 나왔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에 스님께서 제게 주셨던 조약돌은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생각난 듯 동지가 말했다.


“아, 그걸 여태 간직하고 계셨군요?”


“네, 내내 책상 서랍에 보관했었는데, 군에 입대하면서 혹시 없어질까 봐 목련당 화단의 돌절구 곁에 묻어두었습니다. 전역 후에 파서 보니 잘 있기에 꺼내놓으려다가, 그대로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지금은 화단의 흙 속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무슨 돌에 얽힌 사연을 풀어놓으시네, 두 분이?”

희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님은 희경의 물음에는 일고의 반응도 없이 다시 재희에게로 시선을 보냈고, 동지가 입을 열었다.

“그날, 세 분께서 음성에 오셨을 때, 저는 인사를 드린 뒤에 마당으로 나와 세분이 타고 오신 차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세 분이 떠나실 때, 스님께서 저를 보시고는 바랑에서 까맣고 반질반질한 조약돌 하나를 꺼내 제게 주셨습니다. 선물이라고 하시며. 저는 그 돌이 예쁘기도 하고 또 스님이 주신 선물이라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동지가 돌에 얽힌 사연을 얘기하는 동안 희경은 깊은 생각에 젖은 얼굴로 들었고, 동지의 말이 끝나자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미여 스님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담담히 재희만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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