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불러주지 않던 한 이름이, 사람처럼 들리던 순간
여리고에서 들은 이야기다. 그 도시는 여전히 바쁘고 시끄러웠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하루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날의 장면들을 하나씩 꺼내어 전해주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바람에 실려오는 소문처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내게로 다가온 이야기였다.
한 사람의 얼굴, 그의 걸음, 나뭇가지에 매달린 마음 하나가 이 도시에 남긴 흔적... 그것을 따라, 나는 그날을 더듬어가 보기로 했다.
여리고는 언제나 떠들썩하다. 사람도 많고, 소리도 많다. 하지만 그날은, 그중에서도 유독 특별한 소란이 있었다고 했다.
누군가 말했다.
“그날 예수가 여리고에 들어왔소. 그때, 이 도시가 얼마나 술렁였는지 아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그 사람은 주먹을 꼭 쥐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어 말했다.
“우린 다들 기다렸소. 누가 예수와 마주하게 될지, 어디에 머물지, 누가 초대를 받을지... 우리끼리도 은근한 경쟁이 있었소. 누구는 예수의 제자 중 하나에게 편지를 전달했다더군. 또 누구는 자기 집을 치우고, 음식을 준비했지. 근데 말이오...”
그는 땅을 가리키며, 웃었다.
“그 사람, 삭개오. 그 자가 예수를 초대했소.”
삭개오.
그 이름은 여리고에서 오래된 상처처럼 입에 오르내린다.
‘세관장’.
그 말은 곧 ‘돈을 걷는 자’라는 뜻이고, 그것은 이 땅에서 ‘미움받는 자’를 뜻했다. 그는 로마 제국을 위해 일했다. 유대인이었지만, 로마의 편에 섰다. 이중의 얼굴, 이중의 마음... 이중의 돈...
누구보다 부자였지만, 누구보다 외로웠을 것이다.
“그 사람 말이오, 키가 아주 작았소.”
한 여인이 말을 보탰다.
“사람들 사이에선 볼 수가 없었던 게지. 다들 밀어내고, 무시하니까. 그 자가 예수를 보기 위해서 무화과나무 위로 기어올랐다니까, 누가 믿었겠소.”
나는 그 나무가 어딨 는지를 물었다.
그 여인은 길 끝자락을 가리켰다.
“저기, 돌무화과나무. 햇빛이 아주 잘 드는 자리요.”
그 나무는 그날 이후로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던 것 같다. 삭개오가 그 나무 위에 올라섰을 때,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나는 그 장면을 조심스레 상상해 본다. 소리와 흙먼지가 뒤섞인 거리, 그 무더운 햇살 아래에서,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가지를 붙잡고 올라선다.
뒤에서 조롱이 들라는 듯했다.
“세금으로 지은 손이 나무도 타네.”
“저 짧은 몸뚱이로 뭘 보겠다고?”
하지만 그는 올라갔다. 예수가 지나간다는 이야기 하나에 매달려, 누군가를 보기 위해 올라가는 한 사람. 그의 심장은 얼마나 뛰었을까.
그리고 그 순간.
그 눈이 마주쳤다고 한다.
예수의 눈과, 나무 위의 삭개오.
“삭개오야.”
사람들은 얼어붙었다. 그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서 내려오너라.”
그 말이 이어졌을 때, 사람들의 시선은 나무 위와 예수 사이를 오갔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 말을 전한 노인은, 그 순간을 한참이나 말없이 떠올렸다. 손가락으로 땅 위를 문지르며, 말을 잇는다.
“삭개오, 내려오더니... 울고 있었소. 그 눈빛이, 꼭 어릴 적 잃어버린 아들이 아버지를 찾은 것 같았다오.”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저 자가, 예수를 집에 들이다니.
“그 사람은 죄인이오! 민족을 팔아넘긴 자요!”
사람들은 분노했다.
“왜 하필 저런 자를?”
“우리 중엔 더 나은 사람이 많은데!”
나는 그 장면의 소음을 마음속에 새겨 본다. 기대와 분노, 질투와 혼란, 그것이 엉켜 소용돌이치는 거리. 그 혼란의 중심에 예수가, 그리고 삭개오가 서 있었다. 그날 저녁, 삭개오의 집엔 조용한 불빛이 켜졌다.
