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유령

(39회) 제5장 관악산 유령(幽靈) - 북한산 비봉 자락의 이층집

by 해암

북한산 비봉 자락의 이층집






구기동에서 북한산 비봉으로 오르는 길 양옆에는 경사진 언덕배기를 따라 번듯한 주택들이 듬성듬성 들어서 있다. 집들은 대개 높은 옹벽에 둘러싸여 마치 고성처럼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고, 담장 둘레에 심어진 큼직한 나무들에 가려 바깥에서는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마을의 규모에 비해 골짜기 개울을 따라 난 길은 승용차 두 대가 마주치면 한쪽이 벽에 바짝 붙어 서서 기다려야 할 만큼 비좁았다.
본격적인 산행길로 접어들기 직전, 커다란 바위를 끼고 자리한 그 이층집 역시 외부의 시선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늦은 오후, 이층집의 햇볕이 잘 드는 잔디 마당 한편에 한 젊은 여인이 휠체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앉아 있다. 여인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넉넉한 통치마를 입고, 따뜻해 보이는 회색 모직 담요를 어깨에서 무릎까지 가지런히 덮었다. 그녀의 뒤에는 훤칠한 체격의 남자가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서서, 이따금 몸을 기울여 여인에게 무슨 말인가를 속삭인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물든 나뭇잎은 쉼 없이 흘러내리고, 조그마한 흰 개 한 마리가 두 사람 주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아마도 마당 구석에 놓인 개집의 주인이리라.


여인은 재희, 남자는 동지였다.


재희는 미음을 먹기 시작하고부터 뼈와 살가죽만 남았던 몸에 조금씩 살이 붙었다. 얼굴에도 서서히 산 사람의 불그레한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겨우 말을 이을 수 있을 만큼 기력이 회복되었을 무렵, 재희는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의문을 동지에게 꺼냈다.

“오빠… 오빠는 박일수와의 그 일을, 내가 이성학 박사에게 알렸다고 생각했었지?”

재희는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마쳤다.


“재희가 그걸 어떻게…?”


“오빠가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내가 누워 있을 때. 난 그때 오빠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거든.”


“그래, 그땐 그랬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가 속았던 거야.”


“이 박사님은 서울시 교육청의 친구에게서 들었다고 했어요.”


“그랬었구나. 나한테 전해준 사람의 말은 전혀 달랐어. 나중에야 내가 속았다는 걸 알았지. 돌이켜보면, 재희와 나에게 닥친 불운은 모두 내 어리석은 오해에서 시작된 건지도 몰라. 처음부터 그자의 말을 의심해야 했어!”


“아… 오빠, 모르겠어요. 사람의 운명이 그토록 가벼운 걸까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


“생각할수록 후회뿐이야. 내가 정말 어리석었어.”


“자책하지 말아요, 그 일이 아니어도 오빠의 선택은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


“그랬을까? 같은 선택을 하였을까, 내가?”


“아마도…”

그 말을 하며 재희의 얼굴에 설핏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물었다.

”오빠, 나… 언젠가는 두 발로 걸을 수 있을까?”


“물론이지. 멀지 않았어. 곧 다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거야. 우리의 불운은 원래 없었던 거야.”


“정말 그렇게 될까요?”


“그럼, 그렇고말고. 자유롭게 걷게 되면 뭘 하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 둬.”


동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재희야, 내가 모두 해줄게.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동지는 살아서 재희 곁에 있었다. 동지가 괴한으로부터 총격을 받았던 그날, 병원에서는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섯 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난 뒤, 당직의와 간호사도 휴식에 들어간 조용한 시간이었다. 병실에는 진국과 인경만이 동지의 곁을 지켰다. 아침 6시 무렵, 동지가 아버지를 향해 작은 눈짓을 보냈다. 진국이 그 신호를 읽고 아들의 입에 귀를 갖다 대자, 동지는 무슨 말인가를 띄엄띄엄 말했고 진국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십 분… 십 분을 넘기면 안 됩니다.”

