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제1장 악연(惡緣) - 운명을 선택하다.
[2008년 5월 31일, 토요일]
농림수산식품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장관고시를 관보에 게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격분한 시민들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시위대는 오늘 밤 기필코 경찰의 차단선을 뚫고 청와대로 밀고 들어가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내자・적선 사거리와 동십자 사거리 방향으로 짓쳐들어갔다. 시위대는 앞을 가로막는 경찰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광장은 심란하고 위태로웠다.
재희는 광화문 앞 ‘옛 의정부터’에서, 시위대가 청와대 쪽으로 쇄도해 가는 걸 지켜보다가 인사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일묵서예는 어둠 속에서 고요했다. 재희는 일묵서예의 현관문을 들어서며 광장이 안겨준 심란함을 털어버리려는 듯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뱉었다.
문을 열고 내다보는 지선을 향해 재희는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저예요.”
“어서 오세요, 재희 씨. 오늘은 늦었네요?”
“네!”
짧게 대답하고, 조용히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오늘은 안 오나 했지.” 동지는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기다렸어요?”
재희는 숄더백을 벗어 소파 옆 작은 탁자 위에 내려놓고, 동지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2008년 5월 31일, 그날 밤의 재희는 말이 없었다.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닌 그녀였지만, 두 사람이 만날 때면 대화를 끌어나가는 쪽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길었다.
재희는 탁자를 사이로 마주 앉은 동지를 고요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저 남자의 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녀 안에 잘 갈무리되어 온 목마름이었는데, 그날 밤은 그 갈증이 유독 거친 바람으로 그녀를 휘감아왔고, 그녀는 그것에 맥을 못 추고 휘둘렸다. 그녀가 입을 닫은 채 침묵한 이유였다.
두 사람이 연인 사이란 걸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그들이 헤어질 때 나누는 짧은 포옹 정도였다.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동지도 따라 일어서고, 방문을 열기 전에 둘은 가볍게 서로를 안았다. 굳이 스킨십이라 한다면 두 사람의 볼이 살짝 닿는 정도였다.
그 단순한 의식은 두 사람의 만남을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굳어진 듯했다. 그러나 재희는 그 의식에 어딘가 이성적인 계산이 개입되었다고 느꼈다. 연인과 헤어지는 장면이 자연스럽기 위한 심리적 장치, 그녀는 은연중에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런 끝맺음이 반복될수록 그녀 안에 쌓이는 아쉬움은 점점 짙어져 갔다.
‘저 남자는 나를 갖고 싶지 않을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녀는 동지의 눈빛에서 번져 나오는 욕구를 여러 번 보았다. 그럴 때면 그는 늘 뭔지 모를 초조한 기색과 함께 무척이나 복잡한 심사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녀의 특별한 남자는 늘 자기 안의 욕구를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갈증은 점점 선명한 지향점을 향해 몸집을 키워갔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물이 제 길을 찾아 흐르듯 그 갈증에 몸을 맡겼다.
그녀의 손이 남자의 가슴을 천천히 쓰다듬고, 이윽고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온다. 그녀는 자신의 옷 속으로 들어온 남자의 손등에 손을 얹어, 격려하듯 쓰다듬으며 자신을 열어준다. 점점 남자의 손길이 대담해지고, 빠르게 임계점을 넘어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던지듯 서로를 탐한다. 오랫동안 눌러왔던 갈증이었다. 서로의 몸을 감싼 천 조각들이 벗겨져 내던져지고, 마지막 절차로 부드러운 키스를 나눈 뒤, 마침내 그녀는 남자를 받아들인다.
“언젠가는 나와 결혼할 거라고 말했다며?” 눈을 감은 채로 재희가 긴 침묵을 깨뜨렸다.
“어머니들끼리 통화하셨구나.”
재희는 천천히 일어나 동지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짧은 망설임 끝에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오빠, 나 좀 안아주지 않을래?”
동지는 천장을 응시한 채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다가 그녀를 안는 대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재희야···”
“····”
“재희야, 사실은 말이야.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은··· 미국에 계시는 이성학 박사, 그분 재희를 많이 좋아하잖아? 훌륭한 분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분에 비해 내가 재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말 두 번째란 건 기억해?” 호흡과 말이 뒤섞이며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성학의 박사학위 논문이 세계 물리학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후, 동지는 재희를 떠나보내는 편이 옳지 않을까를 고심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티끌만큼의 이기적 고려도 없는, 오직 재희의 미래만을 위한 생각이었다.
동지는 그 생각을 재희에게 말했었다.
