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제2장 고독한 여정 - 눈 내린 날의 두 제자
서울에 큰 눈이 내리던 날, 오후 수련을 마친 동지는 현서를 저녁 수련에 참석시키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안국역을 향해 걸으며 용학이 말했다.
“모처럼인데 같이 저녁 먹을까?”
“그럴까?”
현서도 눈 내리는 날의 ‘모처럼’이 싫지 않아 선뜻 응했다.
홍대입구역에 내렸을 때도 눈은 내렸다. 용학이 예약한 참치 전문집 별실에서 따스한 온기를 즐기는 사이, 오래 기다리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테이블 중앙에 참치회와 사케가 놓이고 나머지 공간에 많지 않은 그릇들이 보기 좋게 배열된 깔끔한 상차림이었다. 복주머니같이 배가 볼록한 백색 도자기에 담긴 사케는 외형만으로도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용학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 개의 작은 백자 술잔에 사케를 따라, 그중 하나를 현서 앞에 밀어놓고, 분홍빛이 나는 참치회 한 점을 집어 현서의 앞접시에 올려놓았다.
“이건 ‘오도로’라고, 참치 뱃살인데 마블링이 꽃등심처럼 곱지.”
그는 젓가락 끝으로 와사비를 찍어 회 위에 발라주며 말했다.
“마니아들은 회에 직접 와사비를 발라서 먹기도 해. 한 번 먹어 봐.”
“맵지 않을까?”
“그 맛으로 먹는 거지.”
용학이 술잔을 앞으로 내밀고, 그녀도 잔을 들어 그의 잔에 살짝 갖다 댔다. 용학은 단숨에 첫 잔을 비우고는 다시 제 잔에 술을 따랐다.
용학이 다시 진한 붉은색을 띤 살점 두 개를 집어서 현서 앞에 놓아주었다.
“이건 뽈살인데, 머리 부위에서 발라낸 거야. 그리고 이건 아가미 뒷부분 살, 가마육이라고 하는데 둘 다 맛은 최고야!”
“많이 먹어. 난 내가 알아서 먹을게.”
“오케이, 자 한잔해!”
용학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현서 앞에 놓인 잔에 제 잔을 살짝 부딪쳤다.
“술 못 먹는 거 알면서? 이걸로 난 끝!”
‘끝’하며 현서는 손바닥을 살짝 들어 보였다.
용학이 잔을 비우자, 현서가 두 손으로 술병을 들어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 한 잔만 따라줄 테니까 나머지는 자급자족하셔!”
“아, 이건 담아 가서 냉동 보관해야겠는데!”
“그러시든지.” 하며 현서도 잔을 들어 조금 마셨다.
둘의 얘기는 태릉 선수촌과 인사동 사이를 맴돌았다. 용학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조심스레 말을 꺼내 보지만, 어느 한쪽이 소극적인 한 대화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는 어려웠다.
현서가 용학을 대하는 태도는 태릉선수촌에서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는 용학보다 현서가 더 적극적이었으나 용학은 어떤 여배우와 비밀리에 데이트 중이어서 현서와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던 때였다.
둘 사이의 위상이 바뀐 시기는 그 여배우의 복잡한 사생활이 까발려지고, 용학 역시 그 복잡함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뒤부터였다.
용학이 술잔을 비우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현서는 수련에 너무 깊이 빠져 있는 거 아닌가?”
“나도 사범님처럼 그런 능력을 갖추고 싶어.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까지는···”
“그런 능력···”
현서가 한 말을 입속으로 한 차례 되뇌고는 용학이 말했다.
“근데, 난 진도가 느린 것 같아.”
“그건 네가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서일 거야.”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어?”
“····”
대답이 없자, 용학은 다시 물었다.
“단지 그런 능력을 갖추고 싶은 거, 그게 다야?”
“무슨 뜻?”
현서가 되물었지만, 용학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스하키 국가대표였던 용학은 눈에 띌 만큼 잘생긴 외모와 늠름한 체격을 지녔고 부유한 집안 탓에 용돈 쓰임새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자연히 그가 손을 내밀면 쉽게 무장해제가 되는 여자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런 관계로는 마음속 깊은 허전함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현서를 원했다.
“우리 사실 꽤 괜찮은 커플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야.”
용학이 말했다.
“····”
“그렇지 않아?” 용학은 다시 물었다.