동지가 끝으로 한 말이었다.

잠시 후, 진국이 다급한 목소리로 의사를 불렀다.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달려왔을 때, 동지의 손목에 연결된 바이털 모니터는 요동치듯 불안정한 파형을 그리다가 마침내 플랫 라인을 그리며 뚝 멈춰 섰다. 의사와 간호사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모니터는 끝내 침묵을 지켰다.

의사가 사망선고를 내리기까지 거의 십 분이 소요되었다. 사망선고가 내려지고 간호사가 동지의 얼굴 위로 시트를 끌어 덮을 때, 인경은 그 자리에 스르르 무너지며 의식을 잃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인경을 안고 응급실로 뛰었다.

진국은 울부짖으며 동지의 손목에 연결된 선들을 뽑아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내 아들과 단둘이 있고 싶소. 모두 밖으로 나가주시오!’라고 소리쳤다.

반 시간쯤 뒤, 사설 구급차가 현관에 도착하자, 진국은 인경과 함께 아들의 시신을 구급차에 싣고 서둘러 병원을 떠났다.




동지의 장례를 치른 지 석 달쯤 지난 무렵, 지선은 희경의 전화를 받고, 아들 동해와 함께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사당동 언덕배기에 자리한 아담한 단층 주택 앞에서 기다리던 희경은 지선 모자가 승용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그들을 대문 옆으로 끌고 갔다.


“놀라실까 봐 미리 말씀드릴게요. 진정하고 들으셔야 해요.”
희경은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집 안에 들어가면… 그 사람, 이 학생의 스승을 만나게 될 거예요. 그 사람 죽지 않았어요. 살아 있어요.”


지선과 동해는 말을 잃고 희경의 입만을 쳐다보았다. 믿기지 않았지만, 그런 말을 농담으로 할 리는 없었다. 두 모자는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현관문을 열었다.

그들을 기다리며 거실 가운데 우뚝 서 있는 한 남자, 그는 분명 동지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지선은 그와 마주 서서 그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가 동지임을 확신하는 순간, 그녀는 풀썩 무릎을 꺾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온몸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동해도 어머니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두 모자는 그가 죽고 난 뒤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아야 했던 슬픔과 고통이 모두 녹아 없어지기 전에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다는 듯이 서럽게 울었다.


한참 후 두 사람이 울음을 그쳤을 때, 희경이 그간의 사정을 얘기했다.

“정 선생은 그곳 음성 농장에서 한 달쯤 요양하다가 재희를 돌보기 위해 여기로 옮겨왔어요. 그날, 장례를 마치고,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 저 사람의 부모님들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방금 장례를 치른 사람이 침대에 누워있는 걸 본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세요.”

희경은 그때를 떠올리듯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서 말했다.

“이제 정 선생도 건강을 웬만큼 회복하였고 재희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서 제가 지선 씨에게 연락드렸어요. 저 사람은 제자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혹시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요?”


“정 선생과 부모님이 벌인 한 편의 연극이었어요.”

희경은 그날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대로 얘기해 주었다.


“정말…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습니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지선의 시선이 동지를 향했다.


“제가 살아있는 한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으니까요. 저는 어떤 방해도 없이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있었고···”


“그들이 누군지 선생님께서는 아세요? 그리고 해야 할 일이라면 재희 씨를 돌보는 일과···?”


“스승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師命)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누군지는 아직은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동지는 짧게 대답했다.


지선은 인사동을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인사동의 집을 내놓고,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돌아다닌 끝에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조용한 장소를 찾아 마련한 곳이 북한산 비봉 아래의 이층집이었다.

지선은 새로 마련한 집으로 이사한 뒤 스승과 두 청년 제자의 극적인 해후를 주선했다. 그로부터 스승과 세 제자는 북한산 자락에서 다시 수련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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