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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동의가 필요할 때

서평 <이날을 위한 우산> 빌헬름 게나치노 (문학동네, 2010)

by 엄마오리

“그것들은 내가 삶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며 또 이제껏 삶에 대해 제대로 안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살짝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갑자기 난 내가 기본적으로 늘 품고 있는 어떤 느낌 속으로 빠져든다. 나 자신이 항상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살아가고 있고, 그 때문에 마치 실수로 살아가는 느낌 말이다” (p.158)


빌헬름 게나치노 (1943~2018)는 ‘하찮을 정도로 작은 사물들의 변호사’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독일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다. 요한 볼프강 괴테 대학교를 졸업한 후 언론인과 출판편집인으로 일했던 그는 1965년 소설 <라슬린 가>로 데뷔, <압샤펠>, <얼룩, 재킷, 방, 고통>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2001년 출간된 <이날을 위한 우산>은 20세기 말을 살아가는 독일 소시민의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을 그린 소설로, 게나치노에게 독일 최고의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히너상을 안기며 그를 현대 독일문학의 주요 작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일조했다.


주인공인 ‘나’는 특별한 직업 없이 살아가는 40대의 중년남자다. 옛 연인 ‘리자’는 자신의 연금이 들어있는 통장을 남긴 채 떠났고, 나는 시험평가서를 쓰기 위한 고급 수제화를 신은 채 도시를 걸어 다니며 때때로 상념에 잠긴다. 구두의 착용감에 대해 평가서를 쓰는 일로 짬짬이 용돈정도의 돈을 벌고 있으며 타인과 불화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등 조화로운 일상을 지향한다. 유치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수잔네’와 이제 막 연인 관계가 되려는 참이고 옛날 친구 ‘힘멜스바흐’는 내게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때때로 몰려드는 삶에 대한 회의와 우울은 나로 하여금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동의를 얻어야만 할 것 같게 만든다.


게나치노는 주인공을 통해 평범하고 소소한 소시민의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주인공의 눈에 비치는 다양한 상황들과 그에 의해 촉발되는 상념은 우울하면서도 어딘가 우스꽝스럽다. 주인공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옷에 ‘어린 시절을 주제로 하는 대화는 원치 않는다’라는 문구의 명찰을 달아야 할까 고민하기도 하고 강박적으로 주위를 깨끗이 하는 회사원들이 나뭇잎으로 즐겁게 놀았던 기억을 소환하도록 해 주는 기억술 연구소를 궁리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주변 인물 또한 흔히 말하는 ‘성공’과는 별 관계 없는 사람들이다. 교사였던 리사는 호전적인 학생들 때문에 만성적인 신경질환으로 조기 퇴직을 해야만 했고 친구 힘멜스바흐는 주인공에게 꾸어간 돈 500마르크를 갚지 않은 채 주인공에게 취직 자리를 부탁한다. 주인공 또한 구두 한 켤레당 200마르크의 사례금을 받으며 평가서를 작성하는 생활에 딱히 불만을 가지지 않았지만 회사는 긴축재정으로 사례금을 4분의 1로 줄인다. 작가는 살아간다는 것의 지리멸렬함을 생활의 권태가 스며든 세기말 도시 소시민의 생활을 통해 보여준다.


게나치노는 자신의 삶에 의혹을 품으며 끊임없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주인공을 통해 불안한 현실을 견뎌가는 존재의 고뇌를 상기시킨다. 수잔네의 파티에서 만난 ‘발크하우젠’ 부인에게 농담처럼 말한 ‘기억술과 체험술 연구소’는 본의 아니게 실체를 가지며 그를 상담까지 진행하게 만든다. 어떤 사람들을 위한 연구소냐고 묻는 부인의 말에 주인공은 ‘자신의 삶이 하염없이 비만 내리는 날일 뿐이고 자신의 육체는 이런 날을 위한 우산일 뿐이라고 느끼는 그런 사람들’(p.116)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는 주인공 자신을 뜻하며, 독자를 향한 작가의 위로가 담긴 말이기도 하다. 구두 일을 그만둘지, 신문사에 기사 쓰는 일을 거절할지 계속 고민하면서도 주인공은 임대주택 발코니에서 이불로 동굴을 만드는 소년을 바라보며 삶에 대한 긍정을 느낀다. “한번은 아이가 창구멍을 손 너비만큼 열고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군중 물결을 오랫동안 둘러보기 시작한다. 아이는 불신에 차 있으면서도 안도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눈빛일 수도 있는 그런 시선으로 말이다.”(p.191)


어둡고 우울하면서도 빈정거림보다는 정색으로 농담하는 듯한 작가의 서술은 독자로 하여금 드러나지 않는 유머러스함을 느끼게 한다. 육체에 대한 촉각적이고 감각적인 묘사는 주인공의 세계를 한층 더 실체화 시키며 독자를 몰입시킨다. 우리에게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지만 그가 구현해 낸 인물과 세상은 지금의 시대를 투영하며 독자로 하여금 평범한 일상을 낯설게 보게 만든다. 번역된 작품이 적은 것은 특히 아쉬운데, 나날이 팍팍해지는 일상을 묵묵히 견디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애정어린 시선은 20여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도 위로가 되기 때문에 좀 더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떻게 살면 좋을지 계속된 물음표에 지치는 날. 인생이란 쳇바퀴에서 계속된 제자리 걸음에 문득 낯설음을 느끼는 그런 날, 게나치노의 <이날을 위한 우산>을 권한다. 삶은 그대로 살 만한 것이라는 긍정과 위로의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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