“용학 씨는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
“물론… 멋있기도 하지.”
둘 사이는 자주 대화가 단절되었다. 연인 사이라면 대화의 소재가 마를 틈이 없어야 하고, 말없이 서로를 바라만 보더라도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밀한 정서적 터치를 대신하거나, 서로에 대한 지지를 무언중에 교감하는 편안한 침묵일 테지만, 그들 사이에는 자주 어색한 침묵이 껴들었다.
“남자로서의 사범님은 어떤 분일까?” 용학이 물었다.
“사범님에 대해 그런 식의 얘기는 하지 말자. 함부로 평가할 분이 아니잖아!”
침묵이 오래갔다. 용학 역시 스승을 존경했지만, ‘남자’로서까지 비교당하는 건 불편했다. 현서로부터는 더욱 그랬다.
재희가 사고를 당한 이후, 용학의 눈에 비친 현서는, 스승에게 더욱 각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현서로서는 스승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자 고통받는 스승을 향한 연민이기도 하겠으나, 용학의 생각은 달랐다. 거기다, 현서가 저녁 수련에까지 동참하고부터는 불쑥불쑥 질투심이 솟구쳐 오르곤 했다.
“사범님도 의외로… 평범한 남자일 수도 있어.”
용학은 가쁜 호흡을 애써 가다듬었다.
“그런 모습을 봤으면 좋겠어.”
'무슨 뜻이지?'
용학의 시야에 물음표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마치 고속 촬영한 꽃잎처럼 찬찬히 피어나는 의문부호, 그는 눈앞의 그 상징을 노려보다가, 연거푸 몇잔의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왔다.
용학은 술을 마시고, 현서는 용학이 가져다준 콜라를 마시며 남은 회 접시를 비웠다. 그동안 현서는 이미 아는 용학의 아이스하키 선수 시절의 무용담을 한 번 더 들었다.
초밥과 일본식 된장으로 식사를 마쳤을 때 현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제 그만 갈까?”
몸을 일으켜 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이 핑 돌았다. 술 때문인가, 생각하며 이층에서 첫 계단을 내려서는데 갑자기 다리가 휘청 흔들렸다. '아, 내가 왜 이러지?' 하며 현서는 앞서 계단을 내려가는 용학의 어깨를 짚었다. 용학은 두 팔을 뻗어 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
식당 앞 길가로 나왔을 때는 도시의 불빛들이 확대되고 부풀어 올라 강렬한 태양 아래 무방비로 선 듯이 눈이 부셨다. 건물들과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의 윤곽이 흐릿하게 무너져 흔들리고, 반딧불 같은 작은 불빛들이 눈앞에서 어지러운 포물선을 그렸다. 머릿속은 햇볕에 바짝 마른 흰 천처럼 말라붙어 어떤 생각도 온전히 이어가기가 힘에 부쳤다.
용학이 현서의 왼쪽 팔을 자기 목에 두르고 오른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현서는 용학에게 몸을 실은 채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생각은 이러면 안 되는데, 뿌리치고 가야 하는데 하면서도 몸이 반응하지 않았고, 마음은 자꾸만 포근한 이불 속에 눕고 싶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내가 왜 이러지?’라는 생각 뒤에 식당에서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스승님에 관한 얘기 끝에, 용학은 연거푸 몇 잔의 술을 입속으로 털어 넣고는 ‘화장실 좀 다녀올게.’라며 일어섰다. 조금 뒤 캔콜라 하나와 유리컵을 들고 온 용학은 ‘술 대신 콜라라도 마시지?’ 하며 캔 콜라를 따서 유리컵에 따랐다. 그는 기포가 톡톡 튀는 컵을 현서 앞에 놓은 뒤에 자기의 사케 잔을 들어 유리컵에 갖다 댔다. 현서가 유리컵을 손으로 잡자, 용학은 술을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마포도서관 옆 담장을 따라 올라간 작은 언덕 위에 용학의 오피스텔이 있었다. 오피스텔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누이자, 졸음이 덮어쓰듯 쏟아졌다. 화장실 문 여닫는 소리에 이어 사워 물소리가 그녀의 귀에 어렴풋이 들렸다.
잠시 후, 용학이 이불 속으로 들어와 그녀 곁에 누웠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듯 천장을 바라본 채 누워있었다.
