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도, 사랑도 없는 신앙은 왜 사람을 다치게 하는가
사람들이 모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예수를 보기 위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그의 손끝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일들을 경험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주 모였다. 갈릴리에서든, 예루살렘 변두리든, 어디든 예수가 머무는 곳이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둘 모여들었다. 목소리를 높여 예언자의 말씀을 외치는 이가 나타났다고 들었고, 병든 이가 일어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며, 바람도 잠재웠다더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기대였고, 누군가에겐 호기심이었고, 누군가에겐 불편함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무언가 달랐다. 군중의 표정에 옅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누군가가 손에 작은 돌멩이를 굴리고 있었고, 다른 이는 팔짱을 낀 채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아이를 안고 온 여인은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느라 아이의 울음을 미처 달래지 못했고, 젊은 청년 둘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누군가의 눈에는 흥분이, 또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의심이 스쳐갔다.
설렘이라기보다는 탐색과 의심이 먼저였다. 이 사람, 과연 진짜인가? 들은 만큼의 사람인가? 더 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오늘은, 정말 확실한 무언가를 보여주려나?
사람들 틈에서,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손에는 낡은 양피지 조각과 잉크가 묻은 펜이 들려 있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속삭임과 한숨들, 발끝으로 채이는 먼지들까지 나는 가능한 한 자세히 기록해 두고 싶었다. 작은 일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찾고 있는 이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지를 가리키는 진실의 편린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어떤 표적을 보여주실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한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런 말을 건넨 이가 하나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중 사이에서는 작은 대화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에는 귀신 들린 아이가 나았대. 이번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으려나?”
“기적이라면 기적이지. 그 정도면 진짜지 않겠어?”
“아니야, 진짜라면 로마 병사들 앞에서 하늘을 갈라야지. 보여줘야 믿지.”
그들은 예수를 시험했고, 또 기대했다. 기대는 늘 바란 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곧 실망이나 분노로 바뀌곤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빠르게 선동으로 자라났다. 예수를 중심으로 웅성거리는 군중은 그날도 또 하나의 '기적'을 원하고 있었다. 이미 들은 적 있는 이야기, 이미 치유된 사람의 증언 따위는 그들에게 오래된 소문일 뿐이었다.
그러다 예수가 입을 열었다.
“이 세대는 악하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말끝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에 이상한 긴장감이 흘렀다. 예수는 말하였다. 이 세대는 표적을 구하지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요나. 그 이름에 누군가는 머리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조용히 기록을 위해 노트 조각을 펼쳐 들었다. 갈릴리 출신의 어느 상인이 말했다.
“요나... 그건 큰 물고기 이야기 아닌가요?”
나는 고개를 돌려 상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이었지요. 삼일 밤낮을 깊은 물속에서 살다가 다시 살아났지요.”
“그럼... 그 말은 그분도...?”
말을 마무리하지 못한 그는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질문의 끝을 들은 듯했다. 예수는 이미 말을 이었다. 니느웨에 간 요나처럼, 예수도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죽음에서, 어둠에서, 그도 다시 살아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길은 니느웨처럼 이방의 땅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들이 예수께 바란 표적은,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거대한 사건이거나, 로마의 장군이 무릎 꿇는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는 그런 장면 대신 ‘요나’의 표적을 말했다. 고요하고, 끈질기며, 생사를 건너온 자의 이야기였다.
이방 여인이 길을 나섰다고 한다. 땅끝에서부터 먼 길을, 먼 먼 남방의 나라에서부터... 지혜를 찾아 나섰던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에 대한 기록을 열왕기에서 읽은 적이 있다. 스바의 여왕, 남방의 여인.
“솔로몬의 지혜가 하도 놀라워서, 기어코 직접 찾아왔대요.”
나이 든 서기관이 내게 그리 말했다.
“하지만 말이야, 그 여인은 유대인이 아니었어. 그런데도 말이야... 귀를 기울였지.”
