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유령

(5회) 제1장 악연(惡緣) - 천재 물리학도 이성학

by 해암

천재 물리학도 이성학





박일수가 학교를 떠난 뒤 재희의 일상은 다시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오후 첫 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우편물을 챙기며 입으로는 무슨 노래인가를 흥얼거렸다.


우편물은 그녀가 가입한 장학재단의 보고서와 문단에서 보낸 월간지에 청첩장으로 보이는 봉투 하나가 껴있었다. 누가 결혼하나보다 생각하며 발신인을 보는데, 뜻밖에도 ‘이성학’이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봉투 속에는, 이성학 박사가 미국 유학 중 짬짬이 그린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를 연다는 말과 함께, H고등학교 동문회가 주최하는 이성학 박사의 작품전시회 초대장이 들어있었다.


H고등학교 동문회관 프린스 홀의 갤러리에서 성학과 재희는 전시된 그림들 앞을 천천히 이동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재희 씨의 그분은 잘 계시는지요?”

성학은 그림에 시선을 둔 채 지나가는 소리처럼 묻고는, 대답을 듣기 전에 이어서 말했다.

“초상화는 댁으로 보내드렸습니다.”


“박사님에 대한 저의 존경심은 늘 변함이 없습니다. 가시기 전에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미국엔 언제 가시죠?” 장난기를 담은 목소리였다.


“약 열흘 후에 출국할 예정입니다. 그사이에 강연이 두 차례 있고요.”


“아, 그러시군요.”


“조만간 결혼 소식은 없나요?” 짧은 침묵 뒤에 성학이 다시 물었다.


“네, 아직은···”


“다행일까요? 결혼 소식을 들으면 슬플 것 같은데···”


“박사님의 저에 대한 우정이 부족하신 거 아닌가요?”


재희는 농담으로 받았고 성학은 웃었다.

“네? 허 허 허! 그렇군요. 우정이 부족한 건 맞겠군요.”


재희가 대학 3학년 때의 십일월이었다. 오후 강의를 마치는 시간에 맞춰 한 남학생이 문과 대 앞에서 재희를 기다렸다.

그는 매우 수줍은 얼굴이었지만 말은 직설적이었다.

“물리학과 4학년 이성학입니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재희는 이성학이란 이름이 낯익다고 생각했다.


“당황스럽겠지만 저는 재희 씨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 말을 하려고 왔습니다.”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에 힘을 실어 말했다.


‘친구가 되어 달라고?’ 웃음이 나왔다. 대학 입학 후 삼 년 동안, 그녀에게 대시해 온 남학생은 줄잡아도 열 명이 넘었다. 주변을 빙빙 돌다가 물러난 꺼벙한 친구들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역시 당황스러워하시는군요. 하지만 저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재희의 표정을 읽은 그가 말했다.


재희는 설핏 ‘시한부 삶’이란 단어를 떠올렸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저는 내년 초에 유학을 떠납니다. 그동안에 졸업논문을 마쳐야 하고 여러 가지 준비할 것도 많아서··· 하지만 저는 이대로 재희 씨와 모르는 사람으로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의 말투에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한편 비장한 결기가 비쳐 나오기도 했다.


그때야 이성학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 언론에서 특별한 천재인 그에게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한 적이 있었다. 그는 공부가 단절되는 걸 피하려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바로 군대부터 다녀왔다. 복학한 후에는 학부 3학년부터 연구실 조교 자리를 꿰찰 만큼 두각을 나타내었고, 4학년 때 ‘피지컬 리뷰 레터스(Physical Review Letters)’에 지도교수와 공동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로 인해 졸업 후 바로 프린스턴 대학의 초청 장학생 자격을 얻어 미국 유학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 이제야 기억났어요. 대단한 분이신데 제가 깜박했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재희 씨는 유명하기까지 하죠.”

비로소 그의 말에도 위트가 실렸다.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친구여야 해요. 친구만으로 좋으시다면 전 괜찮아요.”


재희는 소중한 인재인 그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은 한편 그가 희망 고문을 떠안는 상황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분명한 선을 그어두고 선택은 그에게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그녀는 한 가지 계산을 빠르게 했다. 논리적 사고에 익숙한 과학도라면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도 받아들이기가 쉬우리란 계산이었다.


“꼭 그걸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저는 좋아하는 분이 따로 있거든요.”


재희는 ‘남자 친구’란 말 대신 ‘좋아하는 분’이라 했다. 남자 친구란 말에 내포된 뭔지 모를 경박성이 싫어서 그 말을 동지에게 붙이고 싶지 않았다. 동지를 향한 그런 유의 경외심에 가까운 태도는 그와의 대화에서도 나타났다. 어릴 적부터 친 남매처럼 지낸 두 살 위의 연인에게 그녀는 쉽게 반말을 못 한다. 그만큼 그녀에게 동지의 존재는 컸다.




[재희의 집 거실]


퇴근하여 돌아온 딸에게 희경이 물었다.

