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유령

(33회) 제4장 혼돈의 계절 - 범인의 정체

by 해암

범인의 정체







2017년 초봄에 동지는 열두 번째로 시간여행 기회를 맞았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몸을 빌리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재희가 2층 계단을 내려갈 때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전과 다르게 차분히 주변을 살피며 그녀의 뒤를 밟아가는 그의 눈에 새로운 정황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창수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재희를 뒤따랐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세종대왕 동상 뒤에서 재희가 지하 터널로 내려가는 첫 계단을 밟을 때,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창수를 본 것도 처음이었다.


동지는 재희를 따라 동상의 뒷계단을 내려갔다. 터널 입구에서 사내들이 나직한 목제 테이블에 둘러앉아 야식을 먹었다.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중에 전화벨 소리를 듣고 무심코 돌아보았는데, 라운드 챙의 등산모가 전화를 받았다.

재희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고, 왜 사진을 찍냐며 시비를 걸어온 사내를 뿌리치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빠져나갔다. 창수는 길 건너 나무 그늘에 그대로 서 있었다. 모든 상황이 이전에 봤던 그대로 재연되었다.


그때,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한 남자가 세종대로를 가로질러 달려왔다. 과거의 동지였다. 그는 곧장 재희를 향해 달려와 그녀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재희야, 비가 많이 온다. 인사동으로 가자.”

그 말을 한 뒤 그의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재희는 동지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세종문화회관 앞으로 부축해 갔다. 그는 재희에게 의지한 채로 비틀거리며 발을 떼어놓았다. 지하 계단을 올라온 라운드 챙의 등산모는 세종대왕 동상 기단의 그늘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재희는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동지를 앉히고 ‘오빠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우산을 가져올게.’ 하고는 세종대왕 동상 쪽으로 돌아섰다. 그녀는 동상 뒤편으로 걸어가 계단 구석에 방치된 우산 하나를 집어 들고 다시 세종문화회관 쪽을 향해 갔다.

라운드 챙의 등산모가 재희의 뒤를 따라 천천히 발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등산모 아래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어디선가 본 듯했다. 동지는 급히 손을 뻗어 사내의 목을 낚아채려다 그만두고 세종문화회관 계단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동지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는데, 정부종합청사 앞을 달려가는 동지가 보였다. 그는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세종대로를 가로질러 인사동 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등산모가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대고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그자가 여길 왔다고? 응, 나도 봤어요. 근데 뭔가 상태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일어나서 가버리더군. 막 인사동 쪽으로 뛰어갔다는 거지? 알았어요. 그렇다면 잘됐네, 고맙소!”

그는 전화를 끊고 다시 재희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온 등산모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윤재희 선생!”


재희는 불빛을 등지고 선 그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잊었나. 나 박일수요!”


“아··· 박일수 선생? 근데 여긴 왜···?”


“지하에 들어올 때부터 봤지. 이 시간에 거긴 왜 들어와 사진을 찍은 거야? 설마 우릴 도우러 오진 않았을 테고, 필경 무슨 트집이라도 잡을 생각이었겠지.”

박일수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번져 나왔다.


“오, 이제야 짐작이 되네요. 여기서 촛불시위를 주동하는군요. 촛불이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제 알겠어. 그 이유도, 정체도.”


“이유? 정체? 그게 뭔데, 대체 뭘 안다는 거야!”


“이건 아니잖아요? 단두대는 뭐고, 그 끔찍한 사람의 목이며, 그리고 죽창들은··· 여기서 누구 찔러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이게 촛불을 든 시민들의 모습인가요? 당신들은 순수한 시민들을 철저히 속이고 있어요.”


“이 여자가··· 전혀 상황 파악을 못 하는군.”

박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재희는 박을 무시한 채 돌아서서 어두운 화단 주변을 기웃거리며 동지를 찾았다.

“오빠! 오빠, 어디 있어요?”


“오빠라고? 그 자식을 찾는 건가? 그 새끼 여기 없어!”

박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각목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실렸다.


동지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박일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 세종대로 건너편에서 세종대왕 동상 쪽으로 걸어오는 창수가 보였다. 창수는 세종대왕 동상 뒤편을 돌아 나와, 박일수와 재희가 서 있는 세종문화회관을 향해 오고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앞의 작은 공간에, 재희와 박일수와 표창수,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9년 후의 미래에서 온 동지까지, 악연으로 얽힌 인물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창수가 그들 뒤 10미터쯤 거리로 다가왔을 때, 재희의 등 뒤에서 박일수가 각목을 쥔 두 손을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세상이 숨을 죽인 듯 고요해졌다.


