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제1장 악연(惡緣) - 악연(2)
아파트 앞 쥐똥나무 울타리 곁에서 박일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동지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재희는 그 일을 왜 내게 말하지 않았을까? 난 재희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서야 그 일을 알았다. 그러나 이성학 박사는 먼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창수는 말했다. 그런 일은 본인이 알리지 않는 한 알기가 어렵다고.'
동지는 자신이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자기 앞에 정체 모를 뭔가가 다가와 서있는 듯한 불길함을 느꼈다. 거기다, ‘그 아이가 네 곁에 없다면?’하고 묻던 아버지의 말까지 합세하여 혼란한 마음을 흔들어댔다.
2주 전 주말, 서울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진국이 말했다.
“재희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냐? 재희 같은 아이는 흔치 않아. 완벽한 아이야!”
“네, 압니다. 언젠가는 재희와 결혼할 겁니다.” 동지는 말을 끝내고 싶었다.
그때 아버지가 문제의 그 말을 툭 던졌다.
“그 언젠가에 그 아이가 네 곁에 없다면?”
동지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왜 재희는 당연히 내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까? 자문해 보았지만, 대답은 떠오르지 않은 채 아버지의 그 말만이 귓가에 맴돌며 그의 의식 공간을 휘저었다. 그 이튿날부터 아침에 눈 뜨는 시간이 어긋나기 시작했고, '04:54'란 암녹색 숫자가 머릿속에 들어와 박혔다.
박일수가 보기에, 등짝에 허름한 배낭을 걸치고 쥐똥나무 곁에 서 있는 사내는 자기보다 10년쯤 어려 보였다. 하지만, 몸가짐이 매우 정돈되고 꾹 다문 입매에서 선의와 교양이 엿보였다. 그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그에게로 다가갔다.
동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박 선생님이십니까?”
“네, 그런데요?”
“저는 정동지라고 합니다.”
동지는 이름만 밝힌 뒤, 단도직입으로 용건을 말했다. 상대에게 예의를 차리고 싶지 않다는 걸 분명히 드러내 보이는 태도였다.
“그쪽이 윤 선생에게 한 행동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일로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는 알 바가 아니지만, 윤 선생이 입은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고, 그래서 그쪽이 해줘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박일수의 표정이 서서히 구겨지는 동안 동지는 할 말을 계속했다.
”먼저, 내일 출근하면 윤 선생에게 진심으로 사죄하세요.”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요? 당신이 윤 선생 애인이라도 돼?” 박일수가 말을 끊고 나왔다.
“난 윤 선생을 화나게 하는 사람은 용서 못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성학 박사를 괴롭히지 마세요. 당신이 한 행동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니, 뭐 이런 개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마침내 박일수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당신, 공갈 협박으로 고소하겠어. 이런 씨팔놈의 경우가··· 그리고 당신 솔직히 윤 선생 애인도 아니잖아. 당신도 알고 있네!”
박일수는 동지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지의 미간에 세로줄이 그려졌고, 얼굴은 서서히 붉은빛으로 변해갔다.
동지가 한 손을 뻗어 박의 목덜미를 잡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박은 말이 목에 걸린 채 맥없이 목이 꺾였고, 목을 움켜쥐는 악력의 무게와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끼는 순간 저항할 수 없는 상대란 걸 직감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지금껏 당신이 처음이오.”
동지는 한 손으로 악수하듯 박의 손을 잡고, 목을 눌렀던 손으로 그의 등짝과 옆구리 몇 곳을 쿡쿡 찔렀다. 그런 다음 악수한 손에 서서히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통증을 느낄 때 사람은 대개 입을 딱 벌리거나 이빨을 악다물며 앓는 소리를 토해낸다. 그러나 박은 입을 벌리지도 다물지도 못한 채 무릎을 푹 꺾었다. 통증을 표현할 기운은 고사하고 숨마저 쉬어지지 않았다.
박에게는 긴 시간이었으나, 실제로는 대략 삼십 초 남짓 후에, 동지는 박의 손을 놓고 그를 쥐똥나무 앞 벤치에 끌어 앉혔다.
