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폭식의 주기는 짧아졌고, 결국 매일 밤 폭식을 하게 되었다. 낮에는 아무렇지 않게 학교 생활을 하다가도 귀가길만 되면 홀린 듯 편의점으로 향했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오늘은 맛있는 것도 잘 먹었으니, 저녁엔 폭식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혼자가 되는 순간 이성의 끈을 놓고 폭식과 구토로 밤을 마무리하곤 했다.
폭식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기에, 편의점 앞에서 망설이다가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린 날도 많았다. 간신히 편의점을 지나쳐 집에서 저녁을 챙겨 먹어도 어김없이 폭식 욕구는 되살아났다. 억눌렸던 충동이 튀어나오면 잘 쉬고 있다가도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편의점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매일 밤, 집에 돌아와 혼자가 되는 허함을 음식으로 채웠던 것 같다. 친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연애에 집중한다는 이유로 동기들과 따로 약속을 잡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남자친구가 나의 인간관계까지 통제하려 했기에 마음 놓고 어울리기도 어려웠다. 유일하게 동기들과 편하게 어울릴 수 있던 순간은, 그가 같은 자리에 있을 때뿐이었다.
인간관계를 통제하는 것이 나와 단 둘이 있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모순적이게도 그는 단둘이 있는 것보다 동기들과 함께 어울리는 시간을 더 즐거워했다. 내게 대놓고 “너랑 단둘이 있는 건 재미가 없어”라고 말하기도 했고, 언제나 누군가를 끼워 함께 놀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친구도 연인도 누구 하나 가깝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애정이 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애정을 확인받기 위해 더 매달렸지만, 그럴수록 그의 태도는 더 냉담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더 막대하는 그였지만, 버림받게될까 무서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못했다. 상처받기만 하는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고 꾸역꾸역 이어나가는 동안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불만이 있어도 말할 수 없다보니 나를 막대하는 이유를 내게서 찾으려 했다. 생각끝에 도달한 결론은 '내가 통통하고 못나서 그가 내게 매달리지 않는 것 같아.'였다. 점점 나라는 존재가 싫어졌다. '내가 예뻤다면 날 더 좋아했을까?', '내가 마른체질이었다면 좋았을걸...'과 같은 생각을 자주 했다. 그렇다 보니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게 죄스럽게 느껴졌다. 식단을 타이트하게 할수록 폭식하고 토하는 행위도 더 잦아졌다. 먹고 살이 찌느니, 나중에 병이 오더라도 다 토해내고 말라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사귀던 시간의 절반 이상은 폭식하고 토하는 밤으로 채워졌다. 괴롭기만 했던 관계는 2년 만에 끝이 났다. 헤어지고 나서 폭식증도 함께 사라졌다면 좋았겠지만, 사귀는 동안 받은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다이어트 강박은 더 심해졌고, 폭식증은 계속되었다.
이별하고 난 뒤에 좋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어 학교생활이 힘들진 않았다. 겉으로는 잘 웃고 항상 밝은 모습으로 지냈기 때문에 저녁마다 폭식증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이전 연애로 무너졌던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공부에도 집중했지만, 잠깐이라도 틈이 생기면 폭식하고 싶은 욕구와 씨름해야 했다.
시험 기간에도 폭식하고 토하는 습관을 끊지 못했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증상은 심해졌고, 집에 있으면 쉬고 있을 때마다 폭식 욕구가 올라와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되도록 카페나 도서관에서 친구와 함께 공부하는 방법을 택했다.
쓸데없는 감정 소모 없이 공부에만 전념하자 다행히 성적은 잘 나왔다. 하지만 졸업 후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 3학년 2학기를 앞두고 휴학을 신청했다. 스스로를 정비하고 싶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내 손으로 돈을 벌어보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운 좋게 바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평일에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에는 가끔 친구를 대신해 테마파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테마파크를 돌아다니며 고객들의 사진을 찍고 키오스크를 관리하는 일이었는데, 그곳에서 얼굴만 알고 지내던 사람과 연락처를 주고받게 되었고, 그렇게 두 번째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연애의 시작은 순조로웠지만, 서로를 잘 모른 채 외모만 보고 사귀게 된 탓에 상대가 나의 겉모습에만 끌렸다는 생각이 들어 부담스러웠다. 더 열심히 꾸미고 관리하며,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애썼다. 그리고 이전 연애에서처럼, 상대를 배려하고 퍼주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다 보니 그 사람 역시 점점 그런 나의 헌신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와의 연애에 의문점이 생겨날즈음, 아버지가 응급실에 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