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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Jul 14. 2022

다양한 직군의 인물로 구축한 시대의 단면

<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민음사, 2004)

1987년 중앙일보 희곡부문에 당선되며 등단한 정미경 작가(1960~2017)는 이화여자대학교 재학시절부터 이화 백주년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일찍부터 주목받는 재원이었으나 정작 작품 활동은 십 수 년이 지난 이후부터 시작하게 된다. 동양화가 김병종의 아내이며 두 아들의 엄마로서의 삶은 살던 그는 2001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비소여인’으로 소설가로 데뷔하고, 소설 <장밋빛 인생>으로 2002년 오늘의 작가상, 단편 <밤이여, 나뉘어라>로 2006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하며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반지하 원룸을 빌려 광부가 채굴하듯 글쓰기에만 전념하며 치열한 문학인생을 살았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정미경의 중, 단편을 묶은 작품집으로 6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헤어진 연인의 사진으로 인해 곤경에 빠지는 엑스레이 기사의 이야기 ‘나릿빛 사진의 추억’, 자신의 남루함을 상쇄하기 위해 소비의 연옥에 갇힌 방송작가가 등장하는 ‘호텔 유로, 1203’, 작가인 남편의 갑작스런 사망과 그의 뜻밖의 이면을 발견하게 되는 표제작 ‘나의 피투성이 연인’, 죽은 딸의 치료비로 빚만 남은 보험 사정인의 지독한 슬픔의 일상이 펼쳐지는 ‘성스러운 봄’, 주변의 사람들에게 비소를 먹여 보험금을 타는 여자의 이야기 ‘비소 여인’, 부유한 약혼자를 가진 출판 편집자가 번잡한 시장골목의 이웃들을 겪어나가는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작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군상과 그들의 몸부림을 통해 우리 시대의 단면을 분질러 보여준다. 


작품속 인물들은 현실의 무게에 버거워 하면서 나름의 필연적 선택으로 삶을 이어간다. 소설가 남편이 남긴 컴퓨터 속 파일의 M이라는 여자의 존재는 유선의 일상을 흔든다. 그의 일기를 출판해 생활비를 확보할 수도 있었지만 유선은 일기의 존재를 숨기고 남편을 영원한 자신의 ‘피투성이 연인’으로 남긴다. 존재하지도 않는 전 애인의 사진 때문에 조폭에게 협박받는 사진가는 결국 비슷한 사진을 다시 찍기로 마음먹고(‘나릿빛 사진의 추억’), 가난한 시장 통의 이웃들에 넌더리를 내던 출판편집자 정은은 어느덧 다감한 그네들에게 끌리지만 부유한 치과의사 약혼자를 떠나지 못한다(‘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빛나지 못할 것이며 저녁의 그림자처럼 사라질 거야. 너와 나의 틈 사이, 거기 희미한 빛이 있었을 뿐.’(p.244) 정미경 작가는 관계 사이에서 명멸하는 여러 감정의 끝자락을 포착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정미경의 인물들은 그 자신의 직업에 의해 많은 부분 정체성을 확립한다. 사진가, 방송작가, 도서관 사서, 보험 사정인 등  전문직종의 인물들을 묘사하는 작가의 서술은 집요하고 구체적이다. ‘제 빛을 잃었던 그 사진을 재현하려면 컬러보다는 흑백으로 찍어서 다시 토닝 처리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 박스 속엔 붉은색 토너도 있었고 인화용제, 그리고 픽서로 쓸 수 있는 D76도 보였다. 완벽했다.’(p.37) 전작 <장밋빛 인생>(2002, 민음사)의 광고계에 대한 묘사는 심사위원들이 전직 광고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하니, 투철한 자료조사와 치밀한 묘사로 인한 핍진성이 얼마나 공고히 확보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다양한 직업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정미경의 소설은 작가의 전직을 궁금하게 만들 정도로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와 현장감이 넘치지만, 반면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대표적인 페르소나와 같은 인물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많은 경우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십분 활용해 작품을 창조하기도 해 독자는 작품의 인물을 통해 지은이의 인생 궤적을 짚어보며 친밀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정미경의 인물은 독립적이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 듯하다. 작품 하나하나의 완성도는 높지만 그 안에서 독자가 알고 싶은 작가의 흔적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것은 어쩌면 대학교수의 아내라는 안온한 자리에 매몰되지 않고 반지하 원룸에서 치열하게 글쓰기를 이어감에 따른 반작용이 아닐까? 그의 작품은 탄탄한 서사와 현실에 발붙인 인물 설정으로 뛰어난 가독성을 가지며 독자를 사로잡는다. 타인에게 향한 작가적 관심을 자신에게도 돌렸더라면 우리는 좀 더 정미경이라는 작가에게 궁금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시대별로 당시의 사회를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찾는다면, 2000년대 초반의 작품으로 정미경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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