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유령

(20회) 제2장 고독한 여정 - 7년 전 미스터리의 정체

by 해암

7년 전 미스터리의 정체







저녁부터 큰 눈이 내렸다. 기상 리포터는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서울에 이런 눈이 내리기는 드문 일이라며 들뜬 목소리로 눈 소식을 전했다.

옥상 쉼터에서 바라보는 북한산은 하늘과 산이 한 빛깔로 섞인 광막한 설원으로 변했다. 인왕산과 북악산도 하나가 되어 커다란 설산을 만들었고, 설산의 끝자락에는 겨울잠에 든 짐승인 듯 경복궁이 고요히 엎드려 있었다. 고궁 속에 점점이 박힌 작은 등불들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했다. 고궁을 감싸며 뻗어나간 광화문 성벽은 밖의 밝음과 안의 아슴함 사이를 가르며 거대한 구렁이가 눈보라 속을 천천히 기어가는 것 같았다.

인사동길은 가게들이 대부분 문을 닫아, 몇 군데에서만 낮은 조도의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이따금 무슨 사연이라도 지닌 듯한 사람이 통금 시대의 야경꾼처럼 눈 덮인 길을 터벅터벅 지나갔다. 탑골공원 북문 쪽 수표로 역시 인적이 끊기었고, 바람이 불 때면 눈가루만이 골목과 건물 사이를 가득 메웠다.


그날 밤 일곱 번째로 시간여행의 문이 열렸다.

터널의 계단에서 사내의 팔을 뿌리친 재희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계단을 올라갔다. 동지도 빠르게 재희를 뒤따라 터널을 빠져나왔다. 창수는 여전히 세종로 건너편 나무 그늘 아래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로 그때 지금껏 경험한 적이 없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동지가 동상 뒤 이삼 미터쯤의 귀퉁이가 깨진 포석에 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몸이 부르르 떨리며 번쩍하는 백색의 불꽃이 폭발했다. 불꽃은 몸 밖이 아닌 몸 안에서 터졌다. 폭죽 같은 불빛이 망막의 안쪽에서 터지고, 머릿속에서 찡하는 정적 음이 들렸다. 동시에 아주 짧은 영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아니,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기보다는, 자신이 영상 속에서 빠져나왔다는 편이 옳을 혼돈의 찰나였다.


지금까지 유체 이탈에서 돌아올 때와는 달랐다. 영상 속에 머물렀던 찰나의 순간에 동지는 시간여행 중의 자신이 아닌, 실제로 몸을 가진 또 다른 동지가 되어 그 깨어진 포석 위에 서 있었다. 그 순간 동지는 이마에 빗방울이 부딪치는 서늘함을 느꼈다. 그것은 실존하는 육신이 느끼는 생생한 촉감이었다.

이어서 시간여행이 끝날 때의 신호를 감지하였고, 모든 존재가 잠깐 흔들린 뒤에 사라지는 소멸의 순간이 뒤따랐다.


동지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벽시계를 보니 명상 수련에 든 후 대략 한 시간이 지났다. ‘그만 내려가 자거라.’ 동해를 보낸 뒤에 동지는 옥상의 움막으로 올라갔다.


7년 전, 영문도 모른 채 세종대왕 동상 뒤에 서 있었던 그 황망했던 사건의 전모가 어렴풋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동지는 사력을 다해 기억의 미로를 더듬어갔다.

7년 전 그날 밤, 재희가 내 방을 나간 뒤, 나는 평소와 같은 시간에 침대에 누웠지만 바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광화문광장으로 달려갔었다. 그날 나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워 광화문광장으로 내몰았던 범인은 아마도 7년 후의 나 자신이었던 듯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짐작건대 어느 날 유체 이탈을 한 뒤 이전처럼 재희의 뒤를 따라가는 대신 7년 전 나의 몸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나는 곧바로 7년 전의 몸뚱이를 끌고 재희를 구출하기 위해 광화문광장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러나 재희를 만나기 전에 동상 뒤의 그 모서리가 깨어진 포석을 밟는 순간 시간여행이 중단되어 나는 7년 후의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편, 7년 전 과거의 나는 세종대왕 동상 뒤에 내버려진 채로 정신을 차렸고, 아무런 전후 사정을 모른 채 어리둥절하다가 인사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시간여행 중에 우연히 그 깨어진 포석을 다시 밟았을 때, 마치 계시나 영감처럼 7년 전 그날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만약 7년 전 그날, 내가 인사동길로 돌아오기 전에 그곳에서 조금만 더 머뭇거렸다면 지하 터널에서 올라오는 재희와 만났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빠, 내가 여기 온 걸 어떻게 알았어?’


‘아니, 몰랐어. 넌 왜 집에 가지 않고 여기 있는 거니?’


재희와 나는 깜짝 놀라며 서로 엇갈리는 질문을 하였을 테고, 어쩌면 그 불행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의 재희를 지켜볼 수 있게 되었던 초기에 동지는 두 가지 생각에 깊이 사로잡혔었다. 그중 하나는, 시간여행의 지속시간이 점차 늘어나 언젠가는 그날의 사건 현장을 눈으로 볼 수 있으리란 기대였다. 그리고 그 기대는 머지않아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재희가 겪은 그 끔찍한 사고 자체를 막아낼 수도 있을 거란 희망이었다. 그 불행한 사건을 막으려면, 과거 그 때로 돌아가 광화문광장을 향해 가는 재희를 안국역 쪽으로 돌려세우기만 하면 되었다.

다시 말해, 불운의 카드 앞에 놓인 도미노의 패 하나를 치워버리거나 방향을 살짝 바꾸기만 하면 그 불운의 카드를 밟지 않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여행 중의 그는 과거의 재희와 말을 나누거나 그녀의 행동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두 번째의 희망은 스스로 접고 말았다.


그랬었는데, 일곱 번째 시간여행을 겪고 나서 사라졌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살아났다. 과거를 바꾸기 위해서는 재희의 시공간 안에서 그녀를 지켜만 보는 ’나‘가 아니라, 실재 몸을 가진 ‘나’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내 몸을 빌리는 방법이 있었다.

동지는 가슴이 뛰었다. 재희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따사로운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 못 할 것은 없었다.


깊은 상념에서 벗어난 동지는 불현듯 재희가 보고 싶어 벌떡 일어나 요양병원으로 달려갔다. 늦은 밤의 몇 안 되는 행인들이 놀라 쳐다보았지만, 그는 전속력으로 눈 덮인 길을 뛰었다.


병원 복도에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동지는 조심스레 재희의 병실 문을 열었다.


“재희야!” 이름을 불렀다.


(어머, 오빠! 왜 또 왔어요? 낮에 다녀갔었잖아요?)


동지는 재희를 불러놓고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표정이 많이 상기되었는데?)


‘재희야,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오빠, 얘기해줘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동지는 의자를 끌어 재희의 침대 곁에 앉아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오랫동안 마음 가장자리에 해자를 두르고 두꺼운 성벽을 쌓아 왔었지만, 마침내 그 둑이 무너지고 말았다.


(어머, 오빠가 왜 이럴까, 오빠! 무슨 일이에요?)


재희는 동지의 등 뒤로 돌아가 허리를 꼭 껴안았다.


(아, 오빠의 몸이 떨고 있네. 울고 있잖아! 오빠, 우는 거예요? 오빠가 우는 건 처음 봐. 아, 오빠! 울지 말아요. 오빠가 이러면 나도 무너진다구요. 나도 더 이상 못 버텨요!)

그녀 역시 울먹이고 있었다.


2015년은 동지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고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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