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0 – 가진 자, 내려놓은 자, 구한 자

사랑은 무엇을 더 사랑하느냐의 문제였다

by 나그네 한

언젠가 북쪽 마을에서 오래된 포도나무 아래 앉아 있던 장로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예수가 그 말을 했을 때, 사람들 얼굴이 다 굳었소.”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게 쉽다,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엔 부자는 물론이고,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더 많았을 거요. 그러니 그 말을 들었을 때, 다들 가슴이 철렁했지.”


그는 무심히 땅을 손가락으로 쓸더니, 이어 말했다.


“그 순간, 누군가는 숨을 들이켰고, 누군가는 서로의 얼굴을 흘끗 보았소. 말은 없었지만, 마음속에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있었지. ‘이제껏 우리가 믿어온 게 전부 다 잘못된 것이었나?’ 그런 물음이 눈빛에 어려 있었소.”


그 말을 들은 후 나는 예수의 그 한마디에 담긴 무게를 생각했다.


바늘귀... 낙타...

그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낙타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었다. 사막을 건너는 삶의 상징이었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부와 생존의 상징이었다. 소금과 향료, 곡식과 기름, 작은 마을의 온 재산이 그 등에 실려 떠났다 돌아왔다. 그들이 가진 것, 그들이 바라는 것, 그들이 의지하던 것이 그 등에 있었다.


반면 바늘귀는, 손가락 끝만 한 구멍. 옷을 기울여 꿰매는 그 작은 틈... 자그마한 천 조각 하나를 꿰뚫기도 쉽지 않은 그 구멍에, 낙타가 들어간다는 말은 말이 아니라 메시지였다.

그 둘이 만난다는 건, 불가능을 말하는 은유였다. 그리고 그 불가능을 예수는 너무도 담담하게 말했다. 그날 예수 앞에 있던 사람은 ‘부자 관원’이라 불렸다(참조. Day 49 – 가장 멀었던 사람이 가장 가까웠다). 이름은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경건했고, 계명을 어기지 않았다고 말할 만큼 자부심이 있었던 이였다. 어릴 때부터 율법을 배웠고, 그것을 지켜온 자신에 대해선 의심이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존경도 받았고, 스스로도 하느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런 그가 예수에게 다가가 물었다고 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는 그에게 계명을 상기시켰고, 그는 그것들을 지켜왔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 속에는 은근한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옳은 길을 걷고 있다고 여겼고, 그저 확증을 얻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마지막 한 가지를 덧붙였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나를 따라오라.”


그 순간, 부자 관원은 얼굴빛이 어두워졌고, 말없이 돌아섰다고 전해진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의 걸음은 계명을 어긴 자의 걸음이 아니었고, 죄책감의 걸음도 아니었다. 다만 놓을 수 없는 것을 놓지 않겠다는, 그런 결심의 걸음이었다.


예수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다만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내가 만난 장로는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웅성거렸소. 아니, 부자가 하느님의 복을 받은 자라면, 그가 못 들어간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단 말이오?”


그는 연거푸 고개를 저었다.

“우린 그런 줄로만 알았소. 복은 많을수록 좋은 거라 배웠으니... 예수의 말은 우리 속을 송두리째 흔든 말이었소.”


그 말은 오랜 시간,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붙들고 있던 기준들을 흔들었다.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며, 선한 삶의 결과라고 믿던 시대에, 예수는 그 부 자체가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깊은 사랑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아무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 특히 가난한 이들은 어쩌면 은밀한 위로를 받았을지 모른다. ‘하느님의 나라’는 부자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희미한 희망이 피어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밀려왔을 것이다.

‘부자도 못 들어간다면, 나 같은 이는 도대체 어떻게?’


그때 예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고 한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이 말은 오랜 시간 내 마음에 머물렀다.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군가가 내게 말해줬다.

“예수는 절망을 던지고 떠난 게 아니었소. 오히려 그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열었소. 인간의 한계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말한 거요.”


부자의 실패는 단순한 재물에 대한 집착만이 아니었다. 그는 옳게 살아온 삶을 붙잡고 있었고, 자신의 바른 행위를 자산으로 여겼다. 하지만 예수는 그의 선함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버릴 수 없던 것’을 드러냈다.

그는 율법을 지켰지만, 그것보다 더 깊은 부르심에는 응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가진 것을 내놓는 일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 중 베드로가 입을 열었다고 한다.

“저희는 가정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해 본다. 바다 냄새가 남아 있던 그의 손. 거칠게 부르튼 손끝. 자신이 버린 그물, 그가 떠난 집, 그의 아내와 아이들... 모두 떠올리며 꺼낸 말이었을 것이다. 그 말에는 자부심보다는 묵직한 회상이 담겨 있었고, 때로는 흔들리는 믿음이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 여러 배의 보상을 받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적으며 오래 생각했다. 하느님 나라는 단지 무언가를 ‘버리는 행위’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 부자 관원은 계명을 지키며 살았지만, 재물과 안전을 예수보다 더 사랑했던 것이다. 반면 베드로는 생계와 가족을 두고 따라나섰다. 그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그의 걸음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예수는 무리를 향한 말들을 마치고는, 열두 제자만을 가까이 불렀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그는 그들을 잠시 멀리 두었다. 그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또 누군가는 이마를 찌푸렸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의 무게를 곧장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예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은 더욱 선명했고, 더욱 충격적이었다.


