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6 – 뻔뻔한 기도, 잊혀진 이름을 부르다

그의 기도는 잊힌 이름을 다시 거룩하게 만들기 위한 오래된 싸움이었다.

by 나그네 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말했다.


예수는 기도로 숨 쉬던 사람이었다고. 사람들 속에 있어도, 언제든 혼자만의 자리로 물러났다고. 그건 회피가 아니라, 마치 다시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처럼 보였다고 했다. 나는 그 침묵이 궁금했다. 누군가에게 기도는 말이지만, 그에게는 생존처럼 보였다. 말없이 나아가고, 말없이 돌아와 무언가를 바꾸는 사람. 기도는 그의 가장 깊은 언어였다. 그래서 나는 그가 어떻게 기도했는지, 그리고 왜 기도를 가르치려 했는지를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한 제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긴 침묵 끝에 조심스럽게 내게 입을 열었다.


“그는 기도할 때 혼자였어요. 사람들 틈에 있을 때도 그렇고, 광야에 나가 있을 때도 그렇고... 그는 꼭 어디론가 빠져나가더군요. 마치 그 순간만큼은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자리로 들어가는 것 같았죠.”


나는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기도하는 사람은 알아요. 저건 그냥 말하는 게 아니구나, 저건... 숨 쉬는 거다,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예수는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사람인 듯했다. 기도는 그의 생존방식처럼 보였다고 했다. 사람들 속에서 일하고, 가르치고, 손을 잡아줄 때조차도, 그는 언제든 조용히 자리를 떠나 하늘을 향해 침묵을 열었다. 그게 불편하거나 예외적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든 활동이 그 조용한 기도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았다.


제자들 중 한 사람이 그런 예수의 모습을 수없이 보며,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물었다고 한다.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줬습니다. 우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십시오.”


그 말은 단순히 형식을 배우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그 ‘숨결’에 닿고 싶었던 것이다. 그 기도 속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직감했고, 그로부터 오는 평화나 확신이 자신도 모르게 부러웠을 것이다. 그때 예수는 가만히 앉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나라가 임하소서.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듯,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너무 짧은 기도였다. 정돈되어 있었고, 꾸밈이 없었다. 그 간결함 속에 깊은 울림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 기도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다시 곱씹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친밀함으로 기도의 문을 여는 방식이었다. 그 시대에 하느님을 그렇게 부르는 건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고, 거기엔 인간을 향한 거리감 없는 접근이 있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이 말이 단지 하느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바란다는 표현만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더럽혀진 이름, 포로가 되어 울부짖던 사람들의 신음 속에 잊혔던 이름이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이 자기 형제인 노예들을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다시 종으로 삼았던 죄를 고발했다. 그런 죄악이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그는 말했다. 예언자 에스겔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이 더럽혀진다는 건 단순한 명예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가 사람들 안에서 사라지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 기도는 단순히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다시 정당하게 회복되기를, 포로 된 자들이 풀려나고, 압제하는 자들이 회개하기를, 그로 인해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탄원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말—‘나라가 임하소서’—는 그 회복이 이 땅 위에서 실현되기를 기도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때 당시 유대인들이 머리로만 알고 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시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의 도래였다. 예언자들이 말했던 바로 그날, 더 이상 억눌림이 없는 날. 예수는 그날을 기도 속에 담았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단다.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이건 단순히 생존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사람은 매일 살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 ‘양식’은 이틀 치가 아니고, 한 달 치도 아니다.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것. 예수는 사람들에게 오늘을 살아내는 기도를 가르쳤다. 그것은 내일을 미리 염려하지 말라는 말과 통했다. 날마다의 빵을 구하라는 건, 하느님이 인간의 육신을 돌보시는 분임을 믿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 빵은 동시에 구원의 상징이기도 했다. 구원은 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고픔의 한가운데에서 시작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시고.”


