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유령

(13회) 제2장 고독한 여정 - 4년 후의 그날에 생긴 일

by 해암

4년 후의 그날에 생긴 일






[2012년 5월 31일 밤/인사동 동지의 방]


재희가 방문을 열고 나가고, 이어서 ‘탁, 탁’ 계단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안에는 또 다른 동지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동지는 그 기이한 장면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이 급히 밖으로 나가 재희를 뒤쫓았다.

재희는 골목의 모퉁이를 돌아나가는 중이었다. 연녹색 오버핏 트렌치코트를 입고 은회색 가방을 어깨에 멘 그녀는, 정확히 4년 전 그날의 모습이었다. 가방끈의 은색 쇠사슬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거렸다. 재희는 두 손을 코트 호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걸었다.


동지는 인사동길 노변에 두 줄로 늘어선 초롱 모양의 가로등 사이에서 공중에 뜬 채로 재희의 뒤를 따라갔다. 가로등 불빛 속으로 작은 빗방울이 빗금을 그리며 떨어졌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지고 내려다보이는 길바닥의 마천석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재희는 북인사마당에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집으로 가려면 오른쪽의 안국역에서 전철을 타야 한다. 왜지? 어디를 가려고? 동지는 의아했다.


우정국로 초입의 건널목 앞에서 동지는 재희 앞에 내려섰다. 어딜 가느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재희야!”

그녀가 놀라지 않게 작은 소리로 불렀다.


재희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마치 사막 한복판을 혼자 가는 사람처럼 걸었다. 그녀를 마주 지나치거나 뒤에서 추월하는 사람은 몸을 비틀어 그녀를 피해 갔다.


동지는 다시 재희의 앞을 막아서며 이름을 부르려다가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그 순간 문득, 재희가 지금 가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돼! 그쪽은 아니야!”

동지는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재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람들에 섞여 건널목의 중간쯤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가 갑자기, 아마 이삼 초 동안, 묘한 곡선을 그리며 흔들렸다.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선 경복궁의 담장과 화강석 구조물과 주변의 건물들과 은행나무 가로수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잠시 흔들리다가 애니메이션의 ‘흩어뿌리기’처럼 잘게 부서지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암흑의 구멍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극히 짧은 순간에 세상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동지는 등 뒤로부터 낚아채는 듯한 강력한 힘을 감지하며 눈을 떴다.


눈을 뜬 동지는 수련실에 앉아 있었다.

‘이런··· 꿈을 꾸다니!’ 그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평소 명상 수련을 마칠 때와는 다르게 야릇한 한기가 몸을 조여왔다. 벽시계를 보니 밤 10시 40분, 명상 수련에 든 지 한 시간쯤 지난 때였다.


동지는 지난 이십 년 동안 명상 수련 중에 졸았던 적이 있었나 되돌아보았다. 그런 기억은 없었다. 더구나 잠이 들어 꿈까지 꾼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그가 보았던 것들은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명료했다. 분명 꿈일 수밖에 없음에도,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아! 재희가 두 다리로 서서 걷는 모습을 보다니···’ 동지는 눈을 감고 조금 전에 보았던 재희의 모습을 떠올렸다.

당장은 그것이 꿈인지 다른 무엇인지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재희야!’ 하고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큰 소리로 부르면 조금 전에 보았던 것들이 기억의 방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 꿈속 같았던 미완의 단막극은 재희가 거실에서 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세상이 모두 자잘하게 부서져 사라지는 장면으로 끝났다.


동지는 생각했다.

