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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소년의 치열한 내면 탐색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트 무질 (창비,2021)

by 엄마오리

로베르트 무질은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친 독일어권 작가이다. 1880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1897년 빈 기술사관학교, 브륀 공과대학을 거쳐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했다. 소설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1906)으로 독자와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합일>, <세 여인>, <생전유고> 등을 발표했다. 1930년부터 대표작인 <특성 없는 남자> 1,2권을 출간했으나 나치에 의해 판금되자 스위스로 망명했고 결국 미완성인 채 1942년 제네바에서 사망했다.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은 무질이 매리쉬-바이스키르헨의 고등군사학교 시절 자신이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로 사춘기 소년의 예민한 심리적 변화와 가치관의 혼돈을 치밀하게 표현한 장편소설이다.


궁중고문관의 외아들 ‘퇴를레스’는 부모를 졸라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W.기숙학교에 입학한다. 최상류층 가문의 자제를 위한 이 학교는 사회의 중추가 될 관리자 양성을 위해 교육과 규제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다. 향수와 고독으로 공허함을 느끼던 그는 부드럽고 섬세한 성품의 H.제후의 아들과 교제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만 사소한 말다툼으로 소원해진다. 이후 거칠고 제멋대로인 문제아 친구들인 ‘바이네베르크’, ‘라이팅’과 사귀게 되면서 퇴를레스는 공명심과 남성성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라이팅은 바이네베르크의 돈을 훔친 범인인 ‘바지니’를 잡게 되면서 그에 대한 징벌을 하게 되고 퇴를레스는 바지니를 대하는 친구들의 태도에 정서적 혼란을 겪는다.


바지니의 비행에 분노한 퇴를레스는 부모가 이 사건을 처리해 그의 퇴학으로 종결되기를 희망하지만 바이네베르크와 라이팅은 바지니를 괴롭히며 폭행한다. 바지니를 괴롭히는 이유가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그저 흉내나 내는 외적 유사성에 불과하다”(p99)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라는 바이네베르크의 말은 퇴를레스를 인간에 대한 가치관의 혼돈으로 이끈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감수성과 오성의 한계에 대한 작가의 탐구는 사춘기 소년들의 들끓는 호기심과 끝 모를 탐색을 통해 집요하게 표현된다.


청소년기를 거치며 성인의 신체와 정신으로 변해가는 사춘기는 심리적 좌절과 불안, 정체성의 위기를 겪기도 하는 과도기적 생애주기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주인공 퇴를레스가 겪는 심리적 변화는 그러한 사춘기적 특징과 다르지 않지만 무질은 세상을 바라보는 소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번민, 관능적 감수성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초점을 맞춘다. 오성(悟性)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 애썼던 퇴를레스는 현상을 파악하는 또 다른 시점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멀리서 보면 너무나도 크고 신비하게 보이는’ 현상도 자신에게 구체적인 사건으로 다가오면 ‘분명하고 자그마하며, 인간적인 차원과 인간적인 윤곽’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저는 이제 알고 있어요. 사물은 사물이고 영원히 그렇게 머물러 있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런데 아마도 전 그것들을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볼 것입니다. 때로는 오성의 눈으로 때로는 다른 눈으로… 그리고 저는 더 이상 그것을 서로 비교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p.243) 세계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과 감각을 갖게 된 퇴를레스는 아무 미련 없이 학교를 떠난다. 획일화된 지식과 효율을 위한 통제는 더 이상 답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무질은 이 작품을 통해 관능적 감각에 대한 호기심, 도둑질을 들킨 동급생에 대한 폭행 등 사춘기 소년들이 벌이는 일탈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특히 심리 묘사와 형이상학적 갈등의 표현은 탁월하다. “퇴를레스는 말없이 꼼짝 않고 있는 하늘 아래서 자신이 철저히 혼자라고 느꼈고, 거대하고 투명한 주검 밑에 살고 있는 하나의 작은 점 같은 존재라고 느꼈다“(p.109) 청소년기에 가질 수 있는, 세계와 자신의 관계맺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그에 따른 해답에 대한 모색은 작품의 핵심이다. 이성과 오성이 지배했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시대적 배경은 이 작품이 단지 청소년의 성장소설로만 읽히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며, 퇴를레스의 선택은 절대적 가치였던 오성과 함께 감각하는 제 2의 시선을 인정하는 작가의 선언이기도 하다. 퇴를레스가 내리는 결론에 독자는 공감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치열한 자기 고민의 여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울림을 만든다. 독일 모더니즘 문학의 정전으로도 꼽히는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덜 알려진 작가’ 무질의 작품세계를 탐색해 보는 좋은 단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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