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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Aug 06. 2021

유년시절의 어두운 환상과 현실이 일으킨 충돌

서평 <겨울아이> by 엠마뉘엘 카레르 (열린책들, 2001)

엠마뉘엘 카레르(1958~)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시나리오 작가다. 1986년 소설 <콧수염>으로 화려하게 데뷔하고 <나 아닌 다른 삶>, <리모노프>, <러시아 소설>, <왕국> 등 르포르타주와 소설을 결합한 문학적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다. <겨울아이>(열린책들, 2001)는 1995년 쓰여진 소설로 프랑스의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페미나상을 받으면서 작가의 존재감을 전 세계에 알리게 해 준 작품이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내성적인 소년 ‘니꼴라’는 학교 스키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아버지의 차를 타고 산장으로 향한다. 친구들과 함께 전세버스를 타고 싶었지만 사고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따로 가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트렁크에 실었던 짐을 내리지 않은 채 아버지가 떠나 버리고, 갈아입을 옷조차 없어진 니꼴라는 공개적으로 친구에게 잠옷까지 빌려야만 하는 처지가 되면서 모두의 주목을 받는다. 


이야기는 니꼴라의 상상력에 의해 확장된다. 주변에서 들었던 온갖 정보들이 니꼴라의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된다. 유괴와 살해, 장기 매매 등 현실적이라고 하기엔 섬뜩하지만 우리가 한번쯤 상상해본, 결코 낯설지 않은 백일몽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막연하게 가졌던 공포를 니꼴라의 상상을 통해 직조해낸다. ‘경솔하게 산장 밖으로 나오는 아이, 안온한 보금자리를 벗어나는 아이가 있으면, 그대로 토막을 내려고 기회만 노리는 살인자가 밤중에 산장 근처를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p.91) 


니꼴라의 아버지는 기대를 저버리고 캠프장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니꼴라의 고삐 풀린 상상력은 아버지의 사고와 죽음으로 고아가 된 자신이 모든 이들에게 동정과 위로를 받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린다. ‘차가 빙판에 미끄러져서 나무를 들이받고 아버지는 운전대에 가슴팍이 쑤셔 박힌 채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지도 몰랐다…선생님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겨우 말문이 열린다. “잘 들어라, 니꼴라. 이제, 너 아주 용감해져야 한다….” (p.50) 아이들은 성장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한사람의 어른으로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모의 죽음을 상상하게 만들고 스스로 연민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막연하게 그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다. 


소년에게 힘이 되는 존재는 캠프 교사인 ‘파트릭’이다. 아버지를 불편하고 두렵게 느끼는 니꼴라는 파트릭의 배려와 그의 여유로움에 호감을 느끼고 그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된다. “이렇게 능숙하게 운전하면서 편안한 여유를 갖는 사람, 그리고 몸의 움직임을 이처럼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p.59) 니꼴라는 아버지보다 파트릭을 성인으로서의 롤모델로 삼는다. 어쩌면 니꼴라에게 위협이 되는 덩치 큰 또래 ‘오드칸’과 함께 클리셰처럼 보이는 캐릭터일 수도 있지만 파트릭을 둘러싼 디테일한 묘사와 니콜라와의 교감은 이야기를 보다 풍부하게 해 주는 매력적인 요소 중 하나다. “자, 이제 우리가 아랍의 왕세자가 된 기분이 들지 않니?”(p.64)


니꼴라의 아이다운 상상력을 동력삼아 진행되어 가던 소설은 지역의 어린이가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변곡점을 맞는다. 막연하기만 했던 엽기적인 상상들은 현실의 사건과 맞물리면서 주인공인 니꼴라를 가혹하게 몰아간다. 동화적 상상력과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숨 가쁘게 진행되는 후반의 구조는 이 소설을 가장 크게 구별 짓는 중요한 장치다. 이 소설의 원제는 <La Classe De Neige>로, <스키캠프에서 생긴 일>이라는 제목을 달고 초판 발행되었지만 <겨울아이>로 제명을 바꿔 재출간되었다. 사건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어 달라는 의도로 읽힌다. 덕분에 상당히 개성이 강하면서도 장르적 특성이 묘한 작품이 되었다.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혼재된 스타일로 당혹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로서의 매력에 집중한다면 흥미로운 독서가 될 수 있겠다. 르포르타주의 성격을 띠기 전 카레르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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