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유령

(22회) 제2장 고독한 여정 - 과거 수정을 꿈꾸다.

by 해암

과거 수정을 꿈꾸다.




동지는 남인사마당에서 젊은 국악인들이 벌이는 놀이마당을 잠시 구경하다가 낙원상가 쪽으로 발길을 돌려 탑골공원 동문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길에는 무료 급식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긴 줄을 서 있었다. 일렬종대로 줄을 선 노인들은 별말이 없이 멀뚱히 선 채 줄이 줄어들기만을 기다렸다. 식사를 마친 노인들은 탑골공원 북문 쪽 담벼락 주위에 모여 바둑과 장기를 두기도 하고, 공원 안으로 들어가 쉬거나, 다른 어디론가로 흩어져 갔다. 북문 주변과 동문 쪽 골목길은 소변 지린내가 자욱이 서려 있었다.


낮에 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남인사마당에서 들리는 북소리에 이끌려 내려와 놀이마당을 거쳐 탑골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에도 동지의 머릿속은 오직 유체 이탈과 시간여행뿐이었다. 그는 시간여행의 기회가 다시 찾아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밤마다 명상 수련에 들 때면 과거의 자신을 세종문화회관 앞에 데려다 놓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좀체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후에는 여섯 달 만에 제자들의 수련 성취도를 점검했다. 동해와 현서가 던진 핀은 표적을 살짝 벗어난 자리에 얕게 꽂혔다. 용학의 핀도 다트판에 꽂히긴 하였으나 다른 제자들에 비해 표적을 많이 벗어났다. 스승의 핀은 0.5cm 표적의 중앙을 정확히 뚫었다. 그러나 여전히 뒷면 벽에 핀의 자국을 남기지는 못했다.

동해와 현서의 성취는 스승인 그조차 놀랄 만큼 빨랐다. 용학은 다소 뒤처지는 듯 보였으나, 어디까지나 두 사람과의 비교일 뿐 그 자체로는 충분한 성과라고 생각했다. 동지는 만족한 미소를 띠며 세 제자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날 저녁, 여덟 번째로 시간여행의 기회가 찾아왔다. 동지는 8년 전의 시공으로 들어가, 두 남녀의 곁에 서 있었다. 서로 마지막인 줄도 모른 채 마지막이 되어버린 순간,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작별하고 말았던 그 현장을 동지는 제삼자의 자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결국 오빠의 마음은 그만큼이었구나.’ 그 말을 한 뒤 재희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동지는 계단을 내려가는 재희를 몇 발짝 따라가다가 멈춰 서며 고개를 돌려 과거의 동지를 노려보았다. 그의 표정은 괴로웠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동지는 재희 뒤를 따라가는 대신 8년 전 자신의 육신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과거의 몸으로 스며들게 될지 그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훌쩍 몸을 던져 그의 몸으로 뛰어들어 보기도 하고, 꼭 껴안아도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머리를 맞대고 비벼봐도 헛일이었다.


11시가 되자 그가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잠든 후라면 낫지 않을까도 싶었다. 생각해 보니 8년 전 그날, 광화문광장으로 달려 나간 시간도 늦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동지는 평소와 다르게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기만 했다. 시간은 11시 2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과거의 몸으로 들어가더라도 너무 늦은 시간이면 곤란했다. 재희가 사고를 당한 시간을 11시 40분에서 45분 사이로 가정한다면 늦어도 11시 30분까지는 과거의 몸에 들어가야 했다.

11시 20분이 막 지난 때에 동지는 잠잠한 수면 호흡을 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과거의 몸에 들어가지 못했다.


11시 25분을 넘어서자 동지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광화문광장을 향해 뛰었다. 옛 의정부터를 돌아서 미대사관 앞에 도착했을 때 재희가 보였다. 재희는 지하 터널에서 막 올라와 사고 현장인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창수는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유체 이탈이 끝나는 징조가 나타났다.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가 휘청 흔들리던 마지막 순간, 동상 뒷계단에서 머리를 내미는 라운드 챙의 등산모가 동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눈을 뜨자마자 동지는 시간여행의 지속시간을 따져보았다. 이상하게도 매번 조금씩 늘어나던 시간이 이번은 늘지 않았다.




