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9 – 가장 멀었던 사람이 가장 가까웠다

사람들이 외면한 세 사람 이야기

by 나그네 한

낯선 도시에서 오래 머무는 일이 잦아졌다. 누군가는 나에게 그 이유를 묻기도 했지만, 대답은 항상 모호하게 흐렸다. 사실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그가 지나간 흔적을 따라 걷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비가 내리기 직전의 하늘이었다. 어딘가 눅눅한 돌담 아래에서 만난 노인은 지나치게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었고, 눈빛은 놀랍도록 깊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예수가, 기도에 관해 한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고...”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름진 손끝으로 허공을 긁듯 무언가를 떠올렸다.


“한 여인이 있었지. 과부였소.”


그가 꺼낸 이야기는, 낯설지 않았다. 여러 사람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 그 노인은 한 장면을 그리듯 천천히 말했다.


“그 여인은 억울했소. 누군가에게 큰 피해를 입었는데... 문제는, 어디에 말할 데가 없었지. 살던 마을에도, 친척에게도. 결국 그는 재판관에게로 갔소.”


나는 그 말에 약간의 의문을 품었다. 재판관? 도움이 되지 않는 이에게 기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노인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 재판관은 아주 고약했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사람은 더더욱 우습게 알았소.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는 자였지. 법도, 정의도, 모두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는 자였소. 신명기나 말라기서에 나오는 말들? 그런 건 그 사람에게 중요하지 않았지.


나는 천천히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노인은 입가를 한 번 굳히고, 다시 그 말을 꺼냈다.


“포기하지 않았소. 다시 가고, 또 갔소. 매일 찾아가서, 제 억울함을 풀어달라, 원한을 해결해 달라, 말했지. 아마 알았을 거요. 그 재판관이 얼마나 무정한지. 그래도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 거요. 그 여인에겐 '법'밖에 없었으니.”


그 목소리엔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는 마치 그 여인을 옆에서 본 것처럼 말했다.


“결국 그 재판관도 못 이겨서, 들어줬소. 너무 귀찮고 성가셔서라도, 그 청을 받아줄 수밖에 없었지. 불의한 자조차, 끈질긴 요청 앞에서는 무너지게 되어 있소.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무서웠던 거지. 끝까지 괴롭힐 것 같아서.”


나는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다. 예수가 전하려던 뜻이 단순한 기도에 대한 격려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면, 예수가 말한 건 그 여인의 끈질김이었군요. 믿음의 끈질김.


노인은 내 말을 천천히 곱씹더니, 낮게 대답했다.


“그렇지. 그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그게 문제였지. 예수는 그걸 묻고 있었던 거요. 기도라는 이름을 한 끈질긴 믿음.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이들의 부르짖음.”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치 먼 미래를 보는 듯한 눈으로 덧붙였다.


“하느님의 정의는 늦지 않소. 그분은 재판관 따위가 아니니까. 하지만 예수는 알고 있었던 거요. 그런 믿음이 점점 희미해진다는 걸. 그래서 묻지 않았겠소. 사람이 그분이 올 때,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 하고 말이오.”


그 순간, 나는 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릴 수밖에 없었다. 성 안 어디엔가, 허름한 옷을 입은 여인이, 들리지 않을까 싶어 크게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그 여인의 말은 힘이 없었지만, 그 반복은 세상을 흔들 만큼 강했다.
그 믿음이 세상을 구할 것 같았다. 아니, 그 믿음 외에는 남는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며칠 뒤, 또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한 젊은 사내였다. 그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고, 말을 꺼내기 전 한참을 머뭇거렸다.


“어떤 날이었어요. 성전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올라가던 시간... 저도 그때 거기 있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말할지 말지 망설이는 듯했다. 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있었죠. 하나는 바리새인, 다른 하나는 세리.”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대조였다. 바리새인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존경받는 이들. 율법을 지키는 데 앞장서던 사람들. 반면 세리는 로마에 빌붙어 같은 민족에게 세금을 거두고, 때로는 착취하는 자로 여겨지던 이들...


