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회) 제3장 기적 - 지선의 야한 꿈
그즈음 지선은 자주 동지와 얽힌 성적인 꿈을 꾸었다. 꿈속의 동지는 지선의 의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다가왔다. 지선은 매번 강하게 저항하지만, 꿈은 그 과정을 건너뛰어 그녀가 굴복당한 건지 스스로 받아들였는지도 모호한 채 어느새 본격적인 성행위에 돌입해 있었다.
그런 꿈을 처음 꾼 시기는 동지가 서울에 상주한 후 어느 때쯤이었는데, 한동안은 뜸하다가 근래에 그 빈도가 잦아졌다. 꿈의 시작은 늘 느닷없는 폭력으로 문을 열었지만, 성행위에 이르면 두 사람은 놀랍도록 진지하게 서로를 탐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두 남자, 미국에서의 2년 동안 아이 아버지와의 관계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늘 거칠고 무정했다. 귀국 후 만난 지금의 남자와는 피차 금기를 두지 않고 쾌락을 추구하는 편이다. 그러나 꿈속에서 동지와의 사랑은 현실의 어떤 남자와도 사뭇 달랐다.
꿈은 편집이 잘못된 필름처럼 앞뒤 연결이 느슨하였으나, 어느 부분은 현실처럼 생생하고 어느 부분은 극히 몽환적이어서 꿈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기도 했다.
꿈에서 깨어난 뒤의 그녀에게는 늘 선명하게 남아있는 특별한 감각이 있었다. 그것은 꿈의 첫머리에 그가 쥐어짜듯 끌어안을 때 하복부를 무겁게 누르는 남성의 돌출이었다. 그 돌출의 무게는 꿈을 깬 후에도 그 자리에 뚜렷이 남아있었다.
지선은 꿈을 꾼 뒤면 늘 동지와 현규 모두에게 미안했다. 그런 이유로 현실 남자인 현규와 만날 때면 더욱 애쓰고 헌신하였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동지의 경우는 꿈의 전개와는 다르게, 왠지 자신이 그를 강간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죄책감과는 별개로 그녀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또 있었다. 그것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동지가 혹시라도 자신의 꿈을 꿰뚫어 보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는데, 그로 인해 한동안은 그와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의 하복부를 눌러오던 남성의 느낌이 지나치게 생생했던 나머지, 현실에서 그녀의 시선이 자꾸만 그곳으로 이끌려가는 황당한 일이었다. 그것은 틱 현상처럼 그녀의 시선을 장악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며 스스로 무섭게 질책도 해보았지만, 시선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다녔고, 그녀는 날이 갈수록 전전긍긍하며 자괴감에 시달렸다.
자신의 꿈이 그에게 간파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진정되어갔다. 그 이유는 그녀 스스로 그리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 셀프 격려를 반복하는 데 기인했다. 설령 그가 자신의 꿈을 꿰뚫어 보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둘만의 은밀한 교감일 뿐이라 여기게 되었고, 그런 생각은 그녀의 마음에 묘한 설렘마저 불러일으켜서 마치 와인을 마신 뒤 서서히 번지는 취기처럼 그녀를 달콤한 감흥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다만 제어하지 못하는 시선만은 여전히 수치스러웠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부끄러운 시선이 그에게 들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한편, 꿈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지선은 문득문득 그와 현실 부부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내면에는 그와 특별하고 내밀한 친밀감이 쌓여갔다. 그것은 그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자주 엿보였다. 공연히 그의 옷매무시를 다듬어주거나, 옷에 붙은 먼지를 떼어주는 제스처를 하게 되었고, 그의 앞에서 자칫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도 민망함이 예전처럼 야단스럽지 않게 되었다. 때로는 실내복만 걸친 채 천연덕스럽게 그와 대화를 나누거나,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정겨운 웃음을 함빡 터뜨렸다가, 이내 "미쳤어! 미쳤어!" 하며 머리를 감싸 쥐는 일이 잦았다. 그러고는 ‘같이 오래 살다 보니 편해진 거야’라고 혼자 변명하다가도, 되려 민망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다.
과거의 동지와 재희를 광화문광장에서 만나게 한 그날 밤, 동지가 재희의 요양병원으로 달려가던 시간에 지선은 꿈속에서 동지와 사랑을 나누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몸은 안락한 땀에 젖어있었다. 지선은 불현듯 동지가 궁금해져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속옷에 가운만을 걸친 채 가만히 이층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방문 앞에서 조심스레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방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 정원은 간밤에 내린 눈이 소복이 쌓였고, 동편 하늘 중간쯤에 깊은 암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노란 하현달이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이 떠 있었다.