‘어느새 4년이 흘렀다. 2008년 5월 31일, 4년 전 그날, 방문을 열고 나가던 재희의 뒷모습을 나는 몸서리치도록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때 나는 두 손을 모아 쥐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을 뿐 결코 재희를 따라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다만 재희가 떠나고 한 시간쯤 지난 무렵에,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광화문광장으로 달려 나갔다가 돌아오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조금 전 대략 십 분 동안 보았던 장면들은, 4년 전 그날에 분명 재희 혼자만이 경험한 시공간이었다. 그럼에도, 난 내가 개입하지 않았던 그 시공간을 꿈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모르게 잠깐 엿보았다. 2012년 5월 31일, 4년 후의 바로 그날에···’




[그 시간, 요양병원]


눈꺼풀이 무겁다. 눈이 떠지지 않는다. 너무 깊은 잠에 빠졌나 보다. 아니, 잠에 빠졌다기보다는 독한 약에 취한 것 같다. 그런데 정신은 깨어났는데도 몸이 깨어나지 않는다. 아니다, 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몸이 없다. 몸의 어디가 찌뿌둥하다든가 아니면 잠옷이 등을 쪼인다든가 해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기지개도 켜지지 않는다.


근데 천장이··· 내 방과 다르다. 온통 흰색뿐이다. 어, 저건 뭐야? 저건 바이털사인 모니터잖아··· 이런, 여긴 병원이야! 어머나··· 내 몸이 병원 침대에 누워있어. 바이털사인 모니터가 내 손목에 연결돼 있고, 뭔지 모를 튜브들이 팔을 감고 있어. 그렇다면··· 내가 크게 다쳤거나 병에 걸려 병원에 실려 온 건가?


밤인가 보다. 방은 희끔하게 밝다. 창밖에 달은 보이지 않는데 하늘 어느 구석에 달이 있는지 달빛을 머금은 하늘색이다. 여긴 삼 층쯤 되려나. 창밖으로 키 큰 나뭇가지들이 보이고 그 사이로 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늦은 밤인가 보다. 창문들 대부분이 깜깜하다. 침대 위의 내 몸은 눈을 감은 채 누워있고··· 근데 너무 말랐어. 뼈와 가죽만 남았네.


아, 누군가 들어온다. 흰 가운··· 간호사인가 보다. 오십 대로 보이는 약간 살짐이 있는 여자다. 그녀가 모니터와 내 손목의 튜브를 확인하고는, 내 등 밑으로 손을 넣어 자세를 바꿔준다. 동작이 아주 능숙하다. 그녀가 내 몸을 만지는데도 나는 그녀의 손을 느끼지 못하겠다. 그녀는 곁에서 지켜보는 나를 전혀 모른다.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고는 병실을 나간다.


그녀를 따라가 봐야겠다. 복도를 20미터쯤 지나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야간 당직 간호사 실인가 보다. 초짜로 보이는 젊은 간호사 하나가 더 있다. 출입문 없이 개방된 공간에 책상 둘, 기역 자 파티션으로 경계를 지어서 각자의 공간을 만들었다. 책상 사이 작은 테이블 위엔 선인장 화분과 노란 프리지어꽃이 나란히 놓여있다.

간호사가 책상 앞에 앉아 PC의 엔터키를 툭 쳐서 화면을 연다. 그녀가 자판으로 뭔가를 기록한다. 근무일지를 기록하나 보다. 칸이 그려진 양식 상단에 날짜가 보인다. 2012년 5월 31일이다. 2012년? 그렇다면, 지금은 사 년 후의 미래란 뜻인가? 뭔가 착오가 생겼나 보다.


다시 병실로 돌아와서 보니, 내 몸은 조금 전처럼 침대에 누워있고, 얼굴이 편안하다. 크게 다친 사람 같지 않다. 몸은 움직이지 못하는데 숨은 쉬고 있다. 그런데··· 정말 많이 말랐다. 저만큼 형편없는 얼굴이 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잘 모르겠다.


엄마가 안 보이는 게 이상하다. 엄마는 어디 계실까? 다치고 금방이라면 엄마는 지금 내 곁에 있어야 맞다. 그렇다면 내 상태가, 늘 곁에 대기할 필요가 없을 만큼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뜻이겠다. 주위가 무서울 만큼 조용하다. 아마 새벽인가 보다. 아··· 어지럽고 졸음이 밀려온다.


근데 오빠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는 걸까?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그렇다면 오빠의 마음이 변한 걸까?

모르겠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뭔지 모를 심각한 상처를 입고 병원에 누워있다는 것, 그리고 이 형편으로는, 어쩌면··· 다시 못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입은 오빠 곁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함께 걷는 내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린 걸까?