한 달쯤 후, 초봄에 음성에서 부모님들이 상경했다. 진국과 인경은 매년 한두 번씩 인사동에서 아들을 만나고, 재희의 병원을 다녀갔다. 그들이 오는 날이면 희경보다 더 들떠서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은 재희였다.

재희는 아침부터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기다리다가 두 사람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반가워 어쩔 줄 모르며 그들을 끌어안았다.


“어쩌면 이렇게도 편안한 얼굴일까? 참 이상도 하지. 재희야, 이렇게 누워있지만 말고 어서 벌떡 일어나려무나.”

인경이 침대에 누운 재희를 들여다보며 어릴 적 재희를 대하듯 말했다.


(죄송해요, 아주머니!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참 예쁘고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진국이 혼잣말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네, 알아요. 아저씨도 저를 무척 예뻐해 주셨죠. 음성에 갈 때마다 저의 손을 잡고 농장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기를 좋아하셨어요. 아저씨, 기억하세요? 언젠가 아저씨가 비닐하우스의 도르래를 수리하시던 날, 제가 곁에 앉아 물었었죠. ‘동지 오빠의 아빠는 왜 안 계세요? 돌아가셨어요?’ 하고요.

그분은 이곳에 안 계신단다. 아주 오래전에 멀리 떠나셨지. 아마도 이젠 이 세상 분이 아닌 것 같아. 그 대답을 하시며 아저씨는 금방 목소리가 촉촉해지셨어요.

그럼, 아저씨는 어떤 분이세요? 저의 궁금증은 멈출 줄 몰랐었죠.

나? 음··· 나는 동지의 스승님께서 크게 다치신 뒤에 농장을 돌보기 위해 여기로 왔지. 그리고 난 동지를 누구보다도 많이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란다. 허허허. 그때 목을 젖히고 웃으시던 아저씨는 금방 또 행복해 보였구요.

웃음을 멈춘 뒤에 아저씨는 제게 물었었죠. 재희도 동지 오빠를 무척 좋아하는구나, 그렇지?

저는 한 음절로 ‘네’라고만 대답했어요. 그때 갑자기 눈물이 났거든요. 저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지만, 아저씨는 눈치채셨나 봐요. 제가 ‘네’라고 대답하고 고개를 못 들 때 아저씨는 침묵하시며 저에게 시간을 주셨거든요.)


희경이 진국에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농사지으시기가 힘들지 않으세요, 어느덧 일흔을 넘기셨는데?”


“점점 힘들어하세요. 그래서 올해부터는 하우스 동 하나만 하라고 했어요. 내 말을 들을지는 모르지만.” 인경이 대신 대답하며 진국을 쳐다보았다.


“가을 김장 배추만 심으세요. 벌써 오래전 추억이 되었지만, 겨울방학 때 우리 모녀가 음성에 가서 저장 배추로 전 부쳐 먹던 생각이 나요. 참 맛있었어요.” 희경이 옛 추억 하나를 소환했다.


“배추전은 동지와 재희도 잘 먹었어요. 둘이 앉아서 얼마나 맛나게 먹던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죠.”

인경이 아련한 눈빛으로 희경을 쳐다보았다.


(네, 맞아요. 아주머니가 해주셨던 배추전은 최고였어요. 커피색 생활 한복을 입으시고 전을 부치시던 아주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저는 맛있는 배추전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오빠가 부러웠어요. 그리고 아주머니와 동지 오빠는 아빠가 안 계셔도 참 행복해 보였어요. 아빠 대신 곁에 든든한 아저씨가 계셔서일까요? 아저씨는 나중에 진짜로 아빠가 되긴 하셨지만요. 저는 여덟 살 때부터 아빠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오해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오해가 풀렸어요.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멋진 로맨스를 성공하신 분들이에요. 엄마는, 아주머니가 동지 오빠의 친엄마가 아니란 사실을 마지못해 얘기했지만, 전 엄마의 말을 듣고 후회했어요. 차라리 엄마에게 캐묻지 말 것을, 모르는 편이 좋았을걸, 하고 말이죠.)