지선은 움막 안으로 들어가 가운의 앞섶으로 가슴을 감싸안고 앉았다. 그때까지도 꿈의 여운은 살갗 속에 푸딩처럼 응고된 채 남아있어 가운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밤공기가 오히려 시원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꿈속에서 나눈 사랑의 행위를 되새김하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큼 시간이 흐르고, 깊은 생각에 몰입해 있던 그녀의 귀에 외벽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머리카락이 쭈뼛 서야 마땅한 상황임에도 그녀는 위기감이나 공포심을 느끼기 전에 막연히 인기척의 주인이 동지란 생각을 하였는데,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달빛을 등진 채 다가오는 사람은 조금 전 꿈속에서 그녀를 안았던 남자였다. 지선은 조용히 움막을 나와 다가오는 그의 앞을 막아섰다.
동지가 인사동길로 돌아온 시간은 새벽 네 시경이었다. 그 시간에 옥상에서 실내복 차림의 지선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다. 정작 놀란 사람은 그였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은 채 눈앞의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왜 옥상에 나와 계십니까?”
“지금 몇 시나 됐죠?”
지선은 머리를 흔들어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몇 시나 됐냐고 되물었다.
“네 시쯤 됐을 겁니다.”
“선생님은 이 시간에 어딜 다녀오시죠?”
“병원에 잠시 다녀오는 길입니다.”
지선은 잠자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날이 춥습니다. 들어가 주무세요.”
짧은 침묵 끝에 동지가 말했다.
그 말을 남기고 동지는 그녀 곁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밟는 소리가 멀어지고, 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기괴하리만치 고요한 새벽에 그 어떤 확률 조합으로도 상상이 안 되는 옥상에서의 조우치고는 뒤끝이 허전했다. 좀 더 시간을 들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 오히려 그편이 더 자연스럽다고 지선은 생각했다.
지선은 그의 뒷모습이 야속했다. 지금껏 그녀가 본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 그 멋진 남자는 깊은 마음의 고통을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 그 남자의 아픔과 고독이 그가 사라진 공동의 어둠 속에서 정체 모를 생명체의 촉수처럼 그녀를 휘감아왔다. 얼마간 머뭇거리며 서 있던 그녀는 무엇에 홀린듯 옥상 계단을 내려섰다.
동지는 세수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는 왜 새벽에 옥상으로 올라왔을까. 그곳에서 혼자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녀는 내가 나타날 것을 알고 기다린 사람처럼 가운을 걸친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전장에서 항복하는 군인처럼.
그러다가 생각은 다시 재희에게로 옮겨갔다. 8년 전의 그날 밤으로 돌아가 동지와 재희를 만나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체 이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뒤에 그곳 광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간에 맞춰 재희의 의식이 돌아왔다. 8년 만에 기적처럼. 분명히 시선의 초점이 서로 맞닿았고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젖어 들었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나고, 잠시 후 지선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주 잠깐 서로의 시선이 얽힌 뒤 지선은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마주한 남자의 가슴 높이쯤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제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
동지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사이, 지선이 다시 말했다.
“저는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동지의 발 앞에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동지는 무슨 말이든 빠르게 찾아내야 했지만,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말아 쥔 채 서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두 팔을 늘어뜨리고 선 그녀의 작은 어깨를 천천히 감싸안았다. 그가 안아 오자 지선은 기다렸다는 듯 와락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등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그의 목과 어깨 사이에 묻었다. 볼이 맞닿고 여자의 가슴이 남자의 가슴을 빈틈없이 눌러갔다.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반신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꿈과는 다르게 그녀의 하복부에 남성은 없었다. 꿈속의 그 선명하던 기억의 자리를 허전함이 대신 메웠다. 지선은 더욱 깊이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고, 동지는 두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가쁜 호흡에 맞춰 시간이 째깍째깍 흘렀다. 믿을 수 없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떤 강한 운동도 중력의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정지하고 말 듯, 그녀의 내면에 고요한 안정이 내려앉았다. 짧은 낮잠을 자고 난 뒤처럼 머릿속이 명료하고, 막무가내로 꿈틀대던 육신의 소란도 가라앉았다.
그쯤에서 동지가 포옹을 풀며 말했다.
“가셔서 좀 더 주무세요.”
지선은 그와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뒤돌아서 가만히 방을 나왔다. 선생님의 격려를 받은 온순한 학생처럼.
그의 따뜻한 포옹과 좀 더 자라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끝없는 용서와 격려가 배어 있었다. 지선의 마음은 평온하였고, 부끄럽지 않았다. 그에게 안겼을 때 그의 가슴과 손끝에서 전해지던 따뜻함이 여전히 그녀의 온몸을 포근히 감싸주었다. 그녀는 아무런 번민도 없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폭포수 같은 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