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유령

(15회) 제2장 고독한 여정 - 시간여행

by 해암

시간여행







재희는 두 번째 시간여행이 끝났던 건널목을 무사히 통과하여 주한 요르단대사관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걸어오는 익숙한 얼굴이 동지의 눈에 들어왔다. 창수였다. 그는 약 50미터쯤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창수! 네가 거기 있었구나. 어서 와, 재희를 붙잡아! 광화문 쪽으로 못 가게 해!”

동지는 고함을 질렀다.


창수는 걷는 걸음 그대로 따라올 뿐이었고, 그를 본 직후에 바로 그 현상이 일어났다. 모든 존재가 잠시 묘한 곡선을 그리면서 시공간의 격자가 허물어지고, 형체 있는 것들은 모두 자잘하게 부서져 암흑의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극히 짧은 순간 동안 무(無)의 공간이 나타났다가 그마저도 사라졌다.


동지는 눈을 번쩍 떴다. 몸은 서늘한 한기를 느끼는데,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서야, 수련실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세 번째 시간여행에서도 동지가 한 거라고는 재희를 향해 ‘안 돼! 그쪽으로 가지 마! 안국역은 오른쪽이잖아!’라고 외치거나, 그녀가 광화문 쪽으로 가지 못하게 막기 위해 두 팔로 허공을 허우적댄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창수를 발견한 건 수확이었다. 동지는 그가 반가웠다.


2012년은 동지에게 특별한 해였다. 시간여행을 통해 세 번이나 두 발로 걷는 재희를 보았다. 세 번째 시간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동지는 그것이 재희가 자기에게 보낸 SOS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승 강변의 벼랑 끝에 선 그녀가 육신에 남은 마지막 염력을 끌어올려 비둘기 발목에 쪽지 하나를 매달았다는 가정이었다.


그해 12월 19일에는 나라에도 처음으로 여성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시간여행이라는 비현실적인 사건 속에 깊이 매몰되었던 동지에게 여자 대통령의 탄생은 한낱 뉴스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투표장에 가지 않았다.


여성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1년 전, 2011년 12월 17일에 북쪽의 최고 권력자가 기차를 타고 가던 중에 죽었다. 22년간 북한을 통치한 그는 자신이 아끼던 일본인 무희 출신 첩의 아들이자, 자신의 셋째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권력을 물려받은 아들은 고작 스물일곱살이어서 바깥세상 사람들은 그 어린 청년이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을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지켜보았다.

이듬해 봄, 김일성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러시아 학자가 한국을 방문해 ‘현재 북한은 어린 권력자 대신 그의 고모가 수렴청정 중이다.’라고 했다.

만약 그 학자의 말이 맞다면, 한반도는 공교롭게도 남북이 모두 여자가 최고 권력자인 나라가 된 셈이었다.






이듬해 2013년 초에 오랫동안 모습을 감췄던 창수가 일묵서예에 나타났다.


“그동안 왜 안 보였어?” 동지가 물었다.


“재희씨 사고와 비슷한 시기에 나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좀 있었어. …그래서 신문사도 그만두었고.”

그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랬었구나. 그래, 지금은 괜찮아?"


"응, 그럭저럭.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어."


짧은 침묵이 머문 뒤 동지가 혼잣말인지 창수를 향한 질문인지 모호한 말투로 물었다.

“재희는 그날… 무슨 일로 남자들과 다투었을까?”


창수는 5년 전에도 그에게서 같은 질문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고 그때와 비슷하게 대답했다.

“시위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거든. 그런 경우엔 충돌이 생기기도 하지. 경찰이 나서는 것도 그래서야. 서로 물리적인 충돌을 막으려고.”


“그런 다툼이… 폭력으로 번질 수도 있을까?”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거든. 무한 증오라고 해도 틀리지 않아! 만약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두 집단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살육전을 벌일지도 몰라.”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그런 견해 차이로 서로를 증오하고 폭력까지 행사한다는 건 이해하기가 쉽지 않군.”