‘그래 이렇게 자자. 그러면 돼. 넌 아주 싸구려는 아니잖아. 이대로 잠들고 내일 아침에 조용히 헤어지자.’ 현서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자꾸만 내려 감기는 눈꺼풀을 애써 버텼다.
잠시 그러고 누웠던 용학이 상체를 반쯤 일으켜 현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왼팔을 그녀의 목 아래로 넣어 그녀의 상체를 감싸안았다. 깊이 생각하여 작정한 사람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용학이 현서의 가슴 위에 가만히 머리를 얹었다.
‘얘가 왜 이래. 이러지 마! ···너 죽을 줄 알아!’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스러졌고, 손을 휘저어 보려 해도 꿈속에 갇힌 듯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용학의 근육질 다리 하나가 그녀의 하반신을 누르고, 둘의 입술이 겹쳐졌다. 현서는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의식은 빙산 조각이 떨어져 나가듯 맥없이 무너져 내렸고, 몸은 깊은 물 속에 잠긴 듯이 무력했다.
‘남사친’일 뿐이라며 선을 긋고 지내던 동안에도 그에게 정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한때는 그녀가 먼저 그를 좋아했었고, 힘든 선수촌 생활 중에는 그의 존재가 힘이 되기도 했다. 그때는 바라보기만 해도 흉곽이 화르르 떨리고 설렜었다. 그랬었는데 그와 어떤 여배우 사이의 스캔들이 세간에 오르내렸을 때 그녀의 마음도 식었다. 그 후 지금까지 그가 뜨거운 시선을 보낼 때면 그녀는 시종 무관심으로 일관하였지만, 솔직히 말해 싫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용학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마치 무례하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을 그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듯한, 상대에 대한 존중이 담긴 태도였다.
현서의 마음에서 불쾌감이 점차 사라져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무례한 행위를 스스로 변명하며 용서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옷이 하나씩 몸에서 벗겨져 나가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마지막 천 한 조각까지 떨어져 나갔을 때, 그녀는 마치 바람이 적당히 부는 여름밤, 요트 위에 누운 듯한 낯설고도 평온한 안락에 젖어 들었다. 차츰 몸이 반응하려 했다. 그를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고부터 그랬다.
그의 넓은 가슴이 시야를 가리고,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따라 내려올 때 현서는 간신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다리가 벌려지고, 그의 몸이 실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작은 통증을 동반한 강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위아래로 순식간에 뻗어나갔다. 무심코 짧은 숨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으나 소리는 입속에 머물렀다. 현서는 그 후에도 한동안은 잠들지 않으려 애썼다. 무엇인가를 붙들고도 싶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커튼 밖의 빛깔은 해가 뜬 후였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창문이 덜컹거렸다. 용학은 그때까지도 잠에 빠져 있었다.
현서는 가만히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분노보다는 허탈감이 먼저 밀려왔다. 하지만 그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야, 일어나!”
용학이 실눈을 떴다.
“옷 입고 거실로 나와!”
잠시 후, 반바지에 티셔츠만 걸친 채 거실로 나오는 용학의 명치에 현서의 니킥이 꽂혔다. 용학은 서너 걸음 앞의 소파까지 걷지도 못한 채 소파 아래에 머리를 박고 꼬꾸라졌다.
“그렇게 쉬웠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눈 감고 잘 수 있었냐고!”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용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현서는 그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눈은 차갑고 고요했지만 몸은 떨고 있었다. 그녀는 식탁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이걸로 끝이야. 내가 달라질 거라고 기대했다면 계산을 잘못한 거야. 넌 정말 나쁜 사람이야.”
“난 네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게 너무 싫었어! 그런 널 지켜보는 건 나한텐 지옥이었다구!”
용학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내뱉듯 말했다.
용학은 현서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현서가 누른 1층 버튼을 지우고, 대신 지하 1층을 눌렀다.
“싫겠지만, 집까지 데려다줄게.”
“미쳤어?”
현서는 다시 1층 버튼을 눌렀다.
홍대입구역 방향으로 걷던 그녀가 지나가는 빈 택시를 세웠다.
“현서, 한 마디만 말할게!” 용학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현서는 팔을 뿌리쳤고,
그가 말했다.
“내가 널 사랑하는 거, 그것만은 믿어줘!”
현서는 말없이 택시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