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좋은음악수집가 Nov 06. 2021

추억, 행운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반쪽짜리 뮤지션이 아닌 반의 반의 반쪽짜리 음악인의 삶의 이야기

'기억해 언제나 내가 널 지키고 있다는 걸 어쩌다 가끔은 힘들겠지만 널 향한 내 맘은 변하지 않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줘' (Show Me The Money )


지독한 코로나로 2020년을 별다른 사건 없이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어느덧 2021년도 이제는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매년 11월은 유독 몸과 마음이 쓸쓸하면서도 축 처지는 달인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몸과 마음에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따뜻한 커피나 차를 한잔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생긴다.


유독 11월에는 많은 아티스트들이 세상을 떠났다.

유재하, 김현식, 함중아는 연도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세대의 인기 코미디언 양종철은 교통사고로 11월에 세상을 등졌다. 더 오래된 세대의 인기가수 차중락과 배호, 코미디언 서영춘, 배우 신성일도 모두 11월에 하늘의 별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아티스트들이 아닌 추접한 세상에, 거대한 세상에

'덤벼라! 건방진 세상아!'라고 당당하게 소리쳤던 마지막 행운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과 나의 새내기 시절을 추억하고자 한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본명 : 이진원)


'주성치와 함께라면 행복했어 널 잊을 수 있었어 모든게 좋았어 오맹달도 날 위로했어 지워버려 사랑할 수 없다면 그냥 떠나보내 괜찮아 모든건 다 좋아질거야' (주성치와 함께라면 中)


"요정이 예쁘다는 편견도 버려야 돼요. 요정이 왜 남자는 없을 거 같아요? 있을 거라구요, 결국엔. 내가 그런 편견을 깨는 건데, 그래서 공중파에 못 나가는 거죠." (그의 생전 마지막 강연 中)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우리가 동화책에서 바라보던 '요정'과는 거리가 멀고도 먼 모습을 가졌다. 유튜브와 싸이월드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목소리와 정반대의 외모와 동네에 흔히 보이는 아저씨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요정'이라는 편견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그의 첫인상은 그만큼 강렬했고 그가 부르짖는 외침은 요정이라 더욱 강력했다. 그런 강력한 모습에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나는 흠뻑 빠져버렸다.


'아무런 소용이 없대 끝내버리래...' (굿바이 알루미늄 中)


2009년,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나는 수시 합격자 발표에서 '후보 36위'라는 실로 엄청난 결과로 대학을 갈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아 수능이라도 잘 쳐보자는 약간의 의지와 "재수는 꿈도 꾸지 마라."는 어머니의 엄포에 당시에 믿던 하나님과 주변 온갖 신을 끌어당기며 '어떻게든 합격'을 기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수능을 잘 쳤을까? 결과는 굉장히 처참했다. 나를 받아 줄 대학교가 과연 존재했을까... 그 어려운 시간,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진 수시 후보 36위는 정말 기적과 같이 턱걸이로 합격을 하였을 때 온갖 자신감이 새싹이 돋듯 새로이 충만이 되었다.


'꿈이 없이 살 수도 있어 꿈만 꾸며 살 수도 있어 나를 지워가면서 세상에 나를 맞춰가면서' (너클볼 컴플렉스 中)


2010년 3월, 경상북도에 위치한 어느 4년제 대학교 캠퍼스에 발을 처음 담그게 된 날.. 새 학기가 시작된 1학년의 3월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싸우기보다는 자비 없는 유압 프레스 기계에 내 감정을 오롯이 찌그려 뜨리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어려운 거침없는 삶의 시작을 알려주었다.

얼굴도 모르는 선배들 익히면서 어쩌다 인사를 하지 못하면 직접 혼낼 것이지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여 괜히 학번 전체를 이상하게 취급하는 일부 병신 같은 집단도 있었고 술을 꼭 마셔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전파하는 술꾼들을 보면서 '내가 술 마시러 학교에 왔나..?' 혼자 이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곳에서 나를 깨워준 건 '저항정신'이 아니었을까?


'나를 연애하게 하라 (사랑하게 하라) 뜨겁게 활활 타오르게 하라' (나를 연애하게 하라 中)


'이곳에서 나랑 음악 듣는 취향이 맞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놀랍게도 내 주변에는 없었다. 없는 게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만의 세계였던 홍대 문화가 경상북도 사람들이 제대로 느낄 수나 있었을까?