창수는 커피잔을 들어 입술에 댔다가, 조심스레 다시 내려놓았다.

“역사? 공유하지 않아! 적어도 근현대사에서는 완전히 다른 역사야. 어느 한쪽은 철저히 다른 역사를 믿고 있지.”


“자네가 말하는 ‘한쪽’이란 누구지? 역사를 왜곡하는 그들 말이야.”

동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수 앞에 놓인 커피잔을 응시했다.


“역사의 해석은 다를 수밖에 없겠지. 그 역사로 인해 얻은 자와 잃은 자가 존재하는 한은…”

질문의 요지를 슬쩍 비껴가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동지는 더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재희가 사고당한 그날 밤, 자넨 어디 있었지?”

동지는 별 뜻 없는 질문이라 말하고 싶은 듯 말끝에 손가락을 번갈아 뒤로 꺾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라도 오려나?’ 하는 얼굴로.


창수는 본능적인 경계 감각으로 빠르게 판단했다. ‘대답을 잘해야 해. 가능하면 사실에 가깝게 말하는 편이 좋아.’

“어… 응. 그날 사실 나도 여길 들렀었어. 근데 들국화 다실에 불이 꺼졌기에 바로 광화문광장 쪽으로 갔지. 그날 시위는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졌거든. 우리 일이란 게 밤낮을 가릴 수가 없으니까.”


동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더는 말이 없었다.


“이만 가볼게.” 창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때 동지가 불쑥 물었다.
“그 역사 선생 박 일수 말인데, 여전히 그 아파트에 살까? 혹 모르니까 그 사람 현 소재지를 좀 확인해 줄 수 있을까?”


“알아볼게.”

창수는 선 채로 짧게 대답하고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며칠 뒤, 창수는 동지에게 전화를 걸어 그 역사 선생 박일수가 무슨 사고로 죽었다더라고 전했다.


창수가 다녀간 뒤, 동지는 잊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그것은 2008년 5월,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앞에 전시되었던 그림들로, 동지의 시선에 잠시 닿은 후에 기억의 창고 어느 구석에 방치된 낡은 필름 같은 것이었다.

쥐와 사람을 합성한 괴물, 그 몸통을 철근으로 꿰거나 작두로 목을 자르는 잔혹한 장면들, 그리고 그 괴물과 한 여자의 구역질 나는 성행위 장면. 괴물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고 여자는 그의 아내였다. 그 그림 속의 장면들이 마치 암실에서 한 장 한 장 인화하여 띄우듯이 5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차근차근 눈앞에 되살아났다.


버려진 필름을 다시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인화액을 묻혀 되살려낸 사람은 창수였다. 창수의 입에서 나온 말, ‘증오’, 역사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두 집단 간의 무한 증오. 그 추상명사 하나가 어찌 된 일인지 광화문광장에서 마주했던 끔찍한 그림들을 불러내었고, 그 단어와 그 그림들은 좀체 분리되지 않은 채 그의 뇌리에서 단단히 결합했다. 마치 지상에서는 갈라진 두 그루 나무가 땅속 깊은 곳에서는 하나의 뿌리를 공유한 것처럼.






동지는 명상 수련에 들 때마다 시간여행의 문이 열리기를 고대했으나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다. 시간여행의 기회는 노력하거나 기다린다고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무심한 때에, 아무런 전조도 없이, 잊고 간 물건을 찾으러 온 사람처럼 불쑥 나타났다.


2013년 8월에야 네 번째로 그 신비의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지난번 시간여행이 끝났던 주한 요르단대사관 앞을 지나, 옛 의정부터 코너를 돌아서 한국 역사박물관 앞까지 무사히 재희의 뒤를 따라 갔다. 세종대왕 동상과 세종문화회관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그러나 재희는 곧바로 세종로를 건너지 않고 역사박물관 앞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하문 쪽에서 함성과 확성기 소리가 뒤섞인 복잡한 소리가 들려왔다. 광장 여기저기에 어지러이 흩어진 시위의 잔재들, 촛불 손잡이, 각목들, 떨어져 덜렁거리는 버스의 백미러, 타이어가 펑크나 기우뚱 서 있는 버스, 시위 문구가 적힌 팻말과 종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비에 젖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밤 열한 시가 가까웠다. 재희는 비가 내리는데도 벤치에 앉아 자하문 쪽을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동지는 창수가 궁금하여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또다시 모든 존재가 휘청하며 흔들린 뒤 사라져가고 더 이상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다가가지 못한 채 동지는 현실로 돌아왔다.




