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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Aug 13. 2022

일상의 균열이 만들어 낸 인생의 싱크홀

서평 <홀> 편혜영 장편소설 (2016, 문학과 지성사)

2000년 서울 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편혜영은 <아오이 가든>,<사육장 쪽으로>,<재와 빨강> 등 열한권의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집필한 중견 소설가다. 한국일보 문학상, 동인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평단과 독자의 지지를 받고 있다. <홀>(2016, 문학과 지성사)은  작가의 네 번째 장편소설로 2014년 작가세계 봄 호에서 발표된 단편 ‘식물애호’를 장편화 한 작품이다. 한순간에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심리서스펜스, 호러, 다크판타지 장르의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미국의 셜리잭슨상 장편부문을 수상했다. 빈틈없는 밀도로 인물의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40대 대학교수 오기는 아내와 함께 여행을 가던 도중 교통사고로 인해 홀로 살아남아 전신마비 환자가 된다. 오기의 장모는 부모가 없었던 사위를 위해 간호를 자처하고, 결국은 그의 집으로 이사와 간병까지 도맡게 된다. 몇 년 전 남편을 잃고 애지중지하던 딸까지 사고로 잃은 장모는 오기와 슬픔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그와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가 된다.


‘어떻게 삶은 한순간에 뒤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그럴 작정을 하고 있던 인생을 오기는 남몰래 돕고 있었던 걸까.’(p.28)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아내와의 평범한 삶을 영유하던 오기는 당장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몸이 된다. 작가는 예기치 못한 인생의 복병 앞에 붕괴되는 주인공의 현재를 집요하게 묘사해 독자로 하여금 인생이 한 순간에 뒤집어지는 좌절을 경험하게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인공의 현실을 집어삼켰던 나락은 이미 발 앞에서 꾸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십대야 말로 죄를 지을  조건을 갖추는 시기였다. (중략) 사십대는 이전까지의 삶의 결과를 보여주는 시기였다. 또한 이후의 삶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영영 속물로 살지, 잉여로 남을지.’(p.78) 안온한 삶을 누리고 싶었던 오기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가지거나 지키기 위해 ‘노골적으로 술수를 부’리고 타인의 실패에 안도감을 느낀다. 아내가 느끼는 결핍과 절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후배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중장년의 도덕적 해이는 그를 파멸로 이끈 ‘구멍’을 키우는 연료로 작동한다. ‘오기는 힘들고 지쳤지만 제이 없이도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걸 금세 받아들였다. 사랑을 잃어도 세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제이와 함께 한 부분이 사라지면서 공동이 생겼는데도 그랬다. 그 공동은 어떤 것으로도 메울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오기의 세상은 그럭저럭 굴러가리라.’(p.180) 아내, 후배이자 연인인 제이, 임용의 경쟁자였던 케이에게 가했던 배신들은 모두 오기의 발밑에서 균열을 만들고 있었지만 오기는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데 바쁘다. 


‘인류 최고의 지도인 바빌로니아 세계지도는 중심에 원이 뚫려 있었다. 학자들에 의해 컴퍼스로 지도에 원을 그리다가 생긴 구멍이라는 게 밝혀졌다. (중략) 그 좁고 검은 구멍은 이제는 찾을 수 없는 한 시대의 기억처럼 깊었다. 사라진 시대와 만나려면 저 구멍에 닿아야 했지만 결코 닿을 수 없으리라.’(p.181) 소설 <홀>은 자신이 남긴 인생의 공동으로 인해 삶의 ‘구멍’에 빠지게 된 한 남자의 궤적을 그렸다. 2014년 잠실 일대의 싱크홀 사건을 연상하게 하는 제목에서와 같이 200여페이지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강력한 흡입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전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주인공의 상황묘사는 집요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일상을 흔드는 균열과 그 징후나 기미가 느껴졌는데도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고 말하며1), 사회적 성취를 이룬 주인공이 오랜 균열을 인지하지 못해 가진 것을 모두 잃게 되는 과정을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중년의 위기는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에 배역한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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