이 문장은 복잡하다. 사람 사이의 빚과 하느님 앞의 죄가 한꺼번에 언급된다. 실제로 ‘죄’는 당시 언어로 ‘채무’와 같은 단어였다. 예수는 용서를 돈의 탕감에 비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떤 주인이 종의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주는 이야기도 그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하느님은 구약 율법에서 7년마다 가난한 자의 빚을 탕감하도록 명령하셨다.


예수는 그렇게 말한 것이다. 사람 사이에 용서가 없다면, 하느님의 용서도 흐르지 못한다고. 미움은 가난을 낳고, 원망은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한다. 그래서 그는 덧붙였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이는 단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사람을 시험에 빠뜨리는 건 대개 미움과 물질, 그리고 풀리지 않은 마음이었다. 예수는 그런 것들에서 해방되는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의 기도는 해방의 기도였다.


기도의 가르침을 마친 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하나의 비유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너희 중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길 ‘떡 세 덩이만 빌려줘.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나를 찾아왔는데, 줄 것이 없구나’ 하면, 그 벗이 안에서 ‘문은 닫혔고, 아이들과 함께 누웠으니 줄 수 없어’ 하겠느냐?”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말이다. 문은 닫혔고, 가족이 자고 있다. 하지만 그가 계속 문을 두드린다면, 계속 요청한다면, 그 친구는 결국 일어나 줄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그의 뻔뻔함 때문이다.


예수는 그 ‘뻔뻔함’을 기도의 미덕으로 말했다. 그건 민폐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는 절박함이었고, 절박함은 신뢰를 동반한 기다림이었다. 하느님은 절대로 귀찮아하지 않으신다고 그는 말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찾으라. 그러면 찾게 될 것이다.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세 단어—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모두 당시 율법과 전승 속에서 기도와 동일한 뜻으로 통했다. 탈무드는 기도를 ‘문을 두드리는 행위’로 표현했다. 예수는 그 언어를 빌려, 하느님과의 교감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하나 더 덧붙였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 하지 않느냐.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느님은 생선을 달라는 아이에게 뱀을 주지 않는다. 알을 달라 했을 때 전갈을 건네지 않는다. 사람도 그러한데, 하느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성령’을 주신다고 말했다. 그것은 단지 위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예수의 말이 끝나고도,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마무리되었을 때, 예수는 즉시 삶의 구체적인 장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말로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눈앞에서 벌어지는 실제 삶 속의 기도, 그것이 응답되는 방식, 그리고 그걸 둘러싼 갈등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날 예수는 말 못 하는 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 나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증언은 명확했다.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 얼굴에는 오랜 시간 억눌린 자의 침묵이 드리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서 귀신이 떠나간 순간, 입이 열리고, 말이 터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또 다른 의심의 시작이 되었다.


사람들 중 일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바알세불, 귀신의 우두머리의 힘을 빌렸겠지.”


나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었다. 축귀, 즉 귀신을 내쫓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건 그 사회 전통에서도 인정되는 일이었다. 심지어 당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중에도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왜 예수의 행위만 마귀의 힘을 빌린 일로 보는가?


나는 그 대답을 그들의 두려움에서 찾았다. 예수가 축귀를 행함으로써 보여주는 ‘권능’은 기존 질서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질서는 조용히 예배당 안에, 율법 책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 권능을 사람들 속에서 풀어냈다. 그게 그들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예수는 그 말들을 듣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고 한다.


“스스로 분열된 나라는 설 수 없다.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다면, 그의 나라는 이미 무너진 것이다. 내가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았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으로 하는 것이냐?”


그 말에는 날카로운 질문이 담겨 있었다. ‘귀신을 내쫓는 행위’ 자체는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그 힘의 출처에 대한 해석이었다. 예수는 그 힘이 ‘하느님의 손’에 있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가운데 임했다는 선언을 함께 내렸다.