[요양병원]


동지는 재희에게 투정을 부렸다.

“재희야, 그만 일어나서 가면 안 되겠니?”


(오빠, 무슨 말?)


“그 역사박물관 앞에서, 그만 일어나면 좋겠어. 그 젖은 벤치가 괜찮니?”


(그래 맞아! 어렴풋이 생각이 나. 난 벤치에 앉았었고, 비가 내렸던 것 같아. 오빠는 내가 비를 맞는 게 싫었구나!)


동지는 조심스럽게 재희의 어깨 아래로 팔을 넣어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볼을 맞대고 생각했다. 그날 밤, 이 박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아니 재희가 안아달라고 했을 때 안아줬더라면, 재희는 분명 광화문광장이 아니라 안국역에서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가득 담은 채 지하철을 탔을 것이다.

‘결국 오빠의 마음은 그만큼이었구나!’ 방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재희가 남긴 말이다. 그때 재희의 눈에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재희야··· 네가 그랬지? 안아달라고. 그때 너를 안아줬어야 했어! 그 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그랬어요, 오빠? 그 말 꺼내기까지 내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르지?)


‘재희야, 난 아직도 너와 말을 나누지 못해. 너를 보고 왔지만, 전해줄 말이 없어.’


(그러니까 오빠, 이제 그런 꿈은 꾸지 말아요. 마음만 아프잖아요!)


‘근데 재희야, 난 정말로 궁금한 게 하나 있어. 5년 전 그 역사 선생과의 일 말이야. 넌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이 박사에게 그 일을 알렸더구나. 그래서 이 박사가 학교를 찾아왔었다지? 난 어머님을 통해 알았고··· 지금에야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난 늘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


(무슨 말? 그건 오해예요. 그런 적 없어요! 나도 갑자기 박사님이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나중에 물어보니까 시 교육위에 근무하는 친구에게서 들었데요. 근데 박사님이 학교로 찾아온 건 어떻게 알았어요? 누구에게 들었어요?)


‘재희야, 이제 머지않아 범인의 얼굴을 볼 것 같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너를 해친 범인을 찾아서 내 손으로 꼭 복수할 거야!’


(오빠! 꼭 그렇게 하세요. 그런 다음 오빠는 오빠가 가던 길에 전념해야죠! 그리고 조금 전 그 얘기를 더 해보세요. 아니, 생각을 해봐요. 생각만 해도 난 들을 수 있어요. 내가 박사님에게 알렸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 그 이유를 마음에 떠올려 봐요. 이건 나와 오빠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잖아요. 어서요!)


“복수뿐만 아니라, 너를 반드시 원래대로 회복시켜 놓을 거야!”

동지는 이 말을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오빠, 그건 오빠가 간절히 소원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 희망은 오빠를 너무 힘들게 하지 않을까요? 그보다 조금 전 그 생각을 더 해보라니까요!)


‘재희야, 넌 지금 이렇게 누워있는데, 난 못나게도 여태 과거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 미안하다, 재희야!’


(아, 오빠!···· 아니에요. 못난 것도 아니고 미안한 일도 아니에요. 오빠가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어쩌면 우리의 불행은 오빠의 그 오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요. 난 알고 싶어요. 이젠 내가 궁금해서 못 견디겠어요. 오빠! 아, 생각을 안 하는군요. 오빠가 생각을 안 하면 난 알 방법이 없어요. ···기회는 또 있겠죠. 언제든 그 생각을 한 번만 더 해줘요. 꼭 이예요!)


그 후 한동안 시간여행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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