한 사람이 죽음의 문턱을 밟고 돌아오는 사이 몇 사람이 아파트를 드나들었지만, 그 일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할 말이 더 있지만 그만두겠소.”
그 말을 남기고 동지는 그곳을 떠났다.
박은 대략 십 분쯤 더 벤치에 엎드려 있다가 집으로 들어와,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누웠다. 멍하니 천정을 향해 누웠다가, 그는 다시 턱을 덜덜 떨며 울었다. 아무도 모르는, 오직 자신만이 아는 지독한 고통의 기억이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생생한 현실처럼 그를 몸서리치게 했다.
한참 후, 그는 실성한 듯이 중얼거렸다. ‘너희 둘··· 너희 둘을 내가 언제까지나 지켜볼 거야!’
이틀 전, 창수가 ‘일묵서예’를 다녀간 뒤, 동지는 길태선 교수를 옥상 움막으로 초대해, 6.25 전쟁의 발단과 한반도의 분단 원인에 관해 물었다. 재희와 그 역사 선생 중 누가 옳은지를 저명한 교수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길 교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한반도 분단의 뿌리를 따지고 들어가면 그 밑바닥에 일본이 있다는 건 사실이에요. 2차대전 당시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까닭에 연합군이 한반도에 진주할 명분을 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오늘날처럼 분단이 고착된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얘기가 좀 복잡합니다.”
교수의 설명은 십 분 가까이 이어졌다. 교수의 말은 냉정하고, 구체적이며, 비장하기까지 했다.
“먼저 6.25 전쟁을 누가 일으켰느냐, 북침이냐, 남침이냐에 대한 물음은, 이미 예전에 결론 난 문제로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소련이 당시의 비밀 문건을 공개하여 치밀한 계획하에 실행한 남침임을 확인해 주었고, 심지어는 김일성마저 생전에 자신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실토한 적이 있어요. 그 밖에도 증거는 차고 넘쳐요. 우스운 얘기지만, 만약 남에서 북으로 쳐들어갔다면 1950년 6월 25일, 그 일요일 전야에 왜 남한의 병사들에게 외박을 허락하고, 고위 지휘관들은 육군본부에 모여서 파티를 즐겼겠습니까. 입에 올릴만한 가치가 없는 문제지요.
다만 분단의 책임 문제는, 극히 중립적인 관점에서, 미국과 소련의 공동책임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두 강대국 간 지정학적 욕망이 충돌한 결과로 봐야 할 테니까요.”
교수는 ‘태평양 전쟁’의 끝 무렵에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후의 경과를 영화의 한 장면처럼 풀어나갔다.
“소련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한반도를 공산화할 목적으로 참전했던 겁니다. 그들은 38도 선이 그어지자마자 바로 남북을 연결하는 철도와 도로부터 끊고, 전화와 우편 교환까지 단절합니다. 38도선 이북 지역을 철저히 봉쇄한 거지요. 미국이 38도선을 그은 의미는 일본군 무장해제를 분담하기 위한 경계선이었는데, 소련은 그 경계선이 그어지자 곧바로 그것을 분단선으로 굳히기에 들어간 것이지요.”
“태평양 전쟁은 원래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잖습니까?”
교수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에 동지가 물었다.
“그렇지요. 그러나 전쟁에 지친 미국은 만주에 주둔한 일본 군을 가까운 소련이 제압해 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소련 역시 유럽 전선에서 지쳐 있던 때라 미국의 요구를 무시했는데, 원자탄이 투하되고 일본이 항복할 기미를 보이자, 그제야 극동에서의 지정학적 이권을 챙기기 위해 부랴부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뿐만이 아니라 한반도에까지 밀고 내려온 겁니다.”
