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귀 기울임 사이에서
세상은 질문으로 가득하다.
질문은 우리가 생각보다 더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질문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그것도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를 뿌리부터 흔드는 질문.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물음을 꺼낸 이는 율법에 능한 사람이었다. 율법교사. 히브리어로는 ‘소페림’ 혹은 ‘토라의 서기관’이라 불리던 이들. 그는 단순한 법률 해석자가 아니었다. 성전 바깥에서 율법을 해석하고 판결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말솜씨와 기억력, 판례의 응용 능력으로 주목받던 자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경외했다. 그가 지나가면 길을 내주었고, 시장터에서는 그의 말 한마디에 다툼이 멈췄다. 예배 때 앞자리에 앉았고, 그가 성전을 드나드는 걸 보고 아이들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는 ‘말’로 사람을 살릴 수도, 매장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사람들 앞에서 예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내가 만난 이들 중 몇 사람은 이 순간을 ‘시험’이라 했다. 진실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상대를 넘어뜨리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율법을 어기는 말을 내뱉도록 유도해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은 이도 있었다.
“그도... 알고 싶었겠지. 자기가 평생 붙잡고 있던 법이 정말로 생명을 주는지 아닌지.”
그는 술 한 잔 앞에 두고 그렇게 말하곤, 손끝으로 잔의 물방울을 닦아냈다.
“모든 걸 알아도, 단 하나의 확신이 없을 수 있어. 그는 묻고 싶었던 거야. 이 법이... 나를 살릴 수 있는 건지.”
예수는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되묻는다.
“율법에 뭐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의 대답은 이랬다.
“하느님을 사랑하라.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그리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명쾌했다. 예수도 그를 칭찬했다.
“맞다. 그렇게 살아라. 그럼 살 것이다.”
대화는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질문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그 질문은 자칫 ‘이웃’의 경계를 설정하려는 의도로 보일 수도 있었다. 어디까지가 나의 책임인가? 누구까지가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인가? 하지만 이 이야기의 정점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 아니 이야기였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그 길은 위험했다. 바위가 날카롭고, 구불구불한 절벽길. 그늘 하나 없는 길에서 마주친 강도들은 누군가를 반죽음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누군가는 그 길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를 처음 지나친 사람은 제사장이었다. 멀리서 그를 보았고, 길을 피해 지나쳤다. 다음으로는 레위인이 있었다. 역시 그를 보고, 그냥 지나쳤다. 둘 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정결법과 율례를 생명처럼 여기는 이들이었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거야. 피를 만지면 부정해진다고 했으니까.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돼. 하느님의 일을 못하게 된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거기 있었다. 누워 있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피를 흘리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갔다. 그는 그를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피 묻은 몸을 씻기고, 자신의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씻었다.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하룻밤을 지내며 그를 돌봤다. 다음 날엔 여관 주인에게 돈을 맡기며 말했다.
“이 사람을 잘 돌봐 주세요. 부족한 게 있으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말을 다 마친 후,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었을까?”
그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불쌍히 여긴 자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서 너도 그렇게 살아.”
이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이웃을 사랑하라 했을 때, 대체 누구까지 사랑하란 말입니까?”
경계 짓기는 너무나 익숙하다. 동족과 타인, 가까운 이와 멀리 있는 사람, 종교가 같은 이와 다른 이. 그러나 예수가 말한 이웃은 그런 선을 넘어섰다. ‘누가 내 이웃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에게 이웃이 될 수 있는가’였다.
그것은 기존의 윤리를 거슬렀고, 경계를 넘었으며, 제사장과 레위인의 ‘올바름’을 침묵하게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예수는 조용히 물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었느냐?”
율법교사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택한 단어는 이상할 만큼 돌려 말한 표현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를 불쌍히 여긴 자입니다.”
'사마리아인' 그 이름 석 자는 끝내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율법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정결하지 못한 자였고, 유대인의 역사에서 분열과 오염을 상징하는 이방의 잔재였다. 그 이름은 오랫동안 배척과 저주의 대상이었고, 매일 아침 기도문에서는 ‘나와 내 후손이 사마리아인처럼 되지 않게 하소서’라 외우던 대상이었다.