나는 그 집 안을 본 적 없다. 하지만 들려온 이야기들이 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심스럽게 전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이 말했소. ‘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겠습니다.’ 그렇게 말했소.”
한 사람이 말했다.
또 다른 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서 속여 빼앗은 게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라고도 했소. 율법대로 하겠다는 거지.”
그 말은 단순한 기부가 아니었다. 단순한 회개도 아니었다. 그것은 삶을 바꾸는 결심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람들 앞에 다시 서는 일... 그는 이제 자신을 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앞에, 다시 인간으로 서려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며칠 전 예수와 어떤 부자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어느 부자는 많은 재산을 가진 채 예수께 다가와 물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는 그에게 전부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고 따르라고 했지만, 그는 돌아서 버렸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삭개오는 그 손에 쥔 것을 내려놓았다.
기꺼이.
기쁘게.
그것이 바로 예수가 그의 집에 머문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전하던 노인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그때 예수가 말했소.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리고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조용히 덧붙였다.
“당신도 아시오? 그분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오셨다고 했소. 그가 먼저 그를 찾았던 것이지. 삭개오가 예수를 본 게 아니라, 예수가 삭개오를 먼저 본 거요.”
나는 그 말을 마음에 새기며 노인을 떠났다. 여리고의 길목엔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나무 아래를 다시 지나치며,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날, 누가 누구를 본 것인가.
그날, 누가 누구를 부른 것인가.
삭개오,
그의 이름은 그날 처음 불려졌고, 그날 처음 자신의 이름을 들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 이름 안에 다시 인간이 되는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은 지금도, 누군가를 위해 열려 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을 찾으러 온 그분의 발걸음처럼.
예루살렘이 가까워졌다.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들은 걸음을 재촉했고, 목소리는 낮아졌지만 마음은 부풀어 있었다. 어떤 이는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쥐고 있었고, 어떤 이는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이제 곧이다.”
“이제 그분께서 나라를 세우실 거다.”
“이 도시에 드디어 하느님의 왕이 오시는 거야.”
나는 그 눈빛과 소리들 사이에서 그가 꺼낸 이야기를 오래도록 곱씹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그 마지막 길목에서, 예수는 한 비유를 꺼냈다. 그것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을 닮은, 그의 침묵을 풀어내는 이야기였다.
예수는 그날 이렇게 말했다.
“어떤 귀족이 있었는데, 왕권을 받으러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말속에 담긴 비유를 곧바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쩐지 낯익은 기운이 스쳤다. 그 귀족은 예수가 아니었을까?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그곳에서 곧 왕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하지만 예수는 왕좌가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 십자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왕권을 받기 위해 떠나는 사람처럼, 고요히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 귀족은 종 열 명을 불러, 각각에게 한 미나씩을 주며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한 미나(금화).
그것은 하루 품삯의 백 배가 넘는 돈이었다. 큰돈이었고, 무엇보다 ‘주인이 맡긴 것’이었다. 그는 그들이 그것을 붙들고, 장사하고, 이윤을 남기기를 바랐다. 그들이 그것으로 시간을 쓰기를, 용기를 내기를, 무언가를 시도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만이 아니었다.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여, 사절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 말을 나는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떠올렸다. 그가 말없이 걸어갈 때, 어떤 이들은 돌을 들었고, 어떤 이들은 멀리서 침을 뱉었다.
그들이 원한 건 다른 종류의 왕이었다. 더 강하고, 더 빠르고, 더 통쾌한 승리를 가져올 왕... 하지만 예수는 고요한 얼굴로 고난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그는, 거절당한 왕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왕권을 받아서 돌아왔다.”
나는 이 말을 오래 곱씹었다. 그는 돌아온다. 지금은 부재중이지만, 언젠가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각 사람에게 맡긴 것을 가지고 다시 물을 것이다. 그가 돌아왔을 때, 종들을 하나씩 불러 세웠다고 한다.
첫 번째 종이 나왔다. 그는 말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었습니다.”
나는 그의 눈빛을 상상해 본다.
