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회) 제5장 관악산 유령(幽靈) - 흑룡강 뱃사공의 예언
2019년 9월, 동지의 제자들은 충주의 남한강 변 탄금대에서 열린 세계 무술 축제에서 무극권을 시범 무술로 선보일 기회를 얻었다. 기회를 얻는 데 크게 역할을 한 사람은 현서였다. 올림픽에서 태권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사람이 어느 이름 없는 무예인의 제자가 되어 기초부터 다시 수련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무술 시범은 축제의 셋째 날에 있었다. 동해와 현서, 용학 세 사람이 무극권의 본을 펼쳐 보인 뒤에, 이어서 동해와 현서가 대련을 선보이고, 끝으로 세 제자가 다트판에 철사를 던져 꽂는 시범을 보였다. 그들이 펼쳐 보인 무극권의 본은, 정과 동이 공존하는 극정의 움직임으로 마치 그림자가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보는 이에게 숨 막히는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다만 겉보기로는 다른 무술처럼 웅장하거나 화려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상 두 사람이 대련을 겨룰 때는 공과 방의 속도가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라서 본의 정적인 모습과는 정반대의 놀라움을 선사했다. 마지막으로, 세 사람이 가늘고 짧은 철사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과녁의 중앙에 꽂아 넣는 장면에서는 이를 지켜본 무술인들은 더는 말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무극권에는 현존하는 어떤 무술과도 다른 뭔가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무술 시범이 끝나자 3년 전 대왕고래의 추억이 다시 각종 매체와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새내기 기자 티를 벗은 포항 출신 대왕고래 여기자는 동지의 스승인 무성의 전설 같은 일화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등진 동지의 짧은 생애, 그리고 세 제자의 수련 과정을 특집으로 엮어 보도했다.
세 제자가 무극권 도장을 연 때는 그해 연말쯤이었다. 도장은 용학이 물려받기로 예정된 당산동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개관했다. 스승의 스승으로부터 이어받은 사명(師命)을 실현하는 첫발은 그렇게 내딛어졌다.
수련 시간은 오후에 초등반과 중등반을 열고, 나머지 시간대에는 성인반과 특별반을 두었다. 특별반에는 엄선된 타 분야 무술의 젊은 고수 십여 명이 수련했다. 동해와 현서, 용학 세 사람이 사범 역할을 분담하였지만 쉴 틈 없이 바빴다. 대학생인 동해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곧바로 도장으로 달려왔다.
동해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각종 매체의 기자들이 구기동 지선의 집을 불쑥 찾아오거나 집 주변을 서성이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동지는 제자들을 불러 거처를 옮길 뜻을 밝히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몇 가지 말을 전했다.
“이미 아는 바와 같이, 나의 스승님께서는 원래 중국 흑룡강성 북방의 한적한 강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시던 중, 강변 숲속에서 홀로 뱃사공으로 사시던 기인을 만나 무극권을 수련하셨다. 그리고 70년대 초에 중국에서 나와 할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으로 오셨다. 스승님께서는 음성에서 농장을 돌보시며 무극권을 수련하시던 중 우연히 나를 만나 무극권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내가 열두 살 되던 해에 고인이 되시고 말았다.
스승님께서는 틈틈이 그 흑룡강 뱃사공 사조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말씀을 나에게 일러주셨으나, 어렸던 나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기억에만 저장해 두었다.
스승님께서는, 무극(無極)이란 우주의 본체인 태극 이전의 원천 기운, 즉 원기(元氣)라시며 무극의 기운이 태극(太極)으로 변화하는 힘은 선한 기운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무극권을 널리 전파함으로써 무극의 선한 기운이 작동하여 시대의 정신을 선의 방향으로 지향케 한다면 태극을 넘어 황극(黃極)에 이르게 되고, 세상은 선한 역사의 시대를 맞을 것이라 하셨다. 지금까지 나는 스승님의 그 말씀을 사명(師命)으로 간직하여 왔다.”
스승의 말을 듣던 세 제자는 어느새 무릎을 꿇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스승님께서 내게 은밀히 전해주신 말씀이 한 가지가 더 있다. 스승님께서는 당신의 스승이신 흑룡강 뱃사공 사조님께서 생전에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몇 가지 말씀을 남기셨다고 하셨다. 그 뱃사공 사조님께서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될 것과, 그 후에 한반도에서 일어날 전쟁과 국토의 분단을 예언하셨다는데, 그 모두가 적중한 셈이 되었다.
그분의 예언 중 남은 한 가지는, 스승님께서 전해주신 말씀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조선의 땅이 둘로 갈라진 뒤 일 갑자가 지나고, 다시 반갑자의 고개가 가까우면 갈라졌던 상처가 꿰매져서 아무는 기운이 도래한다. 그때를 잘 예비해야 한다.’
‘잘 예비해야 한다.’ 나는 이 말씀에 깃든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갈라졌던 이 땅의 상처가 꿰매지고 아무는 기운’이 도래할 때, 그 기운을 선한 기운으로 이끌어 맞이함으로써 선한 역사의 시대를 열어가라는 말씀으로 나는 이해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들이 받은 사명(師命)이자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소명이 아니겠느냐. 그리고, 그 운명의 때가 이제 그리 멀지 않았구나.”
세 제자가 함께 “네”하고 대답했다.
동지는 천천히 제자들을 훑어본 뒤 말을 마무리 지었다.
“스승님께서 타계하신 뒤, 나는 오랫동안 혼자 수련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우연히 너희 셋을 만나 가르치게 되었으나, 무극권을 널리 알릴 기회는 얻지 못했는데, 그 역할을 이제 너희들이 맡아 하게 되었구나.”
“스승님께서 저희를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저희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함이 큽니다.” 현서가 말했다.
“물론, 내가 아주 떠나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볼 것이다. 이제 너희 셋 모두 무예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였고, 동해도 성인이 되었으니, 나는 세 사람이 잘 해내리라 믿는다. 그리고 각자의 수련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나는 매년 한 번은 너희를 직접 만나 수련의 성과를 점검할 것이다.”
제자들을 돌려보낸 뒤, 동지는 밖으로 나와 정원 한편의 매화나무 곁에서 북한산을 올려다보았다. 서쪽으로 기운 상현달이 정원을 훤히 비추고, 짙은 청잣빛 하늘을 배경으로 눈 덮인 비봉의 자태가 뚜렷이 빛났다.
동지는 생각했다.
‘북한산 자락으로 옮겨와, 제자들과 함께 수련하는 동안 지선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그녀는 나와 재희를 위해 헌신했다. 이제 더는 그녀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
동지가 상념에 젖어있을 때, 지선이 현관문을 열고 나와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한 발짝 뒤에서 동지의 등을 향해 물었다.
“선생님, 이곳에 그냥 계시면 안 될까요?”
짧은 말이었으나, 말하는 중간에 몇 차례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동안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재희까지 함께.”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동해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못 하겠습니까. 저는 평생을 선생님을 위해 살아도 모자랍니다.”
“동해를 제게 맡겨주셨잖습니까.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아! 선생님!”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북한산 하늘에 시선을 던져둔 채 말이 없었다.
한참 뒤 지선이 입을 뗐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서 사실 생각이십니까?”
조금 긴 틈을 두었다가 동지가 대답했다.
“우선은 재희가 다시 걷는 걸 봐야 합니다. 그 뒤의 일은 또 그 뒤에···”
2020년 1월 5일, 동지는 구기동을 떠나 다시 사당동 재희의 집으로 옮겼다. 구기동에서 세 제자와 함께 수련한 지 일 년이 조금 더 지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