그 이야기를 예수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심판의 날이 오면, 그 남방의 여인이 이 시대의 사람들을 정죄할 거라고. 예수의 시대에 그와 마주한 유대인들은, 그보다 작은 지혜에도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스바의 여왕은 낯선 땅, 낯선 말, 낯선 풍습을 무릅쓰고 지혜를 따라나섰다. 예수를 만난 이들은, 눈앞에 선 사람을 외면했다. 머리로는 이해했을지 몰라도, 마음으로는 거부했다. “지혜는 언제나 낯설다”라는 말을 나는 그날 이후 자주 떠올렸다. 예수는 이어 니느웨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은 요나의 말을 듣고 돌이켰다. 그런데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니느웨.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도시,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부정한 상징 같은 도시였다. 그곳 사람들이 회개했다는 사실조차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는 그 불편한 진실을, 그날 거침없이 꺼내 들었다.
그는 모든 경계를 넘고 있었다. 시대의 선을, 문화의 울타리를, 신앙의 담장을. 그의 말은 더는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빛에 대한 이야기. 나는 그날의 기록에서 이 단어를 반복해 썼다. 빛. 그날 예수는 등불에 대해 말했다. 등불은 방 안에 감춰두는 것이 아니라고. 높은 자리에 놓여, 온 방을 밝혀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등불은... 말씀인가?”
하지만 곧 한 노인의 말이 생각났다.
“아니야, 그분 자신이 빛이지.”
그 말은 아마도 맞았다. 예수는 자신이 드러내는 말과 행동, 그 전부가 등불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빛은 감춰지지 않으며, 누구든 볼 수 있는 자리에 있다고 했다. 다만, 보는 눈이 문제였다. 예수는 말했다. 눈이 건강하면 온몸이 빛으로 가득해질 것이고, 눈이 병들면 온몸이 어두워질 것이라고. 나는 그 말이 심상치 않게 들렸다. 빛은 분명 있었고, 그것이 감춰지지 않았음에도 많은 이들이 어두운 이유는 ‘그들의 눈’ 때문이라는 말.
그날 이후, 나는 자주 내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지나치는 것은 무엇인지.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 있었고, 말하고 있었고, 걸어 다녔는데, 왜 어떤 이들은 그를 보지 못했을까. 아니, 왜 보지 않으려 했을까.
식사 자리였다. 예수가 한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들어섰다고 했다. 바리새인들 대부분은 예수를 경계했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적대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예수에게 묘한 호감을 품었던 듯했고, 그것이 결국 집으로까지 초대한 이유였다고 조카는 조심스레 전했다.
“삼촌이 그분 말씀에 자주 고개를 끄덕이곤 했어요.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예수와 바리새인이 마주 앉은 식탁을 상상했다. 그러나 그 식탁 위에서 벌어진 일은, 그 청년의 말처럼 ‘뜻밖의 일’이었다.
“그분이 손을 안 씻으셨대요. 식사 전에요.”
청년은 그 말을 꺼내며 여전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반문하듯 물었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청년은 잠시 말이 없다가 낮게 대답했다.
“유대인은 손을 씻어요. 꼭 그래야 해요. 그건 단순히 위생이 아니라... 정결의 의식이니까요. 이방인들은 안 해도 되지만... 우리는...”
그제야 나는 그 놀라움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유대인에게 있어 식사 전 손을 씻는 것은 단지 관습이 아니라,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한 종교적 행위였다. 신앙과 정체성, 정결과 거룩함을 분리할 수 없는 그들의 세계에서, 손을 씻지 않고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마치 이방인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삼촌이 그 순간 깜짝 놀랐대요. 손을 안 씻었다는 걸 보고... 말은 안 했지만, 얼굴에 다 드러났다고 해요.”
그리고 그다음, 예수는 그 놀람의 기색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면서, 그 속은 탐욕과 악으로 가득하구나.”
그 말은 식탁 위에 놓인 기물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한 말이었다. 예수는 그 바리새인의 겉으로 드러나는 경건함 이면에 숨겨진 허영과 자기의에 대해 꿰뚫어 보고 있었다. 조카는 숨을 죽이며 덧붙였다.