그때 나는 오죽하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학교를 자퇴하고 서울로 올라가 홍대 근처에 터를 잡고 홍대에서 공연하면서 사는 것이 꿈이었으나 그 꿈을 꾸고 '홍대에서 공연하는 것'에만 9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자퇴'라는 것을 실현하기는커녕 논스톱으로 4년을 다니고 졸업을 했다.)


결국 난 정말 가까운 친구들에게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을 전파하는 역할을 자처하였다. 물론 당시 그의 CD는 없었지만 당시 솔로였던 나는 같은 처지의 동기들에게 <나를 연애하게 하라>를 전파하여 같은 심정의 우리들에게 (일시적으로) 힘을 불어넣어 주는 '성가'였으며 한 명이라도 어서 연애를 하길 진심으로 빌었던 스무 살이었다.


'허구한 날 사랑타령 나잇값도 못하는 게 골방 속에 쳐 박혀 뚱땅땅 빠바 빠빠' (절룩거리네 中)


나의 음악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혼자서 뚝딱 만들 수 있느냐'인데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내가 구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완벽히 이해하고 난 후 2003년, 1집 <Infield Fly>를 세상 밖으로 던졌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의 첫 자작곡에 혼자 자만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 만들고 있다가 다시 곡을 조금씩 만들게 된 계기가 그를 알게 되고 그의 음악에 빠지기 시작할 쯤이기도 했다. 직구만 던지는 나에게 일종의 변화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 선동열도 학생 선수 시절 직구만 던지다가 슬라이더를 장착 후 최고의 투수가 되지 않았던가! 그만큼 나에게도 막혀있는 길을 우회하는 것이 필요했다.


'남들이 걸었던 똑같은 길 그 길을 다시 또 내가 걷네' (첫눈 오는 그날에 中)


음악으로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은 음악인이라면 정말 뿌듯할 일 아닐까? 대학교 1학년 이맘때.. 한때 같이 음악을 언젠가 해보자고 약속을 했던 고등학교 동창과 메신저(그때는 네이트온!)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이 분(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노래 한번 들어봐." (그때 추천해준 노래는 그의 1.5집에 수록된 'Show me the money'였다.)

"괜찮은데?"

"이 분처럼 음악을 해보고 싶어."

"그거야 하면 되는 것..."

"겨울 방학 때 날 잡아서 공연 보러 서울 갈래?"


그렇게 대화하던 그날, 정말 거짓말처럼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뇌출혈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기사가 떴다. 그리고 2010년 11월 6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가 정말 보고 싶었던 아티스트를 한 번도 못 보고 '키 작고 배 나온 닭 배달 아저씨'가 남긴 음악을 2010년을 떠나보내기까지 계속 들었다. 그게 나만이 할 수 있었던 추모였다.


'내가 세상을 사랑했던 것만큼 난 너무 아쉽고 섭섭해 아무래도 좋아 나는 내 젊음을 아낌없이 바쳤을 뿐 그저 실패했을 뿐 그저 무모했을 뿐' (요정은 없다 中)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1년이 되었다. 나는 오랜 시간 삼성 라이온즈 팬이지만 그가 사랑했던 LG 트윈스를 늘 눈여겨본다. LG 트윈스는 2002년 준우승 이후 우승의 문턱까지 가지 못했지만 LG가 가을야구를 하는 성적이 되면 자연스레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을 떠올린다.


형님 세대가 '김광석'을 떠올리듯 나의 20대는 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었다. 그의 음악 속에는 그 시대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 사랑을 위한 몸부림, 사랑하던 고기반찬, 모두에게 축배를 들어주며 전해주는 위로, 세상 따위는 두렵지 않은 깡, 절룩거리며 슬프게 하는 마지막 인사...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 필요할 모든 감정이 다 녹아있는 듯하다.


LG 트윈스의 올해 성적은 3위예요.

다행히 가을야구는 하네요.

형은 늘 제 마음에 남아있어요.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50년만 더 기다려주세요.

그때 만나서 같이 노래해요.



작가의 이전글 조카! 인생의 중요한 사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