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유령(장편소설)

(1회) 프롤로그

by 해암

프롤로그







2016년 6월 10일 오후 저물녘, 25년 만에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다. 선배님··· 선배님 맞으시죠? 청계광장의 난간에 기대서서 청계천 물을 내려다보던 중에 생긴, 그야말로 우연한 부딪침이었다.


무교동의 ‘낮술 환영’이란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나는 대뜸 오래전 기억 속에 남아있던 한 아이의 안부부터 물었다. 아이는 잘 있나. 몇 살이나 되었지.

그는 술 한잔을 여러 차례 나누어 마신 뒤에야 입을 뗐다. 올해 서른아홉입니다. 초등학생이었는데 서른아홉이라 했다. 어느덧 그렇게 되었구나. 나는 왠지 아이에 관해 더 묻지 못한 채 그와 함께했던 지난 얘기들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가 아이의 얘기를 꺼낸 건 두 번째의 술병이 테이블 위에 놓인 뒤였다.

동지가 지금 좀 어렵습니다. 그래, 이름이 동지였지. 그는 말을 잇기 전에 술 한 잔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선배님, 딸이 어미 팔자를 닮는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아들이 아비 팔자를 닮는다는 말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 없는 말이 자꾸만 두렵습니다.


인도로 떠났다는 그 스님은 어떻게 되었지. 소식은 들었나. 사십 년을 훌쩍 넘긴 세월입니다. 산 사람이라면 어찌 바람결에라도 소식 한번 들리지 않았겠습니까. 이미 산 사람은 아닙니다. 언젠가 갠지스강 모래톱에서 시체 태우는 장면이 TV에 비치는 걸 보고, 저는 그분 생각이 나서 섬뜩했습니다.”


아이가 어찌 되었는데, 무엇이 어려운데. 지금 구치소에 있습니다. 다행히 내일 아침에 나오기는 합니다만, 제가 가슴이··· 쪼개면 아마 재만 푸석푸석 날릴 겁니다.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그의 눈이 젖어 들 때, 나는 벽에 써 붙여놓은 ‘낮술 환영’이란 글자만을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튿날, 서울 남부구치소]


천왕산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이따금 산자락을 스쳐 지나가는 초여름 바람이 신록의 싱싱한 향기를 실어 날랐다.

천왕산 중턱에 자리한 구치소 건물은 이상하리만치 길어빠진 네모형 복층 건물이었는데, 밖에서 보아서는 층수를 헤아리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선지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한결같이 낯설고 버거웠다. 정문 옆 안내소 외벽에 붙여놓은 ‘따뜻한 가정과 사회로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란 글귀가 그나마 보기에 만만했다.


구치소 정문 앞은 취재진과 구경나온 사람들로 뒤섞여 어수선했다. 사람들은 무슨 말인가를 끊임없이 속삭이며, 얼기설기한 철문 사이로 구치소 건물 전면의 넓은 콘크리트 계단에 시선을 모았다.


이윽고, 멀리서도 체격이 듬직한 사내 하나가 등짝에 조그만 배낭을 메고 구치소 앞 계단을 내려왔다. 곁에는 키가 작고 뚱뚱한 교도관 하나가 바짝 붙어 그를 호위했다.

사내는 일정한 각도로 고개를 숙인 채 정문 쪽으로 걸어 나와, 붉은 포석이 깔린 구치소 정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운집한 취재진과 구경나온 사람들을 보자 흠칫 놀라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때 드러난 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는 사막 한가운데서 손가락으로 별자리를 가리키는 순례자의 눈을 닮아있었다.

여기저기서 놀라움의 조용한 탄성이 새어 나오고 기자들이 그에게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윤재희 씨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녀 곁을 8년 동안이나 지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생님께서 가르쳤던 무극권이란 어떤 무술입니까?”


“선생님께서 하신 행위가 범죄인 줄 몰랐습니까?”


여기저기서 질문을 퍼부어댔지만, 사내는 대답하지 않은 채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병원에서는 윤재희 씨가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하는데,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누군가 다시 물었을 때야 비로소 그는 고개를 들어 첫 대답을 했다.

“그녀를 사랑합니다.”

낮았지만 음색이 부드럽고 단단해서 멀리 선 사람의 귀에도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 짧은 한마디는, 마치 소음을 잠재우는 주문이기나 한 듯, 소란하던 공간이 일순 조용해졌다. 이윽고 고요 속에서 그를 바라보는 눈들이 하나둘 젖어 들었다. 여기저기서 눈을 껌벅이거나 작은 목기침으로 감정을 수습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때 한 새내기 여기자가 외쳤다.

“정말 멋진 분입니다. 마치 파도 위로 솟아오른 대왕고래 같습니다!”


그 한마디는 가라앉았던 공기를 단숨에 뒤집어놓았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쿡쿡 터져 나왔고, ‘대왕고래 같습니다!’ 그녀의 말은 그날의 뉴스 자막에 이어 이튿날의 신문 제목까지 장식했다.


누리꾼들은 ‘말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먼저 해라’, ‘기자가 본분 망각, 사심 분출’, ‘귀엽다.’ 같은 말들을 쏟아냈고, 그 후 인터넷 공간에서는 ‘대왕고래 사부님’이란 말이 파다히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