“사람의 아들은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를 희롱하고, 모욕하고, 침을 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어느 제자가 후에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땐 정말 몰랐소. 무언가 두려운 일이 일어날 것 같긴 했지만, 설마 예수가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그들은 예수의 말을 들었고, 단어도 정확히 기억했지만, 그 말들이 어떤 미래를 가리키는지, 마음으로는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람의 아들’이 그런 일을 당한다는 건, 그들의 메시아 이해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메시아는 정복하는 자였고, 왕좌에 앉는 자였으며, 로마의 통치를 꺾고 유대의 자존을 회복할 자였다. 그런 그가 이방인에게 넘겨져 침을 맞고, 조롱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는 말은 그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처럼 들렸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전해 들으며 오랜 시간 머물러 있었다. 예수가 직접 제자들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것은 단지 미래의 사건 예고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이 그 일을 ‘알기를’ 원했다. 그 고난이 ‘우연한 사고’가 아님을, 예언자들의 말대로 이루어질 ‘예정된 일’ 임을, 그리고 그 고통의 끝에 ‘다시 살아남’이 있음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듣고도 깨닫지 못했다.

그 말씀의 뜻은 그들에게 가려져 있었고, 그들이 지금 들은 그 말이 훗날 어떤 현실로 펼쳐질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날, 예수는 고요히 말했다고 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그 길의 끝에서 이루어질 일들을...
그리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가운데, 그는 침묵 속에서 다시 길을 걸어갔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흔들리지 않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발소리는 마치 강물처럼 길 위에 흘러가고 있었다. 그 길목 어딘가, 여리고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여리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오래된 길, 먼지가 낮게 떠다니는 도시...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불과 25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 그곳으로 향하는 언덕길은 낮에는 햇빛이 뜨겁고,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졌다. 예수는 그 길을 알고 있었고, 제자들도 따라 걷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말 못 할 긴장이 감돌았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말은 곧, 무언가 결정적인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를 따르는 무리는 많았다. 앞서 가는 자, 옆에서 이야기하는 자, 뒤에서 조용히 걸음을 맞추는 자들... 하지만 예수의 눈은 그들의 걸음이 아니라, 걸음 너머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여리고 성문 앞쪽,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시장 입구 근처, 햇살이 벽을 따라 비스듬히 드리워진 그 그림자 속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했다.
오래된 옷자락을 두르고, 바닥에 담요 하나를 펴 놓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았고, 그의 존재를 별로 신기하게 여기지 않았다. 언제나 거기 있었던 사람이었고, 언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날, 무언가 달랐다. 바람이 달랐고, 공기의 진동이 다르다고 그는 느꼈다고 한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평소와 달랐고, 말소리의 높낮이도, 발소리의 리듬도 어딘가 달랐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오? 이게 무슨 소리요?”


누군가가 멈춰 서서 대답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오.”


그 이름은 익숙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나사렛’이라는 작고 평범한 마을 출신... 그 출신으로 예수를 설명하려 들었다. 하지만 소경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지 못했지만, 그의 마음은 눈보다 먼저 열려 있었다.

그는 입을 열어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무리를 가르듯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돌아보며 그를 꾸짖었다.

“닥쳐라. 조용히 해.”

“주제도 모르고 소리치지 마라.”

“죄지은 자가 입을 놀릴 때가 아니다.”


그 말들엔 단순한 불편함만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오래된 생각들이 섞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장애를 죄의 결과로 여겼다. 말없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는 무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그 소리는 마치 갈라진 돌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물소리 같았다. 예수는 그 외침을 들었다. 수많은 이름이 불리고, 수많은 외침이 오갔지만, 그 목소리는 무언가 달랐다. 예수는 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주위는 고요해졌고, 사람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했다.

“그를 데려오라.”


그제야 사람들 몇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꾸짖던 이들 중 몇몇은 고개를 돌렸고, 침묵하던 이들이 소경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의 발끝엔 먼지가 묻어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걸어간 그는, 예수 앞에 섰다.

예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 물음은 단지 정보를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에 담긴 고백을 끌어내기 위한 부름이었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 한마디에, 예수는 다시 말했다.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 순간, 눈앞의 어둠이 물러갔다. 빛이 흘러들었고, 세상이 열렸다. 그는 처음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고, 처음으로 예수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감격했다. 무릎이 꺾였고, 눈물이 솟구쳤고, 입술은 하느님께 감사를 쏟아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다. 예수를 따라 걸었다. 자신을 꾸짖던 무리들 틈에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걷는 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놀랐다. 조용히 뒷걸음질 치는 이도 있었고, 두 손을 모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도 있었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한다. 그저 한 사람의 눈이 열린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함께 열리고 있었다.
그들의 메마른 마음, 갇힌 생각, 단단했던 판단들... 그 틈이 벌어지고, 빛이 스며들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여리고의 몇 사람에게서 들었다. 그들은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소경 말이오?”
“그는 계속 그 예수를 따라다녔다오.”
“그날 이후, 그의 눈만 뜬 게 아니었소. 우리가 다 같이 본 거요. 그 눈으로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는 걸...”