그날 진국만 먼저 음성으로 내려가고, 인경은 사당동 희경의 집에서 미여 스님을 만나 셋이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

그 이튿날 저녁에 동지는 음성에 잘 도착했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뒤 명상 수련에 들었고, 그날 밤 다시 시간여행의 문이 열렸다.

몇 차례 깊은 호흡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는 사이 어느새 고요한 적멸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는 아득히 멀어지고, 숨결마저 고요히 잦아들었다. 육신은 움직임의 잔상처럼 한 점 공적한 공간에 떠 있다가 이내 사라지고, 마침내 불이 일물로 통하는 문이 조용히 열렸다.


동지는 재희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과거의 자신을 쏘아보며 입술을 사려 물었다. 이번엔 반드시 너를 세종문화회관 앞으로 끌고 갈 거야. 재희 곁에 너를 데려다 놓기만 하면 돼.

동지는 침대로 올라가 그의 손을 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간은 11시 15분을 지나고 있었다. 지난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재희를 찾아 달려 나갔지만, 양쪽 모두에서 허둥대고 말았다. 이번은 결코 그의 곁을 떠나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윽고 그의 호흡이 잔잔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그의 수면 리듬이 전해졌다. 그 또한 드넓은 명상의 바다를 향해 돛을 올리고 항해를 시작했다.

잠시 후 잠들었던 동지가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마자 뭔가를 가늠하듯 잠깐 주위를 살폈다. 그는 손으로 가슴팍을 만지고 얼굴을 쓰다듬어 본 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시간은 11시 28분, 늦은 시간이었다.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에 뭔가를 각오할 때의 곡선이 꿈틀거렸다. 스탠드 옷걸이에 걸린 바지를 낚아채 입고 셔츠에 팔을 끼며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쿵쾅쿵쾅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를 들은 지선이 가운만 걸친 채 밖으로 나왔을 때, 동지는 이미 인사동길을 맨발로 달리고 있었다.


작은 빗방울이 이마에 떨어졌다. 뜸한 행인들 사이를 날렵하게 비켜 가며, 그는 북인사마당을 지나 광화문광장을 향해 달려갔다. 이마에 느껴지는 서늘한 빗방울의 감촉으로 보아, 과거의 몸을 끌고 가는 것이 분명했다.
옛 의정부터를 돌아나가며 동지는 세종문화회관 옆 화단을 주시했다. 그곳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재희는 아직 동상 아래의 지하 터널 속에 있었다.


“재희야!”

동지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며 세종대왕 동상을 향해 뛰어가던 그가 동상 바로 뒤의 귀퉁이가 깨어진 포석을 밟는 순간 유체 이탈을 끝내는 신호를 감지하였고 바로 시간여행은 끝나고 말았다.


기억이 명료해졌다. 8년 전, 그가 영문도 모른 채 세종대왕 동상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사건은 오늘 처음으로 과거의 몸을 빌리는 데 성공한 아홉 번째 시간여행의 결과였다.

일곱 번째 시간여행 중 우연히 귀퉁이가 깨어진 포석을 밟으면서 어렴풋이 되살아났던 기억이 아홉 번째 시간여행을 통해 증명된 셈이었다.


과거의 몸을 끌고 광화문광장으로 달려가는 데까지 성공했으나 문제는 시간여행의 지속시간이었다, 이번 은 재희가 지하 터널에서 나오기도 전에 끝나고 말았다.

재희가 지하 터널을 나와 세종문화회관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은 이미 보았다. 그녀를 마지막 본 위치에서 세종문화회관 옆 화단까지는 대략 50미터, 그 사이에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지하 계단에서 머리를 내밀었던 라운드 챙 등산모는 누구이며 재희의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5분만 더 과거의 몸을 빌릴 수 있게 된다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왜 시간이 단축되었을까? 동지는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그 대답을 과거의 몸에 들어가기 위해 기력을 소진한 데서 찾았다. 그리고 그 문제라면 조만간 극복할 수 있으리라 그는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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