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유령

(3회) 제1장 악연(惡緣) - 악연(1)

by 해암

악연(惡緣)





창수는 광화문광장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필요한 메모를 한 뒤 인사동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연락이 끊겼던 친구의 전화를 받고, 오늘 오후에 인사동길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묵서예’라고 쓴 현판을 확인하고 현관문을 열려는데, 안에서 한 여자가 문을 밀고 나왔다. 그 여자를 보는 순간, 그는 오랜만에 흉곽이 조여드는 듯한 긴장감을 맛보았다.

‘저 정도면 목숨 걸어도 좋겠다!’ 첫눈에 감격하는 여자를 볼 때면 그가 속으로 하는 말버릇이었다. 창수는 그 놀라운 여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섰다가 그녀가 골목길을 돌아나가 보이지 않고서야 현관문을 열었다.


‘일묵서예’와 안채 사이의 작은 화단 앞에서 방문객인 듯한 사람과 얘기를 나누던 젊은 여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니, 여기가 도대체 뭐 하는 곳이지?’ 창수는 또 한 번 놀랐다.

“저, 여기서 정 동지라는 사람과 만나기로 했습니다만···” 말하는 사이 빠르게 숨이 가빠왔다.


“아, 네! 손님이 오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옥상에 계실 텐데···”

지선이 안채 쪽을 돌아보는데, 이 층 수련관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현서가 보였다.


“아, 현서 씨! 여기 손님 선생님께 좀 모셔다드릴래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창수는 현서라 불린 여자를 보고 또다시 움찔했다. ‘이 동네 정말 이상한 곳이네. 그리고 얘는 어디서 본 듯해. 아, 그렇지! 태권도 선수, 금메달리스트잖아.’


현서를 따라 옥상 계단을 밟으며 창수는 무엇 때문인지 어제저녁 전화로 아버지가 한 말을 떠올렸다. ‘너도 이제 장가갈 생각을 해야 하잖느냐. 마땅한 여자가 없는 게냐?’

아버지의 말투에는, 좋은 대학을 나와 메이저 신문사의 기자로 일하는 아들이 뭣 때문에 마땅한 며느릿감을 못 데려오는지 모르겠다는 심사가 비쳐 나왔다.


옥상 쉼터에서 동지는 창수를 기다렸다. 예상은 했지만, 10년 만에 만난 고교 친구에게서 옛 얼굴을 찾아내는 데는 피차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딴 사람처럼 변해있는 서로에게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을 때, 현서가 쟁반에 찻잔 둘을 받쳐 들고 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동지가 호주머니에서 메모지 한 장을 꺼내 찻잔 앞에 밀어놓으며 말했다.

“이 사람에 대해 좀 알아봐 줄 수 있을까?”


‘D 중학교, 역사 선생’

메모지에는 볼펜으로 쓴 어떤 사람의 간단하고도 모호한 신상정보가 적혀 있었다.


“이름은 몰라?”

‘10년 만에 보는 친구에게 다짜고짜 이런 부탁부터 꺼내다니···’ 생각하며 창수가 물었다.


“그 학교에 윤재희라는 국어 선생님이 계셔, 그 사람과 그 역사 선생 사이에 다툼이 있었는데, 서울 교육청에서 문제로 삼고 있나 봐. 그래서 그 다툼의 원인이 뭔지,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를 알고 싶어. 그 사람 집 주소나 전화번호도 함께.”


“윤재희 씨는 여선생이겠군?”


“응, 그래. 다음 주 금요일 오후에 괜찮겠어? 난 오후 3시면 여기에 도착해.”


창수는 동지가 그걸 파악하는 이유라든지 윤재희란 여선생과 그와의 관계 등이 궁금했지만, 동지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고 그는 묻지 못했다.


일묵서예를 나와 광화문광장으로 걸어가는 창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서울에서 알아주는 대학을 나온 그가 지방의 한의대를 중퇴한 고교 동창생 앞에서 그토록 주눅이 든 걸 생각하면 기분이 더럽기까지 했다.

거기다, 오랜만에 고교 친구를 만나 부탁받고 차 한 잔이 다였다. 저 인간은 나를 뭐로 보는 걸까? 생각할수록 점점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그곳의 몇 사람과 저녁을 함께 먹어야 한다며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그 말이 오히려 더 큰 모멸감을 안겨주었다.


며칠 후, 창수는 D중학교 앞 이디야 커피숍에서 그 학교 영어 교사인 구현영을 만났다.


