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회) 제3장 기적 - 기적의 시작
2016년이 저물어가던 어느 날, 동지는 재희의 요양병원을 다녀오던 길에 그해 겨울의 첫눈을 맞았다. 첫눈이 서설이었던지 그날 밤 구치소 이후 넉 달 만에 시간여행의 문이 열렸다. 열한 번째의 시간여행이었고, 과거의 몸을 빌린 세 번째 기회였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시간은 밤 11시 20분으로 지난번보다 빨랐다. 동지는 지선이 모르게 옥상 외벽 계단을 뛰어내린 뒤, 얕은 담장을 훌쩍 넘어 광화문광장으로 달려갔다.
미국대사관 앞에 도착했을 때 길 건너 세종대왕 동상 뒷계단을 올라오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재희였다. 동지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재희야!”
“오빠가··· 여기 웬일이야?”
재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재희야!”
동지는 다시 이름을 불러놓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둘은 흥건히 비에 젖었다.
“재희야, 비가 많이 온다. 인사동으로 가자!”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치는 순간, 그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수련실의 동지는 긴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코끝에 재희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마침내, 동지는 8년 전 동지와 재희를 만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동지는 눈을 감고 오늘의 시간여행 과정을 떠올려 보았다. 이번 시간여행도 지금까지는 기억에 없던 일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오늘의 시간여행이 끝난 장소는 세종대왕 동상 바로 뒤였는데, 되살아난 8년 전 기억 속에서 그가 정신이 돌아왔던 장소는 세종문화회관 전면의 첫 번째 계단이었다. 그곳에서 정신이 돌아온 그는 곧바로 인사동으로 달려와 지선이 모르게 옥상 외벽 계단을 통해 방으로 들어왔다.
마치 꿈속에서 무언가 중요한 걸 놓쳤고, 그것이 현실로 연결될 것만 같은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과거의 동지와 재희를 만나게 하였으며 그녀의 체온과 목소리, 눈빛까지 모두 생생히 느꼈다. 그럼에도 재희가 사고를 당하기 전에 그녀를 구해냈다거나, 그녀를 데리고 그 자리를 빠져나온 기억은 없다. 어딘가 한 곳이 툭 끊어져 버린 것 같은 이 상황은 무엇일까?
침실로 돌아온 동지는 손을 떨며 재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없는 번호라는 멘트가 돌아왔다. 그는 다시 요양병원으로 전화했다. 재희에게 별일 없느냐고 묻자, 귀에 익은 간호사의 목소리가 별일 없다고 대답했다. 재희는 여전히 요양병원에 있었다.
동지는 벌떡 일어나 요양병원을 향해 뛰었다. 명상에 들기 전에 다시 내리던 눈은 가루눈으로 변해 흩날렸고 길은 미끄러웠다.
[요양병원]
그날 밤, 재희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가 새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희는 늦은 밤에 뭔지 모를 강한 충격을 받고 눈을 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없었던 기억 하나가 천천히 의식의 지평 위로 떠올랐다. 새로이 떠오른 기억은 지금까지 동지가 그녀에게 되살려 주었던 기억의 파편과는 달리 그녀 안에서 저절로 되살아난 것으로, 그녀 안에서 긴 겨울잠 같은 시간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며 깨어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날 밤, 그 구역질 나는 지하 터널에서 빠져나와 세종대왕 동상 뒤로 올라왔을 때, 어딘가에서 오빠가 뛰어와 나를 와락 껴안으며 "재희야!"하고 불렀어. 오빠는 울먹이며 인사동으로 가자고 말했지. 그러다가 갑자기 팔이 툭 떨어지더니 딴사람이 되어버렸어. 아니 딴사람이라기보단… 그때 오빠의 눈에는 산 사람의 영혼이 보이지 않았어.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디쯤 걸쳐있는 것 같았어. 나는 오빠를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으로 끌어다 앉혀놓고, 다시 세종대왕 동상 뒤로 돌아가 계단 입구에서 본, 누군가 버려둔 우산을 들고 돌아왔을 때 오빠는 그 자리에 없었어. 오빠는 그 상태로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 불안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야. 내가 오빠의 방을 나온 뒤 오빠는 혼자 괴로워하다가 나를 찾아 뛰쳐나왔나 봐. 아차!··· 그런데 이상한 게 또 있네! 오빠는 왜 안국역이 아닌 광화문광장으로 달려온 걸까? 내가 간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건데… 어떻게 알았을까? 아, 모르겠어. 생각할수록 온통 미스터리뿐이야.)