하느님의 나라는 단지 언젠가 올 미래의 개념이 아니었다. 그가 지금 행하는 일, 사람을 묶고 있던 귀신이 쫓겨나고, 입이 열리고, 눈이 뜨이는 그 장면 자체가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이어서 또 하나의 비유를 덧붙였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는 그 소유가 안전하다. 그러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공격하면,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눈다.”


이야기는 간단했다. 한 사람이 무장을 단단히 갖추고 집을 지킨다. 그는 자기의 세계, 자기의 방식, 자기의 질서를 믿는다. 하지만 더 강한 자가 오면, 그 모든 안전은 무너진다. 이 비유는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나는 생각했다. 이스라엘 전체였을까? 아니면, 사탄 자체였을까? 아니면 하느님 없이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교만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예수는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흩는 자다.”


이 말은 지나치게 명확했다. 중립은 없다. 경계는 흐릿하지 않다. 기도는 그 경계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선택하는 일이다.







예수의 말은 가끔 멀리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앞선 이야기들에서 그는 기도에 대해 가르쳤고,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임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 꺼낸 이야기는 조금 의외였다. '귀신을 내쫓는 행위'와 '하느님의 나라', 용서와 양식에 관한 말들이 마무리된 듯 보였는데, 그는 다시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더러운 귀신 하나가 어떤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그는 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며 방황한다.”


그의 말은 마치 여행자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곧 드러났다. 그 ‘귀신’은 어디론가 떠났지만, 여전히 돌아올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존재였다.


“그는 결국 말한다. ‘내가 떠났던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 멈춰 서게 되었다. 귀신이 떠난 사람. 그는 분명 나아진 사람이다. 더 이상 말 못 하는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눈빛도 또렷해졌으며, 제 목소리를 되찾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를 회복된 자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귀신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집은 청소되어 있고, 정돈되어 있고, 수리까지 되어 있었다.


이 말이 섬뜩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바로 그 상태가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정리된 집, 어지럽지 않고 조용한 공간. 하지만 예수는 그것을 ‘위험’으로 말한다. 그 집은 비어 있었고, 누군가의 통치도 없었고, 문도 굳게 닫혀 있지 않았다.


그 빈 집을 본 귀신은 기뻐한다. 그리고 혼자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돌아온다.”


그 말은 일종의 반전을 품고 있었다. 정리되고 회복된 것처럼 보이던 삶은, 하느님의 통치 없이 그저 ‘비어 있는 상태’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귀신이 나갔다는 사실에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나아졌다, 회복되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말한다. 그 상태가 더 위험하다. 축귀는 ‘시작’ 일뿐, 그다음을 채우지 않으면 결국 더 깊은 파괴로 향하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이전에 들은 다른 이야기들과 조용히 연결되었다. 그가 기도를 가르칠 때 말했던 것들. 미움, 물질, 용서받지 못한 마음들이 사람을 시험에 빠뜨린다고 했던 그 이야기. 그것들이 정확히 여기에 다시 돌아온다.


사람은 미움을 떨쳐낸 뒤에도, 사랑을 채우지 않으면 다시 미움을 불러들인다. 탐욕을 내려놓았더라도, 그 자리에 절제나 감사가 없으면 다시 탐욕이 들어온다. 죄를 회개했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으면, 그 죄는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은 자유는 언제나 되찾긴 쉽지만, 지키긴 어려운 법이다.


그리고 그가 이 이야기를 마쳤을 때, 무리 중 한 여인이 갑자기 외쳤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그 외침은 낯설지 않았다. 감탄이었고, 축복이었으며, 동시대의 문화 속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생물학적으로 예수를 낳은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경외. 그 여인은 어쩌면 이렇게 말한 것이리라. ‘그 어머니는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이런 분을 낳았으니.’


하지만 예수는 그 말에 맞서 이렇게 대답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그는 혈연의 복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보다 더 깊은 복의 자리를 말했다. 누군가를 낳았다는 생물학적 기원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삶의 방향이 더 중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 말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나에게도 열려 있는 문장이었다.