“기사로 쓰는 거 아니죠?” 그는 입꼬리에 장난기 섞인 미소를 그리며 창수를 쳐다봤다.


“물론입니다. 약속드렸잖습니까?”


“기자 분들 말씀 믿어도 될까요?”


“대단한 특종일 때야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필요 때문입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놓으며 입을 뗐다.

“발단은 윤샘이 먼저 시작한 거 같아요. 박일수 샘에게 우리 역사를 왜곡해서 가르친다며 따졌다는 겁니다. 도를 넘은 거죠.”


“우리 역사를 어떻게 가르쳤는데요?”


“잘은 모르죠. 그러나 평소에 박샘이 하는 얘기로 짐작해 보면 이렇습니다. ‘진실을 제대로 알고 보면 6.25는 남침이 아니다. 많은 국민은 미국이 우리를 지켜줬다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도 속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미국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의 분단을 유도한 거다. 우리는 아직 진정한 해방을 맞이한 게 아니다. 우리가 진정한 독립 국가로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미래의 주인인 학생들이 이런 역사의 진실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뭐 이런 내용들인데, 짐작이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로 기분 나쁜 말들이 오갔겠죠. 절충이나 타협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니까요.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박샘이 윤샘의 목을 졸랐고, 그 일로 박샘은 시 교육청 징계위에 넘겨진 겁니다.”


“아무리 언쟁을 벌였더라도 여성의 목을 왜 졸랐을까요?”


“흘러나오는 말로는 박샘이 윤샘에게서 참기 어려운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고 해요.”


“모욕적인 어떤 말을 했을까요, 윤샘이?”


“그건 모르겠어요. 박샘도 그런 말은 입 밖에 내기가 싫겠죠.”


“심한 말을 들었다 치더라도 여성의 목을 졸랐다는 건 얘기가 좀 비약된 느낌이군요.”


“말이란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매우 다른 효과를 낼 수도 있거든요. 개인의 역린이랄까, 뭐 그런 게 있잖습니까?


“하기는···”


“윤샘도 그냥 모욕적인 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고, 이것 역시 흘러나온 말이지만, 박샘이 윤샘에게 이상한 짓을 시도했다는 말이 있어요. 방과 후 시간에, 교실에는 단 두 사람만 있었다니까요.”


말해놓고 그는 놀란 기색을 하며 얼른 다짐을 두었다.

“이거 쓰면 안 돼요. 큰일 납니다!”


“맹세합니다. 절대!” 창수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이 보이게 치켜세웠다.


그러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박샘은 윤샘을 좋아했거든요. 말이 안 되지만.”


“그 윤샘이란 분이 아주 대단한 분인가 봅니다?”


“아실 텐데요, 왜. 재작년 G신문사의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된 윤재희 씨, 언론에서도 많이 떠들었는데요. 탤런트 중에서도 그만한 미모가 없다고 난리였잖아요?”


‘그래, 맞아! 그 여자였어!’ 그제야 선명히 떠오르는 한 여자의 얼굴, 일묵서예의 현관문 앞에서 스쳤던 바로 그 여자였다. 퍼즐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날은 왜 기억나지 않았을까? 의아해하는데 그가 다시 입을 뗐다.

“근데 이 정도는 재미있는 얘기도 아니에요, 사실은.”


“네? 뭐 다른 쇼킹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사실 이 얘기는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하는 김에 다 할게요.” 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데, 흐흐!, 혹시 이성학이란 이름을 기억하세요?”


“이성학··· 알 것 같은데요. 모르면 안 되죠. 얼마 전에 대략 한 달 일정으로 귀국했다고 보도됐었죠.”


“맞아요. 근데 재밌는 건 그분이 우리 학교에 나타났거든요, 갑자기. 그리고 흐흐!” 그는 다시 웃었다.


“그분이 왜요?”


“그분이 글쎄, 교무실로 들어와서는 박 아무개 선생이 누군지 확인하더니 다짜고짜 박샘의 멱살을 잡고는 조르기 자세로 들어가는 거예요. 거의 이성을 잃고서.”


“왜요, 무슨 일이죠?”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그 유명한 분이 귀국하자마자 서울시 교육청에 근무하는 친구에게서 윤샘 사건에 대해 들었나 봐요. 친구 사이니까 우리가 모르는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도 들었겠죠. 그래서 그 소동을 벌였다는 겁니다. 오직 연구실밖에 모르는 한 과학자의 또 다른 일면이죠. 참 순수하고, 귀엽지 않으세요?”


“아니 그분과 윤재희 선생은 어떤 관계인데요?”