“바리새인은요... 대단했어요. 금식도 주에 두 번이나 하고, 수입의 십 분의 일을 꼬박꼬박 내고... 누구도 그를 탓할 수 없었죠. 그런데 그날 그는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저 사람들처럼 욕심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습니다. 특히 저기 저 세리 같은 사람과는 다릅니다.’”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대체 무엇을 위한 기도였을까. 그는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었을까.


“그는 감사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자기 자랑이었어요. 남들을 낮추는 방식으로, 자기를 세운 거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멸시했어요. 기도가 아니라, 선언처럼 들렸어요. 나만은 괜찮다고.”


그 젊은이는 시선을 잠시 아래로 떨구고는,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세리는요... 아예 가까이 가지도 않았어요. 멀찍이 서서, 하늘도 쳐다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했죠.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게 전부였어요. 그런데...”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예수는 말했어요.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건, 바리새인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라고요. 이유는 단 하나. 자기를 낮추었기 때문이에요.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했기 때문이죠. 스스로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오히려 높아진다고요.”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바리새인은 공동체가 보기엔 분명 경건했다. 그 누구보다 율법에 충실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른 것을 보고 계셨다.


진짜 기도는 바깥으로 퍼지는 소리가 아니라, 안에서 무너지는 침묵이었다. 진짜 믿음은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지 않았다. 자신이 죄인임을, 감히 고개 들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데 있었다.


그 젊은 사내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날 세리는 기도를 마치고 돌아갔어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하느님은 보셨을 거예요. 그렇게 낮아진 그를, 올려다보셨을 거예요.”






며칠 후, 나는 오래된 시장 인근에서 어떤 이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던 여인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 여인은 어딘가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품에 안은 아기를 내려다볼 때만큼은 얼굴이 환해졌다고 했다.

그녀는 어느 날, 예수에게 아이를 데리고 나아갔다. 그저 손이라도 얹어주시길 바랐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의아했다. 그날이 무슨 절기였던 것도 아니었고, 예식을 위한 날도 아니었다. 속죄일이 되면 장로에게 아이를 데려가 축복을 받는 관습이 이스라엘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날은 아무런 준비도, 아무런 권위도 허락되지 않은 평범한 날이었다. 아기를 품에 안고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성인들의 자리에 나서는 존재가 아니었고, 예배의 공간이나 기도의 시간에는 더욱더 환영받지 못했다. 예수의 제자들조차 그들을 꾸짖었다고 했다.


“왜 여기까지 왔소?”
“지금은 그런 시간이 아니오.”


제자들의 목소리는 관습의 그림자 아래 있었다.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들이 드리는 것이고, 아이들은 그 질서 밖에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부모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앞서 들은 어떤 과부처럼, 반복해서 두드리는 끈질긴 용기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예배의 틀을 어기고 나왔다. 아무도 허락하지 않은 시간에,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러나 그 안에 있었던 건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절박한 믿음이었다. 그들은 율법으로도, 장로의 기도로나, 기존의 관습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속죄일이 아님에도 아이를 데리고 나온 이유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 아이들에게는 오직 부모가 전부였고, 부모는 예수의 손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 손이 아이에게 닿기만 한다면, 하느님 나라가 이 아이에게도 열릴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 장면에서 걸음을 멈췄다고 한다. 그리고 조용히 제자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 들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런 이들의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받아 적으며 한참 동안 멈춰 있었다.


‘하느님 나라’.

그 말이 단지 죽은 후 도달하는 장소만을 말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 나라는 지금 이 땅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자들’에게 속하는 현실이었다. 예수는 또 말했다고 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잠시 숨을 삼켰다고 한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스스로 살지 못하고, 완전히 의존하며,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존재... 바로 그 상태야말로, 예수가 말한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마음’이었다.


그 여인의 말이 조용히 이어졌다고 한다.


“예수 께서는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어린아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한다고...”


그 순간 나는 떠올렸다.

신명기에 기록된 말.

“하느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시며, 이방 사람을 사랑하신다.”(신 10:18)

그리고 또 한 구절,

“내가 오늘 생명과 복을 네 앞에 두었으니... 네가 명령을 지키면 살 것이다.”(신 30:15–16)


하느님 나라에 속한 사람은, 강한 자가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그분을 붙드는 자였다. 그날 예수께 아이를 안고 나아간 부모들처럼,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라고 외치던 세리처럼... 무엇인가를 이루기보다, 무엇이든 받아야만 하는 이들... 그들이 그 나라에 속해 있었다.