“그 사람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말의 진의가, 재희의 미래를 위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건지 또는 그 걸출한 과학자에 대한 그녀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라는 뜻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이었다.
“무슨 뜻?” 재희가 물었다.
“재희를 위해서도, 그분을 위해서도, 모두에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빠가 뭣 때문에 그분을 위해?”
동지는 지금껏 재희에게서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서운함이나 원망, 미움을 넘어 한심하다는 심사까지 뒤섞인 복잡한 얼굴이었다.
“진심이야?”
진심이냐고 묻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 미안해, 재희야!” 동지는 급히 사과했다.
재희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미끄러져 내리고,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돌아섰다.
“재희야!”
재희는 문을 열어놓고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그러다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침묵이 무겁게 자리를 잡는 동안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농밀한 시선은 두 사람 사이 어느 공간에 정지해 있었다. 그런 상태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는 뭔가를 작정한 듯 동지의 등 뒤로 돌아가 허리를 껴안으며 등에 얼굴을 묻었다.
“또 한 번 그딴 소리 했단 봐라?”
젖은 목소리였다.
첫 번째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오늘의 재희는 달랐다.
“결국 오빠의 마음은 그만큼이었구나!”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동지를 쳐다보다가 돌아서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 좁은 마당을 건너고, 일묵서예의 현관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발걸음에 작은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동지는 자리에 앉은 채 생각했다.
‘재희야, 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어. 그 길은 되돌릴 수 없는 나의 숙명이기도 해. 그리고 너도 그분 좋아하잖아? 어쩌면 나보다도 더. 그런 거 아니니?’ 동지는 앉은 그대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재희가 동지의 방에서 나와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인기척에 두 사람이 귀를 세웠다. 한 사람은 일 층 거실의 지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묵다실의 표창수였다.
창수는 어디선가 시간을 보내다가 조금 전 일묵서예로 왔다. 이 층 동지의 방에 불이 켜진 걸 확인하고 현관문을 밀었다. 예상한 대로 문은 열려있었고, 늘 그렇듯 동지와 재희는 함께 있을 터였다.
그는 일묵다실로 들어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TV 리모컨을 눌렀다. 걸그룹 ‘쥬얼리’가 'One More Time'을 불렀다. 쫄바지를 입은 여자 넷이 몸을 비틀며 손가락을 위아래로 맞추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노래의 끝 장면이었다.
그때 탁탁 계단 밟는 소리가 들리고, 발걸음 소리가 일묵 다실 앞을 지나갔다. 곧이어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을 때 창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10:30분, 그녀가 현관문을 나간 뒤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창수는 현관문을 열었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조금 전에 연인과 사랑을 나눈 여자는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그동안 두 사람을 지켜본 창수는 그 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둘 사이에는 뭔가가 빠져 있었다. 연인 사이라면 감추려 해도 주체하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끊임없이 노출되어야 하고, 그런 징후는 주변 사람들의 눈에 저절로 읽히기 마련이다.
동지는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인지를 모르는 걸까? 아니면 여자를 피하는 마음의 병이라도 가진 걸까? 생각하며 창수는 중얼거렸다.
“차라리 화끈하게 사랑이라도 해버려라! 무슨 이유로 저런 여자를 구경만 하는 거니?”
막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인사동길은 초저녁에 비해 한산했다. ‘내가 뭐 하자고 이러는 걸까?’ 창수는 재희의 뒤를 따라가는 자신이 역겨웠다.
그는 한없는 지질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순서로, 오래 묵은 적의를 재장착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늘 자신을 무시한 채 돌아갔다. 살면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걸 얻어본 적이 없다. 자신은 ‘아웃사이더’이자 루저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연코 자신의 책임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늘 수재 소리를 들었고 서울의 알아주는 대학을 졸업한 그가 사회로부터 여러 차례 외면당한 이유는 불공정한 사회 때문이라 믿었다.
그는 H일보 사회부 기자 인양 행세하지만, 지난해 봄에,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로 기자증을 회수당했다. 그 후 한동안 백수가 되어 빈둥대다가 지금은 대학 선배의 소개로 어느 시민단체의 정보수집 파트를 맡고 있다. 그는 명함 두 개를 갖고 다니며 필요에 따라 기자와 시민단체 간부 사이를 오간다. 그의 적의와 결핍감은 일묵서예를 드나든 후 더욱 송곳처럼 그를 찔러 왔다.
평소의 재희라면 북인사마당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안국역에서 전철을 타야 한다. 그런데 오늘은 북인사마당에서 광화문 방향인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목적지가 없는 사람처럼 쓸쓸했다.
창수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왜 광화문 쪽이지?’라고 중얼거리고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