예수를 낳은 여인은 단 한 명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는 수없이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호했다. '귀신을 내쫓는 행위'는 끝이 아니라고.
회복은 목적지가 아니라고.
진짜 복은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것이라고.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기록하며 오래 머뭇거렸다. 누군가의 삶을 따라가는 일은,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예수처럼, 기도 속에서 모든 것을 시작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려 할 때, 나는 자주 내 안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도는 그에게 행위 이전의 행위였다. 말보다 먼저였고, 행동보다 앞섰으며, 기적보다 더 깊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단지 개인적인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그분의 이름이 다시 거룩하게 여겨지도록, 압제받는 자들이 해방되도록, 그렇게 세상의 중심을 바꾸는 기도였다.


기도는 어쩌면, 이름이 더럽혀진 시대에서 다시 하느님의 이름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기도양식 없는 사람들에게 날마다 필요한 것을 구하게 하는 믿음이었다. 기도미움과 원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용서의 문을 열어주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기도아직 응답받지 않은 자리를 끝까지 두드리는 뻔뻔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용기였다.


나는 그가 들려준 비유들을 하나하나 되새겼다.
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친구,
뱀과 전갈 대신 생선을 구하는 아이,
귀신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정돈된 빈 집,
그리고 ‘복된 자’에 대한 그의 마지막 말.


그 모든 말은 흩어진 퍼즐처럼 보였지만, 한 가지만 분명했다. 그는 우리 안에 무엇이 채워져 있느냐를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오고 있는 지금, 그 나라는 누구에게 임하고 있으며, 그 나라는 어떻게 우리 삶 속에 자리를 틀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적으며 한 가지 생각을 했다.


기도는 결국 ‘채움’의 언어였다.


구하는 것은 내 안이 비었음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찾는 것은 그 빈 곳에 하느님의 손이 닿기를 바라는 갈망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것은, 닫힌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이었다.


그는 기도를 통해 포로 된 자가 풀리는 세상을 꿈꾸었고, 그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이름이 회복되는 순간을 준비했으며, 그 기도를 통해 다시 침입하려는 악함을 막아낼 방패를 세웠다. 기도는 ‘빈 집’을 만들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귀신은 나갔지만, 그 안이 비어 있다면 언제든 더 강한 악이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귀신을 내쫓는 행위'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워진 삶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복된 자는, 그를 낳은 어머니가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였다.


그리고 그 기도는 언제나 다른 이야기들과 함께 걸었다. 뱀과 전갈을 피하는 일, 악한 자로부터 벗어나는 일, 침묵의 귀신이 떠나간 자리에서 진짜 말이 시작되는 일.


나는 그를 본 적이 없다. 그를 직접 만난 사람도 아니고, 그 곁을 걸은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기도하던 그의 뒷모습에 대해 말해주는 이들의 침묵 속 이야기를 모아 적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수많은 이들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기도할 때, 모든 전쟁이 잠잠해졌어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기도는 조용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안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가운데, 그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이 땅의 어둠 속에서, 이름이 더럽혀진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시 시작되도록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싸움은 결국 그 사람을 통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가르쳐준 그 짧은 기도는 여전히 나를 깨우고 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나라가 임하소서...’


그 기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기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11:1-28"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기도의숨결 #누가복음묵상 #예수의기도 #주기도문 #하느님의나라 #말씀으로채움 #영적채움 #하느님의이름 #포로된자들의해방 #말씀을따라사는삶 #기도하는사람 #삶과기도 #영적전쟁 #빈집의위험 #성령을구하라 #두드리는기도 #기도의용기 #하느님의응답 #묵상의시간 #복된삶이란 #말씀을듣는자 #사랑의기도 #신앙의깊이 #예수의가르침 #묵상하는삶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05화Day 35 – 벼랑에서 만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