동지는 조용히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뒤늦게 미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소련은 협상 테이블에 나와 한반도의 미래를 의논하는 척했지만, 뒤로는 38도선 이북 지역에 공산국가를 세우는 작업을 빠르게 진행합니다. 단 2개월 만인 10월에 전광석화처럼 김일성을 위성국가의 수장으로 등장시켰고, 4개월 후인 이듬해 1946년 2월에는 정부 기능을 하는 ‘임시인민위원회’란 걸 구성하지요. 그러고는 헌법과 법률까지 제정하여 38도선 이북의 사유재산을 몰수합니다.
그 일련의 과정은 동유럽 국가들에서 이미 진행 중인 것의 답습에 지나지 않았어요. 3개월 먼저, 1945년 5월7일 나치 독일이 항복한 유럽에서는, 전쟁 중 소련이 점령한 동부 독일을 비롯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에서 이미 똑같은 방법으로 공산화 작업이 진행 중이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군이 발자국을 찍었던 나라는 하나 예외 없이 공산화되었고, 그 외에도 국제 공산당 코민테른의 공작과 지원으로 중국, 몽골, 베트남, 쿠바 등 여러 나라가 비슷한 시기에 공산화되었지요.”
“그때 남쪽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동지가 물었다.
“38선 이북에서 빠르게 국가의 면모를 갖추어나가는 동안, 남쪽의 미군정은 준동하는 남로당과 공산주의자들에 대처하기에도 역부족이었고, 그런 와중에 김구와 김규식 등은 사사건건 이승만의 발목을 잡으며 김일성에게 협력하고 있었어요.
결국, 한반도에서는 38도선을 경계로 두 개의 다른 정부가 수립되었고, 2년 후 소련과 김일성은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지요.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분단은 고착되어 온 겁니다.”
“그렇다면 분단의 책임은 소련과 북한 정부에 있지 않습니까?”
동지가 물었고, 교수는 조용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 사범처럼 한반도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소련에 책임을 묻고 싶어 하고, 반대로 한반도가 공산 사회주의 국가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미국에 책임을 전가합니다. 과연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교수가 말을 마치자, 동지는 다시 물었다.
“6.25 전쟁처럼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가르친다고 학생들이 믿을까요?”
“명백하더라도 그 증거 자료에 접근하거나, 그 자료들을 소비하는 국민은 많지 않습니다. 관심도 부족해요. 그리고 사람들은 ‘숨겨진 진실’이라며 귓속말로 속삭일 때 쉽게 현혹되니까요.”
“그렇다면 역사를 왜곡하여 가르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역사를 사실대로 가르쳐서는 반미를 못 하고, 반미를 못 하고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어린 학생들을 세뇌하여 미래의 우군을 확보하기 위함이지요.”
말을 마친 교수의 얼굴에 진한 노여움이 번져 나왔다. 그의 말에는 단순한 학자의 견해를 넘어선 깊은 우려가 담겨 있었고, 오래 묻어둔 개인사를 고백하듯 한 절절함마저 엿보였다.
교수는 동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역사 왜곡은 비단 6.25 전쟁이나 분단 과정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의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언젠가는 이 일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크게 요동칠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그런 날에 대비해 정 사범 같은 젊고 유능한 분이 큰 역할을 해주셔야 할 텐데···”
동지가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교수는 재희의 일을 소환했다.
“윤재희 선생께서 그 역사 선생의 잘못을 문제 삼은 것도 그녀의 남다른 소명 의식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믿어요.”
동지가 대답했다.
“저 같은 사람이 어찌··· 그리고 저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짐작은 합니다만, 정 사범의 삶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무극권을 깊이 수련하여 십성(十成)을 이루는 것, 그리고 무극권을 널리 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스승님에게서 받은 사명(師命)이자 제가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이라 믿습니다.” 교수의 물음에 동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십성이라··· 그렇다면 정 사범의 성취는 지금 어느 수준에 계시는지요?”
“생전에 스승님께서는 일차 목표를 칠성에 두라 하셨는데, 거기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우리 같은 사람은 짐작 못 하는 경계지만, 꼭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길 교수의 얼굴에 가식 없는 기쁨이 가득 뿜어 나왔다. 그의 동지를 아끼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었고, 동지 또한 교수의 마음을 짐작했다.
