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을 두려워하기보다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하여
어느 날 예루살렘 북쪽 마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마을은 바위로 지어진 집들이 촘촘하게 늘어서 있었고, 시장이 서는 날이면 어깨가 부딪히지 않고는 지날 수 없을 만큼 좁은 골목에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그곳에서 오래 장사를 해온 물건 장수가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그날, 저잣거리에 모인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에게 다가가 묻더군요. 하느님의 나라는 언제 오는 것이냐고. 예수는 잠시 침묵했소. 그 침묵이, 참 길었소.”
그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 침묵이 얼마나 무게 있었을지를 상상해 보았다. 하느님의 나라. 세상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그것. 정의와 평화, 회복과 안식, 그리고 힘없는 이들이 머물 수 있는 마지막 피난처. 그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은, 그들이 지금 얼마나 고통 속에 있는지를 말없이 드러내는 절규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는 뜻밖의 말을 했다고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다.”
바리사이들이 기대했던 대답은 분명 이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가 끝나고, 무장한 메시아가 등장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즉, 하느님의 나라를 정치적인 독립으로, 군사적인 승리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무엇’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어디에 세워지고, 언제 깃발을 올릴지를 궁금해하며 질문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 나라는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이 말은 시장의 장수도, 나도, 쉽게 넘길 수 없는 문장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말이 '마음속에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나 역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들으며 알게 되었다. 특히 그 자리에 있던 바리사이들의 마음 한복판에 하느님 나라가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이렇게 풀이했다.
“그분이 말한 ‘가운데’는, 당신 자신을 가리키신 것이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외면당한 이들과 식탁을 나누고, 병든 이를 낫게 하며, 무너진 마음에 말을 걸고 있었던 그 삶 자체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었다는 말이다.
나는 예수의 그 답변을 곱씹으며 자주 되묻곤 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인가. 우리가 볼 수 없다고 해도, 어떤 걸음과 어떤 말 사이에서 그것은 자라고 있는 것일까.
예수는 그 대답을 바리사이들에게 남기고 돌아선 뒤, 제자들에게는 조금 더 조용한 어조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그를 따라다녔던 이들이 어느 날, 인자의 날을 간절히 보고 싶어질 거라고. 하지만 그날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인자의 날. 그것은 어떤 날일까. 예수를 통해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가 완전히 드러나는 날. 숨겨진 정의가 밝혀지고, 속임이 걷히며, 모든 눈물이 씻겨지는 날. 하지만 그날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제자들은 그날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그 말은, 그들이 그날이 오기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그 구절을 듣고 처음엔 의아했다. 왜 보지 못하게 하셨을까? 왜 그토록 따랐던 이들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가야 했을까?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어떤 날은, 우리가 손에 쥐기 전에 희망으로 살아가야 하는 법이다. 기다림이 그 사람을 더 깊게 만들고,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을 잊지 않는 사람이 진짜라고.
예수는 또 이런 말을 했다 한다.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는 말에 흔들리지 말라. 그런 소리가 들리더라도 따라나서지 말라. 인자는 번개처럼 올 것이다. 그날엔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밝게 비출 것이다.”
나는 오래된 여행자의 말투를 흉내 내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날은 번개처럼 온다는 거군요.”
그리고는 조용히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날이 온다면, 나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가 말한 번개는 단지 빠른 속도만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시편을 기록했던 이들도 ‘번개’를 하느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날은 조용히 다가오는 위로의 시간이면서도, 동시에 숨겨진 것들이 드러나는 날이기도 하다. ‘숨기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의 번개에 드러나는 것. 그래서 예수는 경고하신 것이다. 그날을 누군가의 소문이나 헛된 기대 속에서 찾지 말라고.
하지만 정작 그날을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뜻밖의 사실도 함께 들려주었다. 인자는 그날이 오기 전에 먼저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대에게 외면당할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의 표정을 상상해 보았다. 머나먼 날, 번개처럼 찬란하게 올 그분이 지금은 고통을 겪고, 거부당하며, 외면받는 존재라는 것. 제자들은 아마 침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 고난을 함께 걷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침묵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안다. 기다림이 길어지고, 소문은 많아지고, 세상은 혼란스러울 때. 그들은 여전히 묻는다.