“그 말씀이... 삼촌 얼굴을 붉게 만들었대요. 하지만 반박하지 못했다고 해요. 다들 조용했어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예수는 사람들의 내면을 꿰뚫는 말로 그들의 삶을 흔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비판만 하진 않았다. 그분의 말은 언제나 어떤 문으로도 이어져 있었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고 한다.
“접시 안에 있는 것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정결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은 단순한 도덕의 권유가 아니었다. 식탁 위의 음식이, 손을 닦는 물보다 더 중요한 정결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말. 예수는 정결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었다. 손을 씻는 것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내면의 정결. 마음을 나누고, 소유를 나누고, 삶을 나눌 때에야 가능한 진정한 거룩함.
나는 조심스럽게 기록지에 적어두었다.
“정결은 손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
예수가 그 자리에서 전하고자 했던 정결의 의미는 율법과 전통의 규정 너머에 있었다. 손을 씻는 규례로는 도달할 수 없는 생명. 마음을 나누지 않는다면, 아무리 손을 씻고도 정결할 수 없다는 선언. 그리고 그 선언은, 단지 한 바리새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을 향한 말씀이었다.
바리새인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조카는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숨이 멎는 줄 알았어요.”
예수는 잠잠한 그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공의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버렸다.”
그 순간, 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십일조. 그것은 오랜 전통이었다. 율법 속에서도 강조된 것이고, 유대인의 신앙생활을 상징하는 의무였다. 그러나 예수의 시선은 그 의무의 중심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형식의 반복이 아니라, 그 형식이 지향해야 할 본질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적어 내리며 생각했다. 율법은 고아와 과부, 그리고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을 위한 장치였다. 십일조는 단순한 헌금이 아니었다. 그것은 함께 사는 삶의 상징이자 공동체를 돌보는 실천이었다. 그런데 그날, 예수는 그 의미가 사라지고 제도만 남은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또다시 말했다.
“회당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 말에서 묘한 냉소를 느꼈다. 회당의 상석. 사람들 앞에서 존경받고 싶은 욕망. 권위와 인정, 높임. 그것을 탐하는 마음은 우리 모두 안에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는 그것이 신앙을 좀먹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더 깊은 비유로 들어갔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다. 그 위를 밟고 지나가면서도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말의 파장을 오래 곱씹었다. 드러나지 않는 무덤. 사람들은 그것이 무덤인지 모르고 밟는다. 부정한 곳임을 모른 채 다가선다. 예수는 그렇게 말했다. 그들의 가르침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하게 만든다고. 그들 스스로는 정결을 외치면서, 정작 정결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라고. 그때, 식사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이였다.
“선생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까지도 욕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말은 일견 억울한 항변 같았지만, 나는 그 뒤에 숨겨진 속내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도? 우리가 왜?’라는 반발. 하지만 예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구나.”
그는 말했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였고, 지금 그들의 후손은 그 무덤을 장식하고 있다고. 그건 예언자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정당화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 말에서 깊은 통증을 느꼈다. 우리가 존경한다는 이름으로 만든 비석, 우리가 기념한다는 이름으로 쌓은 무덤은 정말 그들의 뜻을 따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 뜻을 침묵시키는 수단일까. 예수는 거침없이 이어갔다.
“하느님의 지혜가 이르기를,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죽이고 박해할 것이다.”
그의 말은 현재에서 멈추지 않았다. 미래를 꿰뚫는 듯했다. 그가 보내는 이들, 그의 뒤를 이을 사람들. 그들 역시 거부당하고, 억압당하고, 피를 흘릴 것이다. 그리고 그 피에 대한 책임이 이 세대에 주어질 것이라고.
“아벨로부터, 제단 사이에서 죽은 스가랴까지.”
그의 말은 창세기에서 역대기까지, 성경 전체를 가로지르는 비통의 역사였다. 예언자의 피, 진리를 말한 자들의 피, 시대를 거스른 자들의 피. 예수는 그 모든 피가 지금, 이곳의 세대 위에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피의 절정은 이제 곧 흘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예수 자신의 피로.
