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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Apr 14. 2020

과학적 배경과 철학적 사유의 심오한 결합

서평/영화리뷰 <네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행복한 책읽기,2004)

테드 창(1967~)은 오늘날 세계 SF문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하나다. 미국 뉴욕 주에서 중국계 이민 2세로 태어난 그는 물리학과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했지만 과학자보다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길을 택했다. 1989년 SF 창작 강좌인 ‘클라리언 창작워크샵’을 수강한 후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중단편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전업 작가가 아닌 기술문서나 매뉴얼을 작성하는 테크니컬 라이터로 일하며 창작을 병행하는 그의 특성상 발표된 작품은 얼마 안 되지만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등 발표되는 작품마다 주요 SF문학상을 휩쓸고 있다.1) 테드 창의 대표작 ‘네 인생의 이야기’(1998)를 영화화 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원제:Arrival)>(2016)는 그가 SF분야를 넘어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첫 번째 작품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행복한 책읽기,2004)의 표제작이기도 한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에는 외계인과 조우해 그들의 언어들 배우게 되는 한 여성 언어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일곱 개의 다리를 가져 ‘헵타포드’라 불리는 외계인들이 지구에 찾아오고 군은 언어학자와 물리학자를 앞세워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 주인공 ‘루이즈’는 물리학자인 ‘게리’와 함께 헵타포드와의 교류를 이어가면서 그들의 언어를 통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습득하게 된다.


‘운명’이라는 말은 결정론적 사고를 내포한다.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고 다만 인간은 정해진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라는 관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아니, 애초에 운명이라는 것이 있긴 있는 걸까?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p.196) 작가는 오래전부터 많은 이야기 속에서 다루어져왔던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외계인의 언어를 통해 제기한다. 자유의지로 인해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페르마의 원리와 ‘어의문자(語義文字)’라는 개념을 통해 이 당연한 사실에 균열을 일으킨다. ‘굴절률의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한다면,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헵타포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p.198) 독자는 어느덧 선형적(線形的) 시간관념에서 벗어나 루이즈가 보고있는 비선형(非線型)적 우주의 세계를 맛보게 된다.


과학과 철학적 사유의 절묘한 결합은 SF의 사고실험적인 면을 부각한다. 현재와 과거, 미래가 얽히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우주 안에서 어떻게 인간의 운명을 이끌어가고 우리를 어떻게 그 안에 살아가게 하는지, 나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 ‘헵타포드들과의 공동 작업은 나의 인생을 바꿔 놓았어…….(중략) 훗날, 여러 해가 흐른 뒤에는 네 아버지도 사라지고, 너도 사라지게 될 거야. 이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내게 남는 것은 헵타포드의 언어밖에는 없어. 그래서 나는 주의를 기울이고, 그 어떤 세부도 놓치지 않으려고 해.’(p.215)  루이스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독자는 어느새 인간의지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알레고리에 몰입하게 된다.


감독 드니 빌뇌브는 어쩌면 영화화하기 어려울수도 있었던 짧은 단편을 매체의 특성을 잘 살린 한편의 수작으로 완성하였다. 외계인들의 이동체인 ‘셸’과 외계생명체 ‘헵타포드’, 외계언어의 형상화는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비주얼의 쾌감을 선사하며 직관적인 감상을 가능하게 한다.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을 살린 첨예한 갈등과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서사의 전개는 자칫 잔잔하게만 보여질 수 있었던 스토리를 보완해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한계도 있는 법, 원작에는 없었던 무력충돌을 향한 일촉즉발의 설정은 SF장르로서의 클리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장르적 재미를 추구해야만 하는 대중영화로서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중국 장군에 대한 작위적인 설정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원작이 갖고 있던 사유는 오롯이 전달된다. 현재를 살며 미래를 보는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그녀가 사는 지금의 시간을 긍정하고 주인공의 결정에 공감하게 된다.  현악기의 애절한 배경음악과 여주인공의 내면 연기, 시간대를 넘나드는 타임라인을 큰 혼동 없이 전달하게 하는 감독의 연출은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주요 요소다.


SF 장르에 대한 진입장벽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꼭 접해보기 바란다. 스펙타클을 소비하는 장르적 특성을 가진 다른 SF영화와는 분명 다른 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소설과 마찬가지로 인생과 시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다. 아직 테드 창을 모르는 사람들이 부럽다. 새롭게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으니!



1)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김보영 박상준 심완선 저, 돌베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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