“안 돼!” 동지는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 순간,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이 휘청 흔들렸다. 아래로 내려긋는 박일수의 두 팔과 각목이 휘청 흔들리고, 이어서 박일수도 재희도 창수도,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가 산산이 흩어져 사라져갔다.


“악!”

동지는 비명을 지르며 9년 후 현실의 수련실에서 눈을 떴다. 그는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기진한 채 엎드려 있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열두 번째의 시간여행을 통해 보고 싶었던 의문의 현장을 목격했다. 박일수가 각목으로 재희를 내려치는 장면을 보았고, 모호했던 창수의 정체도 드러났다. 세종대왕 동상 뒤와 세종문화회관 계단 사이의 궁금증도 풀렸다.

동지는 생각을 정리했다. 창수는 재희의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진상을 알면서도 친구인 나를 속였다. 박과 창수는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동지일 가능성이 짙다. 재희가 지하 터널로 들어갈 때 창수는 박에게 전화를 걸어 알렸다. 전화를 받은 박은 재희 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맞아떨어진다. 무엇보다도 그는 과거의 내가 세종문화회관 계단을 이탈해 인사동으로 달려가자 바로 박에게 전화를 걸어 알려주었다.

박일수가 재희를 해친 현장에서 창수는 무엇을 하였을까? 박과 함께 증거인멸을 도왔을까? 거기까지는 모르더라도 종로경찰서 119에 신고한 자는 분명 창수였을 것이다. 창수 말고는 그곳에 사람이 없었다. 그는 세종문화회관 옆 화단에 누군가 쓰러져 있다며 신고하였을 테고, 수사의 초점을 흐리기 위해, 몇 사람의 남자와 한 여자가 말다툼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거짓 제보를 하고는, 신원을 밝히지 않은 채 급히 그곳을 떠났으리라.

창수는 재희가 사고를 당한 후 일묵서예에 발걸음을 끊었다가 수년 후 딱 한 번 나타났었다. 아마도 나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왔을 것이다. 그때 내가 박일수의 행방을 물었는데, 그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며칠 후 전화로 박일수가 죽었다며 거짓말을 둘러댔다.

이성학 박사가 재희의 일을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그가 덫을 놓았음이 틀림없다. 생각해 보면, 재희가 나에게 비밀로 한 일을 이 박사에게 말할 리는 없다. 부끄럽게도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재희에게 미안하다. 오늘 밝혀진 일들을 재희에게 빨리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수가 없다. 재희가 좀 더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튿날 오후, 동지는 광화문광장으로 가서 세종대왕 동상 뒷계단을 내려가 보았다. 시간여행 중에 재희를 따라 들어가 보기는 했었지만, 현실에서 그곳을 찾기는 처음이었다. 터널 속은 시간여행 중에 본 9년 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단두대가 보이고 단두대 옆에는 남자 대통령이 아닌 여자 대통령의 목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 곁에 상체를 밧줄로 빈틈없이 묶인 그녀의 반신 상도 보였다. 대상으로 삼은 사람만 바뀌었을 뿐 모두가 9년 전 광우병 파동 때와 똑같았다. 섹스 장면을 그린 그림도 그대로였다. 전의 것과 비슷한 구도에 사람 얼굴만 바뀌어서, 여자는 현재의 대통령이었고 남자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동지의 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리번거리며 9년 전 라운드 챙의 등산모를 찾았다. 그러나 터널 안에서 얼쩡거리는 사내중에 박일수는 보이지 않았다.


동지는 서둘러 컴컴한 터널을 빠져나왔다. 광장은 세종대로를 지나다니는 차들과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이 되쏘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켜 터널 안에서 마신 공기를 토해냈다. 그리고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생각은 차츰 하나의 짧은 말로 수렴되었다. 그의 뇌리를 장악한 말은 ‘악마’였다. ‘이건 나라를 걱정하는 시민의 항거와는 천리만리 동떨어져 있어. 민심의 발로가 아니야. 너희에게서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영혼은 소거되고 광기만이 남은 악마일 뿐이야. 그래 악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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