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오리 Apr 04. 2024

한 러시아 작가가 본 가족의 의미와 가치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문학동네, 2023)

우크라이나 최남단 흑해에 면해있는 크림반도는 동유럽과 러시아, 터키를 잇는 교통의 요지다. 고대에는 그리스인들의 무역거점으로, 중세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번국으로, 근대 이후에는 계속된 러시아의 위협으로 인한 첨예한 대립이 이루어 진 곳이기도 하다.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으로 동유럽에서는 잘 알려진 휴양관광지이기도 한 이 곳을 배경으로 러시아의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1943~ )는 1996년 한 편의 가족 서사시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을 발표했다.


주인공 ‘메데야’는 크림반도의 해변에 있는 병원에서 일하며 홀로 사는 그리스인 과부다. 자식은 없지만 휴가철이 되면 12명의 ‘시노폴리’가문 형제들에게서 태어난 서른 명 이상의 조카들이 그녀의 집을 방문해 북새통을 이루고 그녀는 그들을 모두 보듬는다. 오빠 ‘표도르’와 절친 ‘엘레나’ 사이에서 태어난 ‘게오르기’는 아내와의 불화를 피해 아들 ‘아르툠’과 함께 고모인 메데야의 집에 오고, 뒤이어 여동생 ‘알렉산드라’의 딸들인 ‘니카’와 ‘마샤’가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비탈진 초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시노폴리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가며 펼쳐진다. 메데야는 “젊은 친척 애들 사이에서 사랑의 고뇌가 벌어지고 있고, 그래서 대기가 온통 그들의 서로에 대한 갈망으로, 영혼과 육체의 섬세한 움직임으로 가득”(p.113)하다는 느낌에 휩싸인다. 이웃 농장의 ‘노라’는 게오르기를 의식하며 그의 주변을 맴돌고, 니카와 마샤는 새 이웃 ‘부토노프’를 향한 욕망과 연정을 불태운다. 남편 ‘사무일’과의 결혼생활을 떠올리며 메데야는 어떤 가치판단도 하지 않고 그들 모두를 지지하며 돌본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행복했지만, 남편이 죽은 후 발견된 여동생 산드라의 편지를 통해 메데야는 그들의 불륜을 알게 된다. 쓰린 마음을 안고 올케이자 친구인 엘레나를 만나기 위해 먼 타슈켄트까지 달려간 메데야는 그녀 또한 비슷한 아픔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연민을 느낀다.


그리스 신화 속 ‘메데이아’는 이아손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를 배신하고 남동생까지 죽인다. 이아손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 하자 그녀를 독살하고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까지 죽여 버림으로서 메데이아는 복수에 매진한다. 하지만 소설 속 메디야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용서와 화해를 실천한다. “그녀가 아이들을 기르고 일하고 기도하고 단식하며 보여주었던 저 조용한 고집은 그녀의 이상한 성격적 특성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떠안은 의무, 어느 곳 할 것 없이 모두가 오래전에 폐기한 율법의 실천이었다.”(p.246) 울리츠카야는 메데야를 통해 핵가족을 지나 1인가족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가족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피로 연결된 혈육 뿐 아니라 입양과 혼외로 얻은 자식 또한 메데야의 가족 안에 포섭되고 공동체의 울타리는 넓어진다. 심지어 메데야는 자신의 집조차 피를 나눈 조카나 친척이 아닌, 크림반도에서 쫓겨난 타타르인 ‘라빌’에게 물려준다. “메데야의 가족에 속한다는 것, 안면조차 없는 수많은 구성원이 일어난 것과 일어나지 않은 것, 그리고 도래할 것의 아득한 풍경 속에서 사라져가는 그런 대가족에 속한다는 것. 이건 놀랍도록 즐거운 느낌이다.”(p.388) 메데야가 죽은 후에도 그녀의 후손들은 러시아인, 리투아니아인, 그루지야인, 고려인 할 것 없이 메데야의 마을을 방문함으로서 느슨한 가족 공동체를 유지한다는 결말은 작가의 확장된 인류애에 대한 희망으로 읽힌다. 


소설 곳곳에 포진한 혁명, 전쟁, 강제이주 등 크림반도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사실들이 종종 등장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크림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대한 설정과 묘사는 메데야의 모성과 가족의 결속을 이미지화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식 인명의 많은 등장인물은 초반 독해의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면 중반 이후에는 좀 더 편하게 읽을 수 있다. 한 사람이 짊어져야 했던 인내와 희생에 대해 혹자는 지속가능할 수 없는 가치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한 러시아 작가의 소설을 통해 느슨한 가족 공동체가 주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러시아 어머니의 인내와 희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