도시를 떠나기 전날, 나는 어느 회당 근처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가 물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과 무게감 있는 말투. 사람들 틈에서 주저 없이 나서는 사람이었다고. 그는 예수께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 들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이 물음은 낯설지 않았다. 삶의 끝에서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마음... 예수는 그의 말에 곧바로 이렇게 되물었다고 했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그 말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었다. 그는 신명기 6장 4절, “하느님은 오직 하나이시다”는 고백 위에 서 있었다. 그 지도자가 말한 ‘선하신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혹시 관습적인 인사치레는 아니었는지, 예수는 그의 진심을 묻고 있었다. 그는 말끝을 맺지 않았다고 했다. 예수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라.”


그 말들은 십계명 중 사람 사이의 윤리를 다룬 조항들이었고, 레위기 18장 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그것을 지켜 행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은 단지 금지 조항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었다. 그 지도자는 대답했다.


“어려서부터 저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켜왔습니다.”


예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의 삶은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실제적인 순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다. 그에게는 아직도 하나가 남아 있었다.


“너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하느님 나라를 진정으로 살아내기 위해선, 가진 것을 놓아야 했다. 신명기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명령을 듣고 하느님을 사랑하면 살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돌려 듣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신 30:16–18)


예수는 그에게 생명을 택하라고 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큰 부자였고, 그 말은 그에게 너무 무거웠다. 그는 돌아섰다.

조용히, 그러나 깊은 괴로움을 안고.

나는 그가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닥을 바라보았다. 하느님 나라를 묻는 이들은 많았고, 구원을 바라는 이들은 넘쳤지만, 예수가 제시한 길을 따라나선 이는 드물었다.


그가 뒤돌아선 뒷모습은,

기도의 자리에서 머뭇거린 세리와도,
아이를 품에 안고 뛰어든 여인과도,
어딘가 달라 보였다.






나는 그날, 세 사람을 보았다. 한 사람은, 아이를 안고 예수께 다가간 여인이었다. 하나는,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던 세리... 그리고 또 한 사람, 무언가를 열망했지만, 결국 돌아선 관원... 이 세 사람은 서로 알지 못했고, 같은 시간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셋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무언가를 받고자 한 사람들...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 앞에 선 이들... 한 여인은 용기 내어 무리를 헤치고 나아갔다. 무모한 행동일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아이를 안고 예수의 손길을 기대했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다가갔고, 아이를 안았다. 나는 그 모습이, 말 없는 기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세리는 멀찍이 서 있었다.

그는 가까이 가려하지도 않았고, 눈을 들지도 못했다. 오직 자신을 두드리며 말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한 문장이 그의 전부였다.


관원은 달랐다. 그는 물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그는 선하고자 했다. 많은 것을 지켰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내, 한 걸음을 떼지 못했다.


나는 이 세 장면을 오래도록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가장 멀리 있는 사람처럼 보였던 세리가, 사실은 가장 가까이 서 있었구나... 가장 작고 약해 보였던 아이가, 그 나라에 가장 먼저 속해 있었구나... 가장 많은 것을 가진 이가, 정작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구나...


하느님 나라는,
많이 가진 자의 차지가 아니었다.
잘 아는 자의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자,
무언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자의 것이었다.


나는 그날을 잊지 않기로 했다.
나도 매번 묻고 있으니까.
내가 어느 쪽에 서 있는 사람인지를...


어쩌면 믿음이라는 건,
무언가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버텨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도하는 이유는,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달리 붙들 것이 없기 때문이니까...

하느님도 그걸 아시지 않을까.

그분은 기다리시는 분이고,
작은 손이 다가오는 걸,
어떤 책망도 없이 받아주는 분이니까...


그 여인의 아이처럼,
그 세리의 말처럼,
나도 그렇게,
오늘 하루만큼은 하느님 앞에 서보려 한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18:1-23"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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