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오리 Apr 30. 2020

남겨진 사람들에게 보내는 한 편의 사랑 노래

<아주 긴 변명> by 니시카와 미와  

영상매체 작품을 제작하는 감독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테크니션. 기술적인 숙련도를 요하는 작업이 많기 때문이다. 감독과 각본가의 역할이 분리된 많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나머지 한 부류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영상이라는 매체로 펼치는 ‘작가’다. 이 경우 감독은 영화 뿐 아니라 다른 매체를 통한 창작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니시카와 미와(1974~)는 명백한 후자로 자신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영화를 만드는 작가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제작 스태프로 영화계에 입문한 이후 <유레루>, <우리 의사 선생님>, <꿈팔이 부부 사기단>등의 작품에서 감독으로 활동했다. 또한 자신의 영화를 각색한 소설로 미시마유키오상, 나오키상등의 후보에 오른 소설가이기도 하고 <고독한 직업>, <료칸에서 바닷소리 들으며 시나리오를 씁니다> 등의 책을 낸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아주 긴 변명>(김난주 옮김/무소의 뿔,2017)은 소설로 먼저 쓰인 후 2016년 작가 자신에 의해 영화화 된 작품이다. 소설은 나오키상 후보에, 영화는 마이니치영화콩쿠르 감독상을 받으며 평단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주인공 ‘기누가사 사치오’는 ‘문단의 조니뎁’이라는 별명과 함께 ‘쓰무라 케이’라는 필명으로 TV 예능 프로그램에까지 진출한 잘나가는 소설가다. 하지만 자기 이름이 유명한 야구선수와 같다는 사실에 콤플렉스를 가져 아내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싫어한다. 아내 ‘나츠코’가 고등학교 동창과 여행을 떠나자 자신의 편집자와 밀회를 즐기던 그는 버스 사고로 인한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냉랭했던 부부사이는 사치오로 하여금 장례식장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했을 정도다. 함께 사고를 당한 친구 ‘유키’의 남편 ‘요이치’와 알게 된 사치오는 그들의 아이들인 ‘신페이’, ‘아카리’와도 만나게 되고, 가랑비에 옷 젖듯 그들은 어느새 유사가족을 이루게 된다.  


소설은 주인공의 회상에서 시작해 전지적 작가 시점과 각 캐릭터의 1인칭 시점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사치오의 생각과 나츠코의 독백, 신페이의 이야기 등 각각의 캐릭터가 담담하게 스토리를 이어가는 구성은 등장인물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감정이입하게 만든다. 아내에게 의존했던 무명시절을 숨기고 싶은 사치오와 남편이 자신의 품에서 떠났다고 생각하는 나츠코는 더 이상 다정한 부부가 아니다. ‘과거는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빨리 멀어지고 말았다. 손이 닿지 않는, 먼 저편으로.’ (p.33) 나츠코의 죽음에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던 사치오는 요이치와 두 아이를 알게 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것, 또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속수무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얼마나 감미로운 일인가.’(p204) 사치오는 요이치의 가족에 깊숙이 자리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늦게나마 깨닫는다. 영화의 후반부에 사치오가 메모하는 ‘인생은 타인이다’라는 말이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작가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겪고 ‘만약 그날 아침 무심하게 싸우고 헤어진 가족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소설의 모티브를 삼았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재난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모든 게 파괴되는 것은 한순간이고, 어제까지 당연하게 존재했던 것도 오늘은 없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이 혹독한 현실로 눈앞에 닥쳐왔기 때문’이다.1) ‘죽음은 남은 사람들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그 죽음이 어떤 죽음이었는지, 안타까우면 안타까울수록 사람들은 깊게 상처입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삶의 의욕을 빼앗기고, 그 고통은 또 다른 죽음을 부르기도 하지.’(p.325) 갑작스런 상실로 송두리째 흔들리는 삶을 경험한 주인공이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삶에 단단히 닻을 내리는 모습은 남겨진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시지다. 


주인공 사치오 역을 맡은 ‘모토키 마사히로’는 일본의 국민배우라는 평에 걸맞게 내면의 상처를 가진 주인공이 타인을 통해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반면 요이치나 아이들 역을 맡은 배우는 전문배우가 아니지만 서투름과 순수함으로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한다. 프로와 아마추어 배우의 묘한 균형은 1년여에 걸친 촬영으로 풍성한 질감을 주는 영상과 함께 영화의 깊은 풍미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마지막 엔딩크레딧에 흐르는 헨델의 <유쾌한 대장간> 피아노곡은 스태프의 아이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의 중1 여자아이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한다. 아이의 소박하고 성실한 터치가 살아있는 음악은 억지로 꾸미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메시지를 던지는 감독의 진심을 대변하는 듯하다. 


‘영화는 위기를 구하지 못한다. 생활을 다시 일으킬 힘도 없다. 하지만 모든 곤란이 없어지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분명히 사람들의 마음에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이야기와는 또 다른 세계를 받아들일 빈틈이 다시 생겨나 시시한 연애나 칼싸움, 요괴들 이야기에 조마조마, 울렁울렁, 쓸모없는 가슴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이 세상 한구석에서 우리는 준비해두려 한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현실과 싸우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자신의 생활로부터 거리를 두고 숨을 돌릴 어둠을 마련해두기 위해.’2) 동일본 대지진 이후 무력감을 이기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던 니시카와 감독은 4년의 세월을 들여 작품을 완성했다. 그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1)<료칸에서 바닷소리 들으며 시나리오를 씁니다> p.203

2)<고독한 직업> p.67


작가의 이전글 과학적 배경과 철학적 사유의 심오한 결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