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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Jun 07. 2024

유럽에 뿌리를 둔 ‘실무자’의 창작론

<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민음사, 2013)

“소설가 각자의 작품에는 소설의 역사에 대한 어떤 함축적인 통찰이,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 또한 바로 내 소설들에 내재한 이 ‘소설에 대한 생각’이었다.”(서문)


에세이 <소설의 기술>(1986)은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으로 잘 알려진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1929~2013)의 창작론이다. 그는 <농담>(1967)을 시작으로 <생은 다른 곳에>(1969),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불멸>(1990) 등의 소설을 집필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쌓는다. 에세이와 대담, 연설문 등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자신의 소설세계에 대한 쿤데라제(製) 나침반이다.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의 유럽 위기론으로 시작된 책은 앎에 대한 열망으로 소설의 존재이유를 설명한다. 쿤데라는 유럽의 철학사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소설의 위치성을 언급하며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이라며 ‘소설이 유럽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쿤데라의 유럽 중심주의는 프랑스 작가이자 문학평론가인 크리스티앙 살몽과의 대담에서도 드러나는데, 소설의 독해를 위해 유럽의 역사가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우리는 유럽 역사의 일부고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우리 모든 행위의 결정적 의미는 유럽 역사와의 관련을 통해서만 드러납니다.”(p.60)


쿤데라의 소설론은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헤르만 브로흐(1886-1951)에 대한 단상으로 이어진다. 그는 브로흐의 작품 <몽유병자들>(1931)을 통해 비합리적인 인간의 역사속에서 인물들이 갖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삶이라는 기이하고도 혼란스러운 재료’에서 비인과적이고 예측할수 없는 사람들의 행위가 소설을 통해 어떻게 펼쳐지는지 서술하며 ‘소설형식의 심층적인 변화’가 모더니즘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브로흐가 의도했음에도 이루지 못한 기법 중 하나인 ‘소설적 대위법’-다른 요소들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기법-은 쿤데라의 작품에서 다성적(polyphonique) 구조로 실현되며 소설 형식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카프카적(Kafkaesque)’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체계에 대한 쿤데라의 통찰 또한 주의깊게 읽을만한 부분이다. 비인간적이고 혼란스러운 사회적 상황과 개인의 무력함, 비철학적 관료주의를 묘사했던 프란츠 카프카(1883-1924)를 통해 쿤데라는 소설이 어디까지 사회적, 정치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 역설한다. “내가 카프카의 유산에 이토록 열렬히 집착하는 것이나 그것을 내 개인적 유산으로 옹호하는 것은, 모방할 수 없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의 소설들이 바로 소설의 근본적인 자율성의 모범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p.168) 쿤데라는 거대한 행정조직 속에 고용된 구성원들의 복종을 통해 현대의 인간조건을 말했던 카프카의 세계를 계승하며 정치적, 사회적, 철학적 탐구를 결합해 소설로 풀어냈다. 


쿤데라는 원래 체코어로 글을 썼지만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더 이상 체코의 독자들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작품이 번역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어로 글을 쓴 쿤데라는 언어에 대해 민감한 감수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6부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은 쿤데라의 작품에 대한 열쇠어, 문제어, 그리고 좋아하는 단어들의 개별적인 모음집이다. 자신의 작품에서 사용되었던 단어들과 개념들,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에서 느끼는 단상들을 통해 쿤데라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쿤데라에게 소설은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를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p.191)으로, 그 뿌리는 남부 유럽에서 형성되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럽 바깥까지 넓혀 간 것을 의미한다. “소설이 발견해 낸 것들이 여러 언어로 쓰였다 하더라도 결국 유럽 전체에 속한다”(p.15)는 그의 주장은 유럽 중심주의의 편향된 세계관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인간 실존에 대해 성찰하고 탐구하는 그의 작품세계가 세르반테스에서 카프카로 이어지는 문학적 흐름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을 통해 독자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을 보다 가깝게 응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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