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제1장 악연(惡緣) - 인사동, 그들의 금요일
인사동, 그들의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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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그들의 금요일
인사동, 그들의 금요일남님
인사동, 그들의 금요일/악연/천재 물리학도 이성학/운명을 선택하다/
불운한 사건/길 교수의 옛친구/교적(敎赤)/공작의 기획자들/
광장은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8년 전, 2008년 5월 9일]
서울행 고속버스가 음성 톨게이트를 통과하여 중부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좌석의 반가량이 빈 버스에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맨 뒤 좌석에 혼자 떨어져 앉아 있다.
청년은 신록으로 물든 창밖 풍경을 외면한 채 눈을 깊이 눌러 감았다. 여전히 그 암녹색 숫자는 눈꺼풀 안에서 물에 뜬 기름방울처럼 뱅글거렸다. 무언가가 틀어지고 있었다. 시간, 감각,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예감까지···
시작은 닷새 전 월요일 새벽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올려다보았다.
‘04:54’
정각 5시보다 6분 이른 기상. 수십 년 동안 어김없이 지켜온 수면 리듬에 균열이 생겼다.
그에게는 밤 11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5시 정각에 눈을 뜨는 수면 패턴이 몸에 배어 있었다. 오차가 나더라도 기껏해야 30초 남짓. 그런데 지난 일요일, 서울에서 돌아온 뒤부터 닷새째 기상 시간이 매번 6분씩 어긋났다. 이 오차는 단순한 피로 때문일까, 아니면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전조일까? 생각하며 몇 번이고 그 낯선 숫자를 올려다보았다.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한 그는 전철을 타고 안국역에 내렸다. 북인사마당에서 인사동길로 접어들면 예인의 향기가 안개처럼 자욱이 껴있다. 화랑, 갤러리, 공예방 그리고 전통 차 냄새, 그 이색적인 골목길을 따라 동지는 ‘일묵서예’를 향해 걸어간다. 이 길을 매주 금요일 오후에 들어와 일요일 오후에 되돌아 나온 지는 넉 달쯤 되었다.
그는 미색 면바지에 상의는 단추 달린 검정 셔츠를 입고, 허름한 배낭을 어깨에 메고 다닌다. 그의 걸음걸이는 워낙 간결하고 고요해서 포석을 밟는 발끝에 소리라고는 없다. 마치 발아래에서 어떤 부상력이 작용하여 몸무게의 반쯤을 떠받쳐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시선은 늘 눈앞 삼십 보쯤을 바라보고 걷는다. 그가 인사동길로 들어서면 갓길의 노점 상인 중 몇몇은 그를 알아보고, ‘오, 저 청년이 오는군.’ 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동지는 우정국로 쪽 언덕배기를 향해 걸으며 사흘 동안 이곳에서 할 일들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넉 달 동안 매주 금요일마다 반복해 온 똑같은 일상이지만, 오늘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고등학교 동창생 한 사람과 만날 약속이 잡혀있고, 그것은 그에게 매우 이례적이고 특별했다.
[일묵서예]
네 칸짜리 목조 단층 건물 중간에 두 쪽의 자그마한 여닫이 현관문을 내고, 그 위에 휴먼옛체로 ‘일묵서예’라고 새긴 통나무 현판을 걸어 놓았다.
지선과 그녀의 일곱 살 난 아들과 두 청년은 현관 앞 야트막한 계단 아래서 그들의 스승을 기다렸다.
골목 어귀에 그가 보이자 지선은 한껏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다.
“아, 저기 오셔요.”
네 사람은 자세를 가다듬고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고개 숙여 인사한다.
“잘 계셨습니까? 동해도 잘 있었어?”
동지는 지선에게 미소로 답하며, 아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는다. 그리고 동갑내기 두 청년 제자의 어깨를 차례로 토닥여 준다. 넉 달째, 금요일 오후면 이곳에서 치러지는 작은 행사였다.
‘일묵서예’ 안채의 2층 수련실, 반가부좌로 앉은 스승 앞에 세 제자가 나란히 반가부좌로 앉아 있다. 세상과 한 발 떨어진 작은 공간, 이곳에서 그는 매주 2박 3일간 제자들을 만나 특별한 수련을 지도한다. 이들이 수련에 열중하는 동안 아래층 주방에서는 지선이 이들을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재희는 서둘러 책상을 정리하고 교무실을 나섰다. 진 바지에 흰색 라운드넥 티셔츠, 그 위에 연한 하늘색 오버핏 롱코트를 걸쳤다. 일부러 꾸민 티가 나지 않으면서도 트렌디한 세련미가 은은히 드러나야 했다.
그녀는 전철에 몸을 싣는 순간부터 기억 속 오래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누르고, 혼자만의 드라마 속으로 빠져든다. 방배역에서 안국역 사이 열네 개 역을 거치는 지하 통로는 그녀를 과거로 데려가는 터널이 된다.
열아홉 해 전 어느 늦가을 오후, 음성 농장 ‘목련당’의 거실에는 한 비구니와 두 여인이 앉아 있었다. 뜰에는 단풍 든 나뭇잎이 흘러내리고, 거실의 세 여인은 숨을 죽인 채 현관문 쪽을 바라본다.
그때, 한 여인이 어린 소년의 손을 잡고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고, 바로 그 순간, 나의 어머니 전희경 여사의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아이’라는 말이 폭죽을 터트렸다고 한다.
엄마의 그 ‘아름다운 아이’는 이제 ‘God’이란 별명을 가진 아름답고 신비로운 남자로 바뀌어 있다.
이듬해부터 엄마는 내가 방학을 맞으면 나를 데리고 음성 농장을 방문했다. 내가 처음 소년을 만난 때는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이었고, 소년은 중학교 1학년이었다.
진국 아저씨와 인경 아주머니는 금세 나와 사랑에 빠지셨다. 나 역시 키가 큰 진국 아저씨와 커피색 생활한복을 즐겨 입는 인경 아주머니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소년과는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나는 그를 ‘오빠’라 부르며 다가가 보려 했지만, 그는 내게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재희가 전철을 타고 인사동을 향해 가는 동안, 동지는 제자들과의 수련을 마치고 잠시 노인 몇 사람의 뻣뻣한 몸을 풀어주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서예 수강생 중 금요일 오후 수업에 출석하는 길 태선 교수와 몇몇 노인이었다.
재희는 서예 수강생들의 휴게실인 '일묵 다실'에서 동지의 두 청년 제자와 시간을 보내다가, 노인들의 요가 수업이 끝날 즈음 그가 쉬고 있을 옥상 움막 쉼터로 올라간다. 곧 마주할 연인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그녀의 걸음은 절로 빨라진다.
“어서 와!”
동지는 익숙한 환한 미소로 그녀를 반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늘 그렇듯,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마음 한구석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재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와 마주 앉는다.
“오빠, 오늘 저녁은 함께 못할 것 같아요.”
“왜, 무슨 일이 있어?”
그녀는 ‘저기’하며 눈으로 광화문광장 쪽을 가리켰다.
“아이들과 약속이 있어요. 미국산 쇠고기 반대 시위에 가자고 졸라대서, 저기서 아이들 만나 밥 사주기로 했거든.”
“아, 그 촛불시위 말이지? 밤이면 저 너머가 아주 굉장하더라.”
“근데,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
"아니에요, 오빠가 관심 가질 일은 아닌 것 같아.”
재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을 거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