“그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는 이미 말했다.
“너희 가운데 있다.”
그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나라는 번듯한 지도 위에 그려지지 않는다. 어느 깃발 아래서도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를 따랐던 삶 속에서, 고난을 겪으며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의 걸음 속에서 자란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나는 그날 이후로 예수가 한 말을 자주 떠올린다. 하느님 나라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기에 더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어느 말투 속에서, 어느 걷는 이의 뒷모습 속에서, 어느 용서의 눈길 속에서, 그 나라가 자라고 있을지 모르기에.
나는 아직 그 나라를 다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도 ‘가운데’ 있다는 말을, 믿고 싶다. 아니, 이미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수가 말한 그날, 인자의 날. 사람들은 기다리면서도, 그날이 오리라고는 믿지 않는 것처럼 살았다고 한다. 마치 노아의 시대처럼. 나는 한 장정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 든 노동자였고, 나보다 말이 적었으며, 긴 침묵 끝에 한 마디씩 말을 꺼내곤 했다.
“예수는, 그날이 노아 때와 같을 거라고 했소. 홍수가 오기 직전까지 사람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다들 평소처럼 살았다는 거지.”
노아. 오래전, 세상이 무너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보냈다. 누구도 하늘에서 쏟아질 물을 상상하지 못했고, 방주를 짓는 노인의 망치 소리를 단순한 고집으로 여겼다. 심판은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삶 한가운데에 들어왔다.
예수는 그날을 그렇게 설명했다. 예고 없이 오는 재난이 아니라, 모두가 너무도 익숙해져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던 바로 그날.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장 가볍고, 하루가 가장 평온해 보이던 그때. 그때가 바로 인자의 날이라고 했다.
그는 또 소돔의 이야기를 꺼냈다. 롯의 시대. 소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도시는 부유했고, 분주했으며, 사람들은 내일을 계획하느라 바빴다. 도시에 사는 이들은 누가 떠나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롯과 그의 가족이 도망치던 그 새벽까지도, 거리의 시장은 열리고, 화덕에는 빵이 구워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소돔은 무너졌다. 불과 유황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예수는 이 두 장면을 함께 언급하며, 인자의 날도 그와 같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익숙함이 무너지고, 편안함이 부서지는 날. 구원의 날은 멸망의 날과 동시에 찾아온다는 역설. 하느님의 정의는 언제나 경고 없이 드러나는 법이다.
예수는 그런 날을 맞는 자의 태도에 대해서도 말했다고 한다. 그날, 지붕에 있던 자는 집 안의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아야 한다. 밭에 있는 자도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조금 당황했다. 왜 그토록 서두르라는 걸까. 왜 애써 모은 물건조차 돌아보지 말라고 한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롯의 아내를 생각하라고 했을까.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날에는, 삶을 구성해 왔던 것들 "돈, 물건, 추억, 안정, 권위" 그 모든 것과 단절해야 한다는 것을. 그 어느 것도 들고 나올 시간이 없다는 것. 삶에 속해 있던 것이 목숨보다 중요해지는 순간, 우리는 구원을 놓칠 수 있다는 것.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이유는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익숙했던 도시, 쌓아둔 물건, 남겨두고 온 사람들, 그녀의 과거. 그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이 발걸음을 돌리게 했고, 그 순간 그녀는 구원의 자리에서 멀어졌다.
예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기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오래 품고 있었다. ‘목숨’이란 단어는 단지 생물학적인 생존만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자아, 내가 가진 것, 나를 설명하는 모든 것... 그것이 곧 목숨이다. 하지만 그날이 오면,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니,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예수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충격적인 장면을 그렸다고 했다.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워 있을 것이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전해준 이에게 되물었다.
“정말... 그렇게 나뉘는 것입니까? 그날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같아 보였겠지. 같은 잠자리, 같은 일터,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 하지만 결국, 갈라지는 거요. 누구는 데려가고, 누구는 남겨둔 채로.”