나는 침묵 속에서 글을 적었다.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작은 등불 하나가 바람 없는 방 안에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펼쳐둔 양피지 위로 잉크가 서서히 번져 들었다. 손끝이 떨린 건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말도 쉽게 적히지 않았다. 한 문장을 쓰고, 다시 멈췄다. 몇 글자를 지우려다, 멈췄다. 그 번짐조차, 그날 내 안에 머물던 떨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기록이라면, 나는 지우지 않기로 했다. 예수는 마지막으로 율법학자들을 다시 언급했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들마저 막는다.”
그 말은 그날 예수가 내뱉은 수많은 말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이었다. 가장 차가웠고, 동시에 가장 절절했다. 나는 그 순간 예수의 얼굴을 본 누군가의 증언이 떠올랐다. 분노로 불타는 듯했지만, 그 안에 어떤 깊은 슬픔이 있었다고 했다.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돌아서려는 이들을 붙들 수 없다는 무력함. 그 모든 감정이 목소리에 스며 있었다고 했다.
율법학자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해석하고 전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곧 진리였고, 그들의 판단은 법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율법은 어느새 사람들을 얽매는 도구가 되었고, 진리의 문은 닫힌 채 열쇠만 손에 쥔 채 있었다. 예수는 그들이 문 앞을 지키면서도,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었다. 절규였다. 절망이었다.
그날 이후, 예수를 향한 적대는 훨씬 노골적이 되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그의 말 하나하나를 가시처럼 받아들였고,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으려 했다. 질문은 의문이 아니라 함정이 되었고, 대화는 배척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의 눈빛은 날카로워졌고,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를 바라보는 이들이 아니었다. 예수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벽에 기대어 천천히 숨을 골랐다. 작은 등불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의 말들이, 그날의 시선들이, 예수의 숨결처럼 내 안을 지나갔다. 나는 조용히 펜을 들었다. 그리고 그날 들은 말을 다시 되뇌기 시작했다.
예수가 말한 ‘빛’은 감추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숨지 않았고, 말을 아끼지 않았고, 몸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말은 누구에게나 들릴 수 있었고, 그의 걸음은 누구나 따라갈 수 있는 길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말은 듣지 못한 이들이 있었고, 그의 걸음을 따라가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아니, 들으려 하지 않았고, 보려 하지 않았다. 빛은 분명히 존재했다. 등불은 이미 켜져 있었다. 그러나 눈이 어두우면, 그 어떤 빛도 볼 수 없었다. 나는 그 문장을 조심스레 써 내려갔다.
“빛이 그들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의 눈은 어두웠다.”
그 문장 아래에 나는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 숨을 들이켰다. 이 말은 단지 그들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나 역시 그날 묵묵히 앉아 있었지만, 어쩌면 나는 보지 못한 자였을지도 몰랐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는 자. 나는 그 사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다시 적었다.
“정결은 손으로 닦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것이며, 율법은 가르치는 자의 권위가 아니라, 이웃을 살리는 길이어야 한다.”
예수가 들려준 이야기는 단순한 설교가 아니었다. 논쟁이 아니었고, 수단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생애였다. 그리고 그 생애 안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마음을 연 이들이 있었고, 문을 닫은 이들도 있었다. 그 빛을 따라간 자들이 있었고, 등을 돌린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멈추지 않았다. 등불을 들고 어둠 속으로 계속 걸어갔다.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덜 떨리는 손으로.
예수는 요나보다 크다. 그는 죽음을 건너오고, 물고기의 뱃속 같은 어둠을 지나 이방을 향해 길을 냈다. 유대인의 폐쇄된 담장을 찢었고, 솔로몬보다 깊은 지혜로 마음을 깨웠다. 그는 손을 씻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었고, 무덤처럼 닫힌 종교의 껍질을 깨고 그 속의 생명을 끌어냈다.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의 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를 외면한 자들이 많았지만, 그를 받아들인 자들도 있었으므로. 그 등불은 누군가의 눈에 닿아, 어둠을 밝힐 것이므로.
나는 그 말이, 그 생애가, 먼 훗날 어떤 이의 귀에 닿기를 바라며,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써 내려갔다.
“빛은 이미 켜졌다. 그대의 눈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11:29-54"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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