“모르죠, 자세한 건··· 왜겠어요? 윤샘과 그런 사이 말고 다른 해석이나 추리가 가능하세요?”


그렇게 되묻고는 이어서 말했다.

“윤샘도 갑작스러웠나 봐요. 엄청 창피한 얼굴을 하고는, 저에게 말려달라고 눈짓을 보내기에 제가 뜯어말렸죠. 안 그랬으면, 아마 둘 다 코피 터졌을 겁니다. 박샘도 보통 깡다구가 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폭행죄로 고소해서 집어넣겠대요. 아는 변호사와 연락해서 준비하나 봐요.”


창수는 혼란스러웠다. 왜 동지가 아닌 이성학일까. 그들 세 사람의 관계는 무엇일까.




[다음 주 금요일 오후]


‘일묵 서예’의 안채 옥상에서 동지와 창수가 마주 앉았다. 창수의 말을 듣는 동안 동지는 반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거나 가끔 찻잔을 들어 입에 댔다.


“6.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문제와, 분단의 원인에 대해 잘못 가르친다며 따졌다는 거구나, 윤 선생이?” 동지가 물었다.


창수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자, 동지가 다시 물었다.

“그 문제에 대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해방 후 38선을 경계로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진 뒤, 남과 북은 곳곳에서 충돌이 잦았거든. 그 혼돈 속에서 작은 국지전이 확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 아니겠나. 일방적으로 남침이라고 얘기하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좀 그래. 그리고 분단의 원인이야 당연히 미국에 있다고 봐야겠지. 미·일 간의 가스라·태프트 밀약에 따라 미국은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하는 걸 묵인함으로써 분단의 근본 원인을 제공했잖아.”


거기까지 얘기한 뒤, 창수는 뜨악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이런 거 우리도 다 배웠는데?”


“그렇긴 한데··· 내겐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스승님이 계셨거든. 그분의 말씀은 좀 달랐어.”


창수는 미간을 모으고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2차대전 중에 소련을 한반도로 불러들인 것도 미국이었고, 38도 선을 그어서 미군과 소련군 사이에 경계를 지은 것도 미국인 건 틀림없잖아. 그리고, 교사들끼리 영역 간섭을 하는 건 아니라고 봐. 그 역사 선생으로서는 당연히 자존심 상했겠지. 누구라도 그건 기분 나쁜 일일 테니까.”

창수는 그렇게 대답을 마쳤다.


“응, 그래.” 동지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로 대답하고는 빈 찻잔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때 창수가 불쑥 말했다.

“혹시 이성학 박사라고 알아?”


“····”


“젊은 천재 물리학자지. 장차 한국에서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면 그 사람이 제일 먼저라고들 하잖아?”


“알고 있어. 갑자기 그분은 왜?”


“윤재희 선생과 가까운 사인가 봐. 학교를 찾아와서 그 역사 선생에게 폭행을 가했다는군.”


“그분 미국에 계실 텐데?”


“얼마 전에 대략 한 달 일정으로 귀국했거든. 언론에서 크게 다뤘는데?”


“그런데 무슨 이유로 그분이 그 역사 선생을 폭행해?”

동지는 천천히 의자에서 등을 뗐다.


“윤재희 선생을 괴롭혔다는 게 이유였나 봐.”


“그분이 윤 선생 일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런 일은 당사자가 알리지 않고는 알기가 어렵지 않을까?”

그 말을 하며 창수는 통나무 테이블 위에 검지를 세워 무슨 글자인가를 휘갈겨 썼다.




박일수는 윤재희 선생과 얽힌 일로 어제와 오늘 두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두 번째의 전화를 받은 건 오늘, 일요일 오전 아홉 시쯤이었다.

“박일수 선생님이죠? 윤재희 선생의 일로 잠시 만나고 싶습니다. 오후 다섯 시에 아파트 앞으로 가겠습니다.”

상대는 자기소개를 생략한 채 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용건만을 말했다.


“전화하신 분은 누구시죠?”


“윤재희 선생님과 잘 아는 사이로 해두겠습니다.”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내가 왜 윤 선생 일로 그쪽을 만나야 합니까?” 다시 물었다.


“만나는 편이 박 선생님께 이롭기 때문입니다. 길게 볼 때.”

역시 아리송한 대답이 돌아왔다.


박일수는 시곗바늘이 다섯 시를 가리키고서야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며, ‘당장은 이롭지 않다는 거네?’하고 중얼거렸다.


작가의 이전글관악산 유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