그 말은 내게 오래 남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 가족, 친구, 동료. 하지만 결국, 그날에는 각자가 어떤 길을 걸었는가에 따라 나뉘게 된다는 것이다. 소리 없이, 말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제자들 역시 놀랐던 것 같다. 그중 하나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주여,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예수의 대답은 단순했고, 다소 충격적이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든다.”
나는 이 문장을 오래 곱씹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상징으로 보았고, 누군가는 심판의 구체적 장면으로 보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생명이 사라진 자리, 진실을 외면한 자리, 끝내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한 그 자리에는 징조가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길한 예감이 아니라, 정의의 도래다. 감춰졌던 것들이 드러나고, 함께 있던 이들 사이의 차이가 드러나는 날. 그날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수 있고, 그 다가옴은 갑작스럽고도 분명하다.
나는 여전히 그 질문을 안고 살아간다.
“그날은 언제입니까?”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그날은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
그리고 또 말했다.
“그날은 번개처럼 올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날은 우리 삶의 평온함을 뚫고 들어올 것이며, 우리가 숨기고 지켜온 모든 것들을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내일을 위한 물건을 챙기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언제나의 삶처럼 흐르는 이 하루 속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번개처럼 오는 그날에도, 나의 손에 물건이 아닌 용서와 믿음, 그리고 포기가 들려 있기를.
그래서 오늘 하루를, 조금은 다르게 살아본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언제나의 삶처럼 흘러가는 이 하루 속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조용히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것은 언제나 거창한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말 한마디 속에, 누군가를 향한 망설이다 건넨 손길 속에, 자리를 비켜준 작은 움직임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나라가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늘 찾는 방식과 너무 달라서일 것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며, 남들보다 먼저 가질 수 있는 것을 찾는다. 하지만 예수가 말한 나라는 그 반대였다. 그것은 잃는 쪽, 비우는 쪽, 뒤를 돌아보지 않는 쪽에 있다.
번개처럼 오는 날. 나도 그날을 상상해 본다. 준비할 시간도 없고, 무언가를 챙길 여유도 없는 날. 누군가는 뛰고, 누군가는 멈추고, 누군가는 돌아볼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손이 아니라, 놓아주는 손이면 좋겠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기억하는 마음, 내 말보다 남의 침묵을 들어주는 귀, 내가 받은 것을 흘려보내는 길목 같은 존재였으면 좋겠다.
예수는 자주 ‘잃는 것’을 말했지만, 그의 잃음은 언제나 누군가의 ‘삶’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이,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오래된 초대처럼 느껴진다. 나를 가리켜 그날로 걸어오라는, 먼 훗날보다 바로 지금의 삶을 다시 보라는 부드러운 손짓처럼.
그리고 나는 안다. 이 모든 말이, 믿고 싶다고 해서 바로 믿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그 말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이기고 싶은 마음, 쌓고 싶은 욕망, 소유하고 싶은 것들로 하루가 가득한 세상에서 ‘잃어야 산다’는 말은 너무 불편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 앞에서 나는 자꾸 멈추게 된다. 왜일까. 어쩌면 그 말 안에, 내가 정말 원하는 ‘살아 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조금은 다르게 살아본다. 말을 아끼고, 눈을 조금 더 길게 머물고, 돌아서려던 길에서 다시 한 걸음 머뭇거려 본다. 하느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날에도, 어쩌면 이미 내 한가운데 머물고 있는 그 나라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번개처럼 오는 그날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에도 내게 말을 거는 그 작은 나라를 기억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그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두려움으로 견딜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다. 그날은 공포의 날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날. 잃은 것들이 돌아오고, 숨겨졌던 진심이 드러나는 날. 아무도 몰랐던 눈물이, 드디어 닦이는 날.
그러니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하나일지 모른다. 그 나라를 바라보며, 아직 오지 않은 그날을 기다리며, 지금 이 순간을 정직하게 살아내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진심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쌓이면, 나도 모르게 그 나라 가까이에 서 있을지 모른다. 아무 말 없이,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무거운 하루를 견뎌낸 눈빛을 나누는 그 순간. 예수가 말한 ‘가운데 있는 나라’가, 조용히 문을 열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그 가능성을 품고, 다시 하루를 연다.
그 하루가,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시작일지도 모르기에...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17:20-37"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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