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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광 Jan 26. 2023

효도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애증의 부친과 고군분투 여행 일지.

"아무튼 고맙고 수고했다"


부친과 오키나와엘 다녀왔다. 첫날 저녁에 도착한 이자카야에서 생맥을 시키고 셋이서 건배를 하는데 부친이 첫 말을 뗀다. 부친에게 고맙다는 말, 수고했다는 말을 제대로 들은 날이었다.


부친과 여행을 계획했던 5년 전. 나와 그는 그닥 접점이 없었다. 여느 아버지와 아들 처럼 데면데면 한데다 나이도 나이인지라 나에겐 고리타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와 그 당시 여행을 갔다면 그리 좋은 기억이 되지 못 했을 거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갑작스럽게 내가 제안 했지만 그런 나의 제안에 그는 일말의 고민 없이 오케이를 때렸다. 이전에 파토난 여행 때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리고 여행 직전 파토를 낸 바람에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왔던 게 기억난다. 


"가자고 할때 안 가고 이제와서는 무슨"


친구네 자식들은 환갑이라고 가족 여행도 가고 혹은 시간 보내고 오라며 돈봉투도 넣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건넨 적이 있다. 그리고 그에게 이야기 했다. 가자고 할 때 안 가고 이제와서 무슨 이야길 하시냐고. 혼자 사업을 하다보니 거래처 눈치도 봐야하고 거래명세서 정리도 해야 하느라 어쩔 수 없다고 답변은 했지만, 영 파이였다. 


.


부친은 식도락가다. 미식가라고도 할 수 있지만 40여년이 넘는 동안 운전을 하고 돌아 다니면서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고 요리도 따라 해보던 그였다. 그런 그가 오키나와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많지 않은 양으로 다양한 걸 먹어 볼 수 있었다는 거다. 그렇다고 많은 음식을 시킨 것도 아닌데 음식이 나올때마다 이건 어떻게 만들었고 어울리는 음식과 술은 무엇인지 혼자 썰을 푼다. 기분이 묘했다. 내가 친구들을 만날 때 그렇게 하고 있었던 모습이 스쳐갔으니까.



"식사 하시고 낚시점 가시죠?"


부친은 일본엘 가면 꼭 들러 보고 싶다고 한 곳이 있었다. 낚시 용품점이다. 부모 세대가 코끼리 전자제품이라면 물개 박수를 치듯, 부친은 낚시 용품은 일제가 최고라고 연실 입에 달고 있었다. 여행 전부터 그의 바람이라, 값싼 벤또 집에서 끼니를 챙기고는 낚시점을 갔다. 


부친은 낚시점에 들어서자마자, 사내 아이가 장난감 집을 들어선 것 마냥 '오우 씨'를 남발 했다. 하나씩 만져 보고 펴 보기도 하고 신기해 하고 갖고 싶어했다. 이미 작정하고 들어온터라 낚시대 하나 사시라며 권했더니 어느 한 코너에 머문다. 만지작 거리더니 싼마이 하나 사잰다. 저렴한 코너에서 물건을 고르는 동안 그가 만지작 거리던 낚시대를 보았다. 시바, 존나 비쌌다.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시라 하니, 한사코 거절하고 3만원 짜리 쪼매한 낚시대 세트를 구매했다. 그리고는 곧장 근처 바다로 나가 남자 셋이 낚시를 했다. 


.


도착 첫날 오키나와 공항에서, 부친은 호기롭게 내 앞에 서더니 입국 빠꾸를 맞았다. 여권은 한국인인데 정보를 일본인 정보로 넣어 입국 거부를 당했다. 내 옆에 계시라 하고 심사대 앞에서 상황 설명을 듣고는 처리를 했다. 오키나와에 도착하고는 부친에게 이야길 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개인 행동 하지 말것, 저녁 시간에 혹은 낮에 나 혼자 개인 시간을 보내겠음. 그 두 가지는 부친과 동생에게 신신당부 했다. 효도 관광 자체를 그나마 마무리 지으려면 나도 환기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뛰었다. 뛸 수만 있다면 짧은 거리도 측정하지 않고 달렸다. 그래야 뭔가 상쾌한 기분으로 부친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친은 나에게 엄격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정글 같은 사회에서 어떻게 영업하고 사람을 끌어 들일지 알려 주었다. 물론 방법이 상당히 쌍팔년도스러운 스킬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일, 드럼을 계속 치고 싶었던 그 중고등학교 때 대찬 반대를 줄곧 했었다. 실기 시험을 마치고 학교에 합격하던 날, 그걸로 좋아해서 될일이 아니라는 그의 말에, 한번 죽자고 덤볐다. 싸우고 맞고 애증의 관계가 쉬이 끊이지 않았다. 마치 서로가 서로를 버려진, 버린 물건 취급을 했다. 



수고하신 우리 부모님.


그거 참 좆같은 변명이다. 이번에 부친과 여행하면서 하나 알게 되었다. 내가 당신에게 쏟을 수 있는 애정은 여기까지라는 것. 마지막을 아는 애정을 표현하니 무언가 씁쓸함과 '수고하신 우리 부모님'과 같은 좆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알았다. 아 시바, 나 부친을 존나 좋아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미워 했구나. 그리고 부친 당신도 나를 그렇게 험담하고 다녔구나. 그냥 서로 좋아 했던거다. 증오가 심한만큼 좋아했떤 마음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듯이.



"고맙고 미안하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고서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손을 먼저 내밀고는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나에게 전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당황스러웠다. 먼저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이야기할 저런 양반이 아닌데 전혀 다른 모습을 보니, 당황했다. 


고마웠다.


아직 살아 있어줘서. 효도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당신을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에. 이건 내가 새로이 받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도, 확실히 알았다. 난 부친을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삶도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나에게 먼저 내밀어준 그 손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생각보다 따뜻하고 조금은 반가웠다. 오해는 그렇게 풀어 가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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