엄마가 보고 싶다. 날이 새면 엄마가 오실까? 불쌍한 엄마··· 이제 엄마에겐 아무도 없다. 오래전 남동생을 사고로 잃었고, 그다음 해에는 아버지와 헤어지는 아픔까지 겪으셨다. 아마 내가 없었다면 엄마는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엄마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학교는 어떻게 됐을까? 반 아이들은? 수업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재희는 이 뭔지 모를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곧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영화나 TV 드라마처럼, 우연한 계기로 타임머신을 타게 되었고, 그 결과 4년 후의 미래로 이동한 건 아닐까? 그래서 지금, 이 낯선 병실에서 자신이 크게 다쳐 누워 있는 미래의 모습을 보는 건 아닐까?


혹시나 내가 4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 생각을 하기까지 그녀는 마음속에서 많은 가설과 반론을 거듭했다. 한 계단 오르면 또 한 계단 내려가고, 생각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쉼 없이 물음표를 그려냈다.

이성적 판단으로는, 타임머신보다 병상의 4년이 훨씬 합리적인 설명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히려 ‘병상의 4년’ 쪽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튿날 오전, 요양병원]


재희의 숨결은 고르고 얼굴도 편안했다. 동지가 병실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재희의 호흡이었다. 숨만 겨우 쉬면서 어째서 얼굴은 편안할까? 생각하며 동지는 의자를 당겨 재희의 병상 곁에 앉았다. 긴 호흡을 뱉어내며 동지는 한 손을 재희의 이마에, 다른 한 손은 단전에 얹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재희가 잠에서 깼다.

(아, 오빠구나! 오빠에겐 아무 일이 없었구나!)

재희는 침대를 훌쩍 뛰어 내려와 뒤에서 그의 등에 얼굴을 묻는다.


(내가 얼마 만에 오빠를 보는 걸까? 어쩌면 4년 만인지도 모른다. 근데 오빠,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내가 왜 여기 누워있는 거죠? 오빠는 알아요? ···아, 오빠가 눈을 감고 뭔가에 집중하고 있어. 내 말이 들리지 않나 봐. 아, 그래 짐작이 가. 오빠가 아픈 나에게 뭔가를 한다면 그게 뭔지 대강은 알아. 근데 오빠가 힘든가 봐.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어)


재희는 손을 뻗어 동지의 이마에서 땀을 닦아주려다가, 곧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한 시간쯤의 기치료를 마친 뒤 동지는 재희의 경락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의 발가락부터 주무르기 시작하여 종아리와 무릎, 허벅지, 골반까지 전신을 주물렀다.


(어, 오빠, 어디를 만져? 저런 야단났네!)

재희는 동지의 손을 잡는다. 하지만 동지의 손은 전혀 방해받지 않은 채 움직인다.


‘재희야, 내가 어젯밤에 뭘 봤는지 알아?’


(뭘 봤어요?)


‘네가 걷는 걸 봤어.’


(가엾어라, 꿈을 꿨나 봐? 난 여기 꼼짝 못 하고 누워있는걸?)


‘너무나도 예뻐서 울뻔했어!’


(왜, 갑자기? 그런 말은 이상해, 오빠!)


‘그런데 재희는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 난 말을 붙일 수조차 없었고.’


(어머, 왜 그랬을까? 꿈이니까 그랬을 거야. 다음에 또 꿈을 꾸면 꼭 안아줘요. 그리고 와서 자세하게 얘기도 해줘요.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 어? ···그런데 오빠는 지금 입으로 말하는 게 아니잖아? 그냥 생각했을 뿐인데··· 내가 오빠의 생각을 듣고 있어. 알아듣고 있다구!)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다음에 또 보게 되면 어떻게든 얘기를 해볼 거야.’


(오빠도 내 말이 들리나요?)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아! 엄마!)

엄마, 하고 부르며 재희는 엄마의 목을 와락 끌어안는다.


희경은 동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동지 왔구나. ···어미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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