이야기를 기록하고 난 뒤, 나는 며칠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야기들은 흘러갔지만, 그 여운은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 마치 먼지 낀 방 안에 햇살이 서서히 번지는 것처럼, 내 마음 깊은 곳까지 그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따라 걷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직접 따라간 적은 없었다. 그저 누군가의 발자국을, 또 누군가의 기억을,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감정을 조용히 쓸어 담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길을 따라 듣고 적어가는 동안 나도 어느새 그 여정을 함께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첫 장면은 낙타와 바늘귀였다. 그 단순한 비유가 이토록 무거운 말일 줄은 몰랐다. 사람들이 움찔했고, 숨을 삼켰고, 한 사람은 묵묵히 돌아섰다. 무엇이 그 사람의 발걸음을 붙들었을까. 그가 버리지 못한 건 재물만이 아니었다. 삶의 방식, 살아온 시간, ‘이 정도면 괜찮다’는 스스로에 대한 평결, 그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을 것이다.


예수는 그 손을 열라고 했다. 지금까지 자기를 지탱해 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건 단순한 요구가 아니었다.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부름’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겠다는 마음을 그에게서 보았다. 그가 떠난 뒤, 예수는 조용히 말했다.

“하느님께는 하실 수 있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다. 무언가를 하지 못한 이에게 건네는 비난이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이들을 향한 여전한 초대처럼 들렸다. 그 뒤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들과만 나눈 이야기 속에서 그는 자신의 고난을 말했다.

그 말들은 모두 예언자들이 오래전 적어둔 것이었다. 예언자들은 미래를 맞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느님이 하실 일을 미리 들은 이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그 말들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했다.


죽을 것이라고...
모욕당할 것이라고...
사람들이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리고, 결국은 죽게 할 것이라고... 하지만 사흘 뒤 살아날 것이라고...


나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가 말한 죽음보다 그 죽음 앞에서 말없이 있는 제자들의 얼굴이 더 오래 떠올랐다.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의 눈앞에 있었던 예수는 죽음을 말하기엔 너무도 힘이 있었고, 너무도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말하고, 걸었다.

예루살렘을 향해,
이미 정해진 고통의 길을 향해...


그리고 예리고 가까이에서, 나는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났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조용히 밀어냈고, 그는 더 크게 외쳤다. 나는 그 목소리의 크기를 상상했다. 자신의 존재가 불편하게 여겨지는 자리에서, 온 힘을 다해 이름을 부른다는 것. 그건 믿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예수를 부를 때, 그의 출신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다.

그 안에는 기대와 믿음, 그리고 도무지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 있었다. 예수는 그를 불렀고, 그는 일어나 걸었다. 떨리는 다리로, 두려움 섞인 발걸음으로, 하지만 주저함 없이.


“무엇을 원하느냐?”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는 말했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의 눈이 열렸고, 그는 예수를 따랐다. 나는 이 세 이야기를 연결해 본다. 떠난 사람,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일어나 눈을 뜨고 따라간 한 사람. 그 셋 사이에 있는 나는 누구인가...


한 번쯤 다짐했다가도 무언가 놓지 못해 돌아서는 자인가... 아무리 들어도 이해할 수 없어 제자들 틈에 멈춘 자인가... 아니면, 어둠 속에서 이름 하나 붙잡고 일어선 자인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예수는 언제나,
돌아서는 자도, 이해하지 못한 자도,
그리고 끝내 일어선 자도
모두 향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자리에 남겨진 우리에게 여전히 말하고 계신다.


“하느님께는 하실 수 있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18:24-43"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누가복음묵상 #바늘귀와낙타 #부자청년 #하느님나라 #믿음의눈 #예수의부르심 #내려놓음 #다윗의자손 #여리고의기적 #소경의믿음 #하느님께는하실수있다 #포기의영성 #삶의전환점 #제자의길 #눈뜬믿음 #예수를따르다 #묵상의여정 #복음서이야기 #부르심에응답하다 #내면의소리 #희망의외침 #주님보고싶습니다 #영원한생명 #예루살렘을향하여 #부름과응답 #하느님의가능성 #믿음의기적 #예수와함께걷기 #말없는회심 #돌아서지않는믿음 #마음의눈뜨기 #절망속의희망 #침묵의말씀 #내안의바리새인 #따라가는믿음 #결단의순간 #하느님은보신다 #신앙의눈 #이해할수없는말씀 #그럼에도따라가다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19화Day 49 – 가장 멀었던 사람이 가장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