[일묵 다실]
창수는 인사동에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동지가 있는 안채와는 거리를 둔 채 ‘일묵 다실’에서 커널 문과 배흥수의 자리에 껴들거나, 가끔 집주인 지선과 얘기를 나누다가 돌아가곤 했다. 원로 교수인 길태선에게는 인사만 깍듯이 하는 형편이었고, 재희와는 어쩌다 마주치더라도 왠지 말을 건네기가 어려운 그였다.
커널 문은 퇴역한 육군 대령으로 이름이 문장석이었고, 배흥수는 서울에서 요식업을 크게 하다가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사업가로, 커널 문보다 두 살 아래였다. 두 사람은 길 교수와 함께 화요일과 금요일에 서예 수업을 받았다.
“윤재희 씨와 동지는 연인 사이가 맞습니까?” 어느 날 지선에게 창수가 물었다.
“아닌 것 같으세요?” 지선이 눈을 좁혀 떴다.
“물론, 윤 선생께서 주말마다 여기를 왜 오겠습니까마는,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엔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거든요. 정말 연인관계라면 말입니다.”
“특별한 분이지 않습니까. 정 선생님께서는.”
창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선을 쳐다보며 말했다.
“선생님은 정말 미인이십니다.”
지선은 창수의 말에 대답 대신 작은 미소만을 보였다.
창수의 시선은 일묵서예의 세 여자를 저도 모르게 쫓고 있었다.
그는 재희를 볼 때면 생각했다. ‘윤재희, 저 여자는 어쩌면 저토록 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모든 게 적당할까?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곧은 자세, 단정한 이목구비까지 하나같이 예쁘고 조화롭다. 얼굴엔 늘 엷게 번진 색소처럼 미소가 배어 있고, 그 미소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하지만 때론 남자의 속을 사정없이 휘저어 놓기도 해.’
재희 곁의 두 남자, 이성학 박사와 동지는 창수에게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 스팩만 본다면 동지에게 밀릴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는 동지 앞에 서면 정체 모를 위압감에 짓눌려 눈을 맞추기도 어렵다. 그 간극은 이미 학창 시절부터 굳어져 있었다.
창수의 눈에, 지선 역시 보기 드문 여자였다. 그녀는 미혼모라는 핸디캡을 가졌음에도, 그로 인해 남자에 대한 눈높이를 하향 조정할 이유가 없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였다. 동시에, 안개 속을 걷는 듯한 오묘한 아우라를 지녀 자칫 그 속에서 길을 잃고 말 것 같은 신비한 분위기도 풍겼다.
현서 역시 균형 잡힌 몸매에 웃는 모습과 맑은 눈이 무척 예쁘다. 그리고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여자다. 하지만 그녀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덩치로만 볼 때 동지보다도 더 완강해 보이는, 사내가 눈에 거슬렸다.
“유 현서와 저 동갑내기 하키 선수는 연애하는 사일까요?” 어느 날 배흥수에게 물었다.
“글쎄, 그럴까요? 그 사람도 사람은 남자답게 생겼지. 현서를 좋아하는 것도 틀림없어 보이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때와 장소가 좋지는 않아요.”
“천시와 지리가 안 맞는다는 거네.” 커널 문이 흥수를 쳐다보며 웃었다.
“말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말하지요." 배흥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기 안채 정 사범 말이오. 내가 볼 때 어떤 여자든 저 사람을 보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거요. 외모 같은 건 논외로 치더라도, 저분이 가진 신비한 매력은 보통의 남자들과는 클래스가 달라요. 자존감이 높은 여자라면, 한 번 사는 인생을 저런 남자에게 몰빵해 보고 싶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거든. 남자인 내가 볼 때도.”
창수를 형편없이 왜소한 존재로 밀어내버리는 말이었다. 그의 말은 ‘여기 미인들이 많지만, 그대가 낄 자리는 없을 테니 꿈을 깨는 게 현명해. 마음 다치기 딱 좋은 구도야.’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창수는 커널 문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