창밖은 눈이 내렸다. 병실은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들었고, 벽에는 얼룩덜룩한 눈 그림자가 흘러내렸다. 재희는 평소와 다른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녀는 방안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방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젖었다. 뭔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눈이 오나 보네. 그런데 기분이 이상해. 이곳에 갇혀 지낸 몇 년 동안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방 안의 색감도, 창밖의 빛깔도 어딘가 달라. 귀에는 낯선 바람 소리 같은 게 흐릿하게 들리고…)
재희는 창가로 다가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고요한 거리 위로 눈이 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제 몸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해. 방금,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어. 눈꺼풀이 경련하듯 살짝 떨린 건데, 내 몸이니까 내가 알아.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분명 뭔가 달라졌어.)
재희는 침대로 다가가 누워있는 제 얼굴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 손끝이 얼굴에 닿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정체 모를 어떤 힘이 자신을 옭아매는 듯한 느낌을 받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아무런 저항의 여지도 없이 사로잡힌 그대로 자신의 육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게 뭐야? 왜 갑자기 아무것도 안 보여? 시야가 젖빛 유리처럼 흐릿해. 뭔가 꽉 막힌 것 같아… 숨이 막혀. 나가야 해. 어… 안 돼! 꼼짝달싹할 수가 없어! 아주 비좁고 폐쇄된 공간에 갇힌 것 같아. 뭔가 크게 잘못됐어.)
재희는 침착하려 애썼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잠깐… 주변이 희미하게 보여. 뿌연 안개 같아. 이건… 그래, 맞아! 난 지금 육신의 눈으로 보는 거야! 그런데 모든 게 전과는 달라.)
그녀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보았다.
(움직임이… 느낌이 있어! 이건 분명해. 그리고… 귀에 들리는 이 금속성 울림은 뭐지? 밖의 소리가 아닌, 내 안에서 나는 소리 같아. 내 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가, 다시 한곳으로 모여들어 정돈되는 느낌이야. 신기하고 낯설어. 그런데… 왜 몸이 아프지?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져.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자정 무렵, 병원까지 단숨에 달려온 동지는 갓 내린 숫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병원의 뜰을 걸어 들어갔다. 담장 주변의 보안등 불빛 속에는 마치 날벌레가 불을 향해 달려들듯이 눈발이 흩날렸다.
동지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 실내등을 켜고 조심스레 재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희미한 빛의 떨림이 보였다. 포착하기 어려울 만큼 미세한 떨림이었지만 눈동자에 움직임이 있다는 증거였다.
한참 후 눈동자 속에서 보일 듯 말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은 새벽 먼동이 어둠을 밀어내며 터오는 것같이 느리고 힘겹게 떠올랐다.
시선은 좀처럼 초점을 형성하지 못하다가, 실제로 먼동이 트는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몇 차례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긴 뒤에야 두 시선이 섞여 들었다.
8년 만에 ‘생각이 담긴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만나는 순간 동지는 재희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양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재희의 눈동자에도 옅은 습기가 스며들었다.
잠시 후 동지는 희경에게 전화로 알렸고, 희경은 전화기를 놓자마자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왔다. 재희는 시선을 한곳에 머물기가 힘든 듯 어머니를 향해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먼 사막을 건너온 사람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세종대왕 동상 뒤에서 동지와 재희가 만났음에도 과거의 불행한 사건은 엄연히 존재했다. 그 둘이 만난 뒤에 무슨 일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도미노의 패를 돌려놓지는 못하였고, 대신 재희의 의식이 깨어났다.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과 재희의 의식이 돌아온 사건은 묘하게도 같은 시간대에 일어났다. 두 사람이 만난 시점과 재희의 의식이 깨어난 시점이 정확히 일치하는지, 또는 두 사건 사이에 어떤 필연성이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절묘하고 놀라운 우연이었다.
무엇이 8년 동안 코마와 뇌사의 경계를 넘나들던 그녀의 의식을 깨어나게 하였는지는 병원의 누구도 설명하지 못했다. 어쩌면 동지의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이거나, 또는 그야말로 기적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