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불안형이 회피형을 만나면 생기는 일
대학교에 들어가고 1년 간은 친구와 함께 원룸에 살았다. 그러다 보니 매일 폭토(폭식하고 토하는 행위)를 하지는 못했다. 혹여나 소리가 새어나갈까, 화장실에서 오래 있는 것에 친구가 눈치챌까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자주 하지는 못했다.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남자친구의 애정을 갈구하며 그가 원하는 여자친구의 모습이 되려 할수록 폭식의 주기도 잦아졌다. 평소 입맛도 까다롭고 많이 먹지도 않는 그에게 맞춰 식사를 했다. 일주일에 4~5일을 만나다 보니 마음껏 식사할 수 있는 날이 얼마 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나를 갉아먹는 일인 줄도 모르고, 만나지 않는 날에도 하루 종일 연락을 하며 내심 만나길 바랐다. 부모님께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랑을 연인에게서 채우고 싶은 갈망이 컸다. 갈망이 채워지지 않을수록 더 커져만 갔다.
그는 회피 성향이 강했기에 내가 마음을 비추거나 진지한 대화를 하려고 할 때마다 상대해 주기보다는 말을 돌리거나 그 상황을 피하려 했다. 지독한 불안형이었던 나는 그의 애정을 더 확인하려 했다. 애정을 확인하지 못하니 자주 만나는 것으로라도 안정감을 얻으려 했다. 그러다 보니 그와 만나지 못하는 날 저녁이면 친구와 함께 야식을 잔뜩 사와 허해진 마음을 음식으로 가득 채우고, 살쪄서 미움받을까 두려워 다 토해냈다.
연애문제도 스트레스였지만, 생활 패턴이 안 맞는 친구와 원룸에서 사는 것에도 한계가 왔다. 집안일이나 비용 관련해서 말하지 못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대로라면 친구와의 사이가 나빠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친구에게는 다른 핑계를 대며 이제 따로 사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이사 갈 집을 찾다가 남자친구가 살고 있는 동네 근처의 오피스텔을 보고 계약하게 되었다. 경기도라서 학교와는 4~50분 정도 걸렸지만, ‘남자친구와 가까운 곳에 살면 더 자주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이가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 동네를 알아봤던 것 같다. 그 돈이면 서울에서도 충분히 집을 구할 수 있었지만, 생활권도 좋고 크기 대비 월세도 저렴하고 학교도 지하철로 한 번에 갈 수 있으니 좋을 것 같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막상 혼자 살게 되고 나니 남자친구와 사이가 좋아지긴커녕, 외로움만 더 커졌다. 가까운데도 만나주지 않는 그의 태도를 보며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더 큰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고, 아무 눈치 볼 필요가 없어지자 폭토의 빈도가 늘어갔다.
낮에는 동기들과 맛있는 것도 잘 먹고 죄책감 없이 먹는 듯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 적게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집에 가는 길이면 충동적으로 편의점에 들러 양을 채울 수 있으면서도 몸에 나쁜 음식들(컵라면, 햄버거, 빵, 과자 등)을 샀다. 음식을 결제하는 순간부터는 집에 가서 먹을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라면을 사는 날에는, 라면물이 끓는 시간도 기다리기 어려웠다. 집에 도착하면 씻지도 않고 물을 올린 뒤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라면을 끓이는 동안 같이 사 온 빵이나 햄버거를 우걱우걱 먹었다. 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않고 씹어 삼킨 뒤에 토하기 위해 2L짜리 물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음식을 욱여넣고 물까지 마시면 위가 터질 듯이 가득 차서 아플 지경이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화장실에 가 변기 커버를 올리고 쭈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목구멍 가까이에 있는 혀를 눌러 다 토해냈다. 처음엔 칫솔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게 이제는 손가락만 닿아도 자동으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위액이 나올 때까지 먹은 게 다 나오는 날이 있는 반면, 아무리 구역질을 해도 잘 나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물을 중간에 더 마시고 토를 했다. 먹었던 음식물이 다 나온 것 같으면 배가 완전히 비워진 것 같은 허한 느낌을 즐겼다. 그러나 보통 끝까지 다 게워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에 토를 하고 나서도 살이 찔 것 같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날이면 하루 종일 폭토를 반복하며 무의미하게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토를 다 하고 나면 기진맥진해져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다 잠들기 일쑤였다.
폭토를 했으니 한 끼는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자고 생각해 음식을 입에 대면 ’그냥 많이 먹고 토해버릴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면 안 된다는 죄책감이 마음 한 구석에 있었지만 폭식에 대한 욕구가 더 컸기에 항상 결론은 '먹어버리자!'로 흘러갔다.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도 있었기에 집에서 배달음식은 일절 시켜 먹지 않았고, 냉동고에는 닭가슴살, 닭가슴살 스테이크를 쟁이고 냉장고에도 삶아둔 고구마나 계란 같은 것들을 구비해 두었다. 그런 다이어트 식품을 잘 챙겨 먹다가도 폭식 욕구가 올라오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를 정도로 조급해지고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폭식용으로 사 온 음식들을 다 먹고도 배가 덜 찬 것 같으면 냉동고 속 다이어트 식품들도 배를 채우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되었다. 배가 부르다 못해 아플 때까지 음식을 밀어 넣을 때는 본능만 남은 짐승 같았다. 폭식이 끝나고 변기 앞에 앉아 토를 할 때면 정신이 들어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회의감이 들어 자책하게 되었다.
자주 폭식하고 토하다 보니 토가 잘 안 나오는 날도 많아졌다. 불안함에 억지로 계속 토를 하려고 하니 얼굴에 피가 쏠려 실핏줄이 터진 것처럼 울긋불긋한 얼룩이 졌고, 어떤 날은 피가 섞여 나왔다.
실핏줄이 터진 얼굴이나 위액에 섞여 나온 피를 봤을 때는 무서워서 이제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외로움이 나를 덮칠 때면 언제 다짐했냐는 듯 폭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