그 이름을 인정하는 것은, 그 자비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 자비가 진정한 의로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삶과 신념 일부를 해체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순간, 그 이름을 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부정하지도 않았다. 멀리 돌아서, “그를 불쌍히 여긴 자”라고 말했다.
그 말에는 고백처럼 섞인 체념이 있었고, 어쩌면 약간의 떨림도 있었다. 부끄러움과 경외, 인정과 저항이 뒤엉킨 침묵의 언어였다. 이 말을 들은 어떤 노인은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한 게 아니야. 그를 통해 우리가 구원받은 거야. 그 사람의 자비가 우리를 부끄럽게 했으니까.”
나는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가르침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자비는 고개를 숙이게 한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어쩌면 사랑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또 다른 날, 다른 마을에서 나는 또 다른 선택의 장면을 들었다 그날 이후, 예수는 어느 마을로 들어섰고, 한 집에 초대받았다. 그 집은 자매가 함께 살고 있었다.
마르다와 마리아.
마르다는 분주했다.
손님이 오면 준비할 것이 많다. 물을 데우고, 손을 씻을 수 있게 하고, 음식을 마련하고, 자리를 펴고, 숟가락과 잔을 준비해야 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혼자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 앞에 앉아,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 말없이. 방해하지 않고. 그저 듣고 있었다. 결국 마르다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제 동생이 저를 돕지 않는데, 좀 말씀해 주세요.”
그 순간의 공기를 누군가 묘사했다.
“마치... 부엌의 김이 갑자기 식은 것 같았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도 없이, 정적이 감돌았어.”
예수는 마르다를 다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부드럽게 말했다.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분주하지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야.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어. 그리고 그것은 빼앗기지 않을 거야.”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일을 멈추고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이 왜 더 좋은 선택인가. 사람들은 다르게 말했다. 누군가는 마르다가 없으면 예수도 배고플 거라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마리아가 여인으로서 앉아 듣는 그 자세 자체가 신성모독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내게 조용히 말했다.
“그때 예수가 마리아에게 준 자리는, 여자가 앉을 수 없었던 자리야. 스승의 발치에서 배우는 자리는 남자들만의 자리였거든. 그녀는 거기 앉았고, 예수는 그걸 허락했지. 아니, 그걸 ‘좋은 것’이라 했어.”
나는 마르다의 마음도 이해했다. 혼자 분주한 사람의 마음. 손은 바쁘고, 눈은 동생을 향하고, 입은 말 대신 한숨을 삼키는 마음. 그 마음이 나도 때때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예수는 마리아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자리를 인정했다. 그녀의 선택을 가장 귀한 것으로 보았다.
사마리아인은 손을 내밀었고, 마리아는 귀를 기울였다. 그날 나는 이 두 이야기를 엮으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야기는 격렬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밀쳐내지도, 소리 높여 외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조용한 손길과 고요한 귀 기울임이,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는 전부였다.
사마리아인은 경멸받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 깊은 자리에 손을 내밀었다. 마리아는 주변의 시선을 알면서도,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둘 다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손을 내미는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귀를 기울이는가.
모두가 말하려 하고, 보여주려 하는 시대다.
무언가를 주장해야 존재할 수 있는 시대, 조용히 다가가는 이들은 오히려 오해받기 쉬운 시대다.
하지만 내가 만난 이들 중,
정말로 사람을 살린 이는
소리치지 않고 손을 내민 사람이었고,
판단하지 않고 말을 들어준 사람이었다.
벼랑 끝에 있는 이들은 자주 묻지 않는다.
다만 누가 내 곁에 서 있었는지를 기억한다.
영생.
그 단어는 늘 너무 멀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들린다. 영생은 어쩌면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하며, 내가 있는 자리에서 눈을 들어 타인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이미 와 있는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조심스레 수첩에 옮겨 적었다.
언젠가 나처럼 묻는 누군가에게,
이 짧은 문장이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웃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몫은 선택하는 자의 것이다.”
그리고 한 줄을 덧붙였다.
“그 선택은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초대와 같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10:25-42"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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