“누구야?” 그녀는 눈으로 거실 한쪽에 세워 둔 딸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베스트셀러 작가의 변명이 고작 그거야? 좀 더 설득력 있는 대답은 못 찾았니?” 희경은 웃었다.


누구도 그냥 아는 사람에게 초상화를 그려서 보내지는 않는다. 재희는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한참 동안 말을 골랐지만 역시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성학의 존재를 모르는 건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재희의 대학 시절이라면 몰라도 이성학이란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뒤라면, 온갖 시시콜콜한 얘기를 다 하고 사는 모녀 사이에 이미 얘깃거리가 되어 있는 편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성학의 존재를 안 뒤에 어머니가 보일 반응이 조금은 걱정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재희가 식탁 의자에 앉자, 희경은 얼른 머그잔 두 개에 커피를 따라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딸과 마주 앉았다.


“자 이제 우리 딸의 흥미진진한 얘기를 들어볼까?”

희경은 재희가 말을 간추리는 동안 눈을 반짝이며 기다렸다.


“흥미진진한 걸 기대하신다면 아마 실망하실 거예요.”


성학에 관한 얘기는 그를 알아 온 시간에 비해 얘깃거리가 많지 않았다. 대학 삼 학년 가을에 성학이 그녀를 찾아왔던 장면을 빼면, 그 뒤는 미국에서 보내온 짧은 이메일과 세계 물리학계에서 그가 이룬 명성에 관한 얘기가 다였다. 재희는 얘기를 짧게 마무리 지었다.


“그 물리학자라면 나도 알지. 우리 딸 인기 최고네. 근데 동지도 그분을 알아?”


“언젠가 얘기했어요. 그분은 처음부터 오빠의 존재를 알구요.”


“좀 예민한 문제잖아?” 희경이 눈을 동그랗게 말아 올렸다.


“아유, 오빠를 모르세요? 꿈적도 안 해요.”


“그건 조금 다른 문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자극이 필요할지도 모르긴 하지만. 그러나 네 마음은 ‘오직’ 이겠지?”


“아니었으면 해요, 엄만?”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엄마의 기대를 못 받쳐드린 건 아니고?”


“천만에! 오해하지 마!”


뜻밖의 대답에 재희는 ‘풉!’ 하고 웃음을 뿜어냈다.


딸에게 두 남자가 있다. 한 남자는 세속의 삶과는 높은 벽을 쌓은 채 오직 스승의 사명(師命)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직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데는 관심이 없다.

다른 한 남자는 장차 노벨상이 유력시되는 저명한 물리학자다. 노벨상을 받게 되면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그를 모셔가려고 경쟁을 벌일 것이고, 그를 초빙하여 짧은 강연을 듣기 위해 깜짝 놀랄만한 대가를 제시할 것이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한두 시간 그의 강연을 듣는 데 지급하는 강연료만큼을 저축하려면 십 년쯤 짠 내를 풀풀 풍기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물리학자는 다른 한 남자와는 다르게 딸의 손이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이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런데도 엄마는 현실적인 삶과는 완벽하게 동떨어진 남자의 손을 들어준다.


“엄마도 이제 얘기해줄 때가 되지 않았어요?”


“무슨?”


“엄마의 그 ‘아름다운 남자’에 대한 비상식적이고 특별한 팬심에 대해, 아니 그 배경에 대해.”


“특별한이나 비상식적 같은 말을 둘씩이나 붙이고 싶을까?”


“응, 나로서는 그래! 엄마가 지지해 줘서 고맙긴 한데, 그래도 비상식적이고 특별한 건 사실이잖아!”


재희의 물음에 희경은 대답을 망설였다. 어쩌면 자신도 분명한 이유를 꼬집어 말하기가 어려운지도 몰랐다.


재희는 화제를 돌려 다른 걸 물었다.

“엄마, 오래전에 엄마가 대답 안 해준 건데, 오빠의 친부는 확실히 돌아가셨겠죠?”


“그러니까 진국 아저씨가 친구의 부인과 결혼한 것이 이상해 보인다는 거지? 어쩔 수가 없네, 사실은 인경 아주머니도 동지의 친모가 아니란다.”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는 나도 생각했었어요.”

재희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성인이 된 딸에게마저 그런 사실을 숨겨온 어머니의 속내만은 궁금했다.


재희는 다시 물었다.

“엄마는 동지 오빠의 친부모님들과는 어떤 관계예요?”


“동지를 낳은 엄마와 난 친구지. 친한 친구.”


“엄마 친구 누구?”


“넌 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그럼, 엄마는 동지 오빠의 친아빠도 알겠네?”


“딱 한 번 봤어, 오래전에. 이제 동지의 친부모 얘기는 그만하자꾸나.”

거기에서 희경은 입을 닫았다.


“그럼, 엄마는 동지 오빠가 갓 태어났을 때부터 봤겠네?”


“그랬지. 동지가 태어났을 때 아마 의사와 간호사 다음에 내가 봤을걸?”


놀라운 말이었다. 오빠에 대한 엄마의 팬심에 대해서도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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