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설이 읽은 한국, 지금 여기

<혼모노> 성해나 소설집 (창비, 2025)

by 엄마오리

성해나(1994~ ) 작가의 소설집 <혼모노>가 인기 몰이 중이다. 2025년 9월 현재 20만부 이상 판매량을 기록하며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 소설집은 그의 다섯 번째 작품집으로 2024, 2025 젊은 작가상과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 수상작이 수록되어 있다.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성해나는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 장편 <두고 온 여름> 등을 발표하며 온라인 서점 예스24가 선정한 ‘2024 한국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투표에서 1위로 선정되는 등 현재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 중 한명이다.


책에는 2022년부터 24년 사이에 발표된 일곱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있다. 유명 영화감독의 미성년자 성추행 사건을 애써 외면하는 팬의 심경을 다룬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한국계 3세대 이민자이자 미국인이 광화문 광장의 태극기 부대와 조우하는 ‘스무드’, 자신이 모시던 신령을 앞집 신애기에게 뺏긴 무당의 번아웃 이야기 ‘혼모노’, 성실한 건축학도와 그에게 고문용 건물의 설계를 맡기는 교수가 등장하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수평적 관계를 표방하는 스타트업 회사에서 벌어지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 ‘우호적 관계’, 이혼한 딸의 출산을 둘러싸고 엄마와 시부가 벌이는 애증의 대결이 펼쳐지는 ‘잉태기’, 메탈음악으로 밴드를 만든 젊은이들의 우정과 현실의 충돌 ‘메탈’이다.


‘혼모노’는 ‘진짜’라는 뜻의 일본어로 흔히 오타쿠(만화나 애니메이션과 같은 한 분야에 마니아 이상으로 심취한 사람을 이르는 말)들 사이에서 쓰이는 용어다. 표제작에 등장하는 무당 ‘문수’는 삼십년간 ‘장수할멈’이라는 신령을 모시며 신당을 꾸려왔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신령이 떠나며 신통력을 잃는다. 떠났던 장수할멈이 앞집에 새로 이사 온 ‘신애기’에게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분노와 질투, 원망의 감정과 함께 상대의 굿판에 난입해 작두를 탄다. “삼십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p.153) 진짜와 가짜의 뒤엉킴 속에서 자신의 ‘진짜’를 붙잡은 주인공에게 그것이 더 이상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신령이 떠나간 무당은 더 이상 무당일 수 있을까. 발화자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마지막 대사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독자에게 생각의 여운을 남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이게 만드는 ‘스무드’ 또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듀이’는 광화문광장의 극우 태극기 부대를 만난다. 영어를 사용하는 자신에게 친절하며 성조기를 흔드는 그들에게 듀이는 편안함을 느끼며 아버지와의 관계를 곱씹어보게 된다. “아버지는 내게 한국 얘기를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어요.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그래서 아버지와 나 사이에 갈등이 없는 거겠죠.”(p.104)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도 없었다고 말하는 주인공은 ‘이승만 광장’에서 ‘아주 좋은 사람들’과 ‘알 수 없지만 아주 좋은 하루’(p.109~111)를 보냈다고 한다. 사회적인 갈등구조와 그것에 부딪히는 개인의 상황을 묘사한 것은 ‘우호적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스타트업 회사에 입사한 중년 남성 ‘진’은 실리콘밸리식 회사 문화에 적응하기 힘들어하고 ‘수잔’과 ‘알렉스’는 그런 그를 도우며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서로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듯 했지만 수평적 문화를 지향하는 듯 했던 회사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나이와 성별로 관계가 재정립되는 과정은 주인공은 물론 독자에게도 쓴맛을 남긴다. “정이 흘러넘치고 우호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그 안에서, 나는 뜨거운 딤섬을 차마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p.240) 표면적인 평등함 속에 숨겨져 있던 구조적 상하관계가 드러나지만 여기에 저항하지 못하는 미묘한 개인의 입장이 잘 묘사되고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소재에 대한 작가의 치밀한 취재다. 성해나는 지금 여기 한국사회의 다양한 곳곳에 눈길을 준다. 위의 작품 외에도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향은 분류하기 힘들 정도로 다채롭고 이색적이기까지 하다. 평창동 원정출산을 준비하는 부잣집 모녀와 시부에서부터 (‘잉태기’) 시골 어촌의 열혈 메탈 밴드를 결성한 청년들까지 (‘메탈’), 생생한 캐릭터의 설정과 배경 묘사는 강렬한 서사를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연상하게 하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또한 ‘연필 냄새를 풍기던 뽀송한 청년’이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한 시설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악의 평범성과 성실성이 결합했을 때의 파멸적 결과를 보여준다. 한국사회의 모든 것이 이 소설집에 모여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 삶의 여러 단면을 <혼모노>에서 볼 수 있다. 소설이 가지고 있는 현재성은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주요한 요소이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10년, 20년 후에도 생명력을 가질 것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재 선택의 다양함과 독자의 몰입을 이끄는 뛰어난 가독성은 작가 성해나의 존재감과 그에 대한 기대감을 차고도 넘치도록 갖게 해 준다. 젊은 작가의 시선으로 본 한국사회 곳곳의 이면이 궁금한 독자에게 일독을 권하며 계속된 그의 작품을 기대해 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삶을 껴안으려는 작가의 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