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회) 제3장 기적 - 다중 세계의 기억
2016년 12월 31일, 그해의 마지막 날 아침에 가루눈이 조금 날리다 그치고 하늘은 다시 맑았다. 세종대왕 동상의 이마와 어깨 위에 부서지는 겨울 햇살이 그의 미소처럼 따스했다.
동지는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 앉아, 왼편으로 십 미터쯤 떨어진 화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한 여자와, 그녀를 사랑했던 한 남자의 삶이 한순간에 짓밟힌 현장이었다. 여전히 그날의 사건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재희를 따라 지하 터널로 내려갔었고, 그 안에서 본 소름 끼치게 불온했던 장면과, 마주친 사내들의 심상치 않은 기운과 수상한 움직임을 보았지만, 그것만으로 사건의 흐름을 꿰맞출 실마리는 떠오르지 않았다.
동지는 세종문화회관 옆 화단에 시선을 둔 채, 그동안 수없이 들락거렸던 사유의 미로를 다시 헤집고 있었다. 사건 현장을 목도하기 위해서는 유체 이탈의 지속시간이 좀 더 연장되어야 하지만 한동안 과거의 몸을 빌려 재희의 사건 자체를 지우려는 데 마음을 쏟았었다. 그러나 그 꿈은 접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날 밤으로 돌아가 동지와 재희를 만나게 한 사건과 재희의 의식이 돌아온 기적 사이에는 어떤 필연성이 존재할까를 또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늘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깊이 생각에 잠겼던 그가 ‘헉’하고 호흡을 멈추었다. 아니, 멈췄다기보다는 멈춰진 것에 가까웠다. 일 초, 이 초, 삼 초···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고, 그는 마치 정지화면 속 인물처럼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미쳐가는 걸까? 그것들은 모두 현실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어!"
그는 선 채로 생각했다. 나는 유체 이탈을 통해 세 차례 과거의 몸을 빌렸었다. 몸을 빌린 시기는 수개월의 시간차를 둔 제각기 다른 날이었고, 그 내용도 매번 달랐어. 하지만, 과거 그 시점의 나로서는 모두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겪었던 일이야. 그러니까 팔 년 전 그날의 나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세 가지의 다른 삶을 중복하여 살았던 거야. 이건 불가능한 일이잖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리고 그 불가능한 현상은 나만이 아니라 지선도 똑같이 겪었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광화문광장에서 돌아오는 나를 북인사마당에서 기다렸던 지선이 있고, 내가 광화문광장에 다녀온 사실조차 모르는 지선이 존재해. 아니, 지선뿐만이 아니야! 2008년 5월 31일 밤 11시 이후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세 가지의 다른 삶을 경험할 때마다, 각각의 나와 함께 존재했던 서로 다른 세계와 그 세계마다 살았던 사람들이 존재했던 거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다. 이건 불가능해!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현실이란 말인가? 혹여 내 무의식의 공간에서 나도 모르게 내가 간절히 소원하는 상황을 조작해 낸 환각일까? 그렇게라도 설명하지 못한다면 나는 미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도 아니라면 우주의 질서 속에 사람의 지성으로는 짐작하지 못할 깊은 무언가가 존재해야 하고, 우연히도 내가 그 미지의 세계를 설핏 경험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