두려움과 설렘, 책임과 자부심이 뒤섞였을 것이다.
그러자 주인은 말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너는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그것은 단순한 보상이 아니었다. 그의 성실함이, 그의 용기가, 그의 시간을 통해 생겨난 신뢰였다.
열 고을.
그것은 다스림의 권한이면서도, 새로운 책임의 시작이었다.
두 번째 종이 나왔다.
“주인님,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좋다. 너는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그 역시 충실히 일했다. 한 미나를 맡았지만, 그것이 그의 손에서 다섯이 되었다.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두려움에 움츠러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종.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수건을 꺼냈다. 그 안에는 주인이 준 한 미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주인님, 여기 있습니다. 저는 이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라, 가져다 놓지 않은 것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두려웠습니다.”
그의 말은 명백한 오해였다. 그는 주인을 ‘가혹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도전하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았고, 시간을 봉인했다.
그는 보관자였다.
지켜야 한다고 믿었고,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은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라 생각했다면, 왜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느냐? 그러면 내가 이자를 붙여 되찾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여기서 멈추어 생각했다. 주인은 미나보다도 ‘종의 태도’를 보고 있었다. 그가 바란 건 큰 수익이 아니라 ‘움직임’이었다. 작은 시도라도, 실패하더라도, 무언가를 해보는 것... 주인이 없는 시간 속에서, 그가 남긴 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은 곁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했다.
“그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 가진 자에게 주어라.”
세 번째 종의 결말을 들은 사람들은 놀랐다고 한다.
“주인님, 저 사람은 이미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을 것이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조심스럽게 곱씹는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왕이 없는 것 같은 이 시간’이 실제로는 시험의 시간임을... 그는 각 사람에게 한 미나를 맡기고, 떠나 있다. 그러나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각 사람은 그 미나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물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미나는 단지 돈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생명, 믿음, 사랑, 시간...
그 모든 작은 것이 하느님의 손에서 맡겨진 것이다. 비유는 끝났지만, 예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나의 왕 됨을 거부한 그 원수들은, 여기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사람들은 침묵했다.
무겁고, 낯선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단호했고,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심판에 대해 말했다.
예수가 돌아올 때, 거절했던 이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마지막 경고였다. 왕이 되기를 거부당했던 그가, 진정한 왕으로 다시 올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나는 예루살렘 문 앞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하늘은 붉었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점점 작아졌다.
그는 여전히 걸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향과는 조금 다른 쪽으로... 더 높이 오르지 않고, 더 낮은 곳을 향해... 예수는 왕관 대신 가시관을, 왕좌 대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길목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되새긴다.
그는 우리에게 한 미나를 맡겼다.
이 세상 속 어딘가에서, 그 맡겨진 것을 가지고 벌이를 하라는 그의 말이 지금도 조용히 들려온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잠시 멈춰 서게 된다. 말이 끝난 자리에 조용히 남는 여운, 마치 하늘 한가운데 새긴 문장처럼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날 여리고에서 들은 이야기가 그랬다. 온 도시가 들썩였고, 사람들은 누군가를 보기 위해 움직였지만... 정작 그는... 사람들 모두가 외면하던 한 사람을 바라보다.
그 사람, 삭개오.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 무화과나무 앞에 선다. 햇빛이 잘 드는 자리, 도시의 소음이 나뭇잎 사이로 걸러지던 그 시간... 나는 그곳에서 한 남자가 손가락 마디로 나무껍질을 더듬으며 올라가던 모습을 그린다. 어쩌면 우리는 다 그와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 틈에서 밀려났던 이름, 자신의 직업이 곧 죄의 상징이었던 사람, 그는 그냥 보고 싶었다. 무언가를 바꿔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자기를 봐주는 눈을 기다렸던 것이리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단지 보이고 싶었던 마음 하나.
그것이 그를 나무 위로 오르게 했다.
그 위에서 그는 누군가를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보였음’을 처음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 사람은 그를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이름.
다른 누구도 따뜻하게 불러주지 않았던 이름... 그날 처음, 그 이름이 사람처럼 불려졌다.
“삭개오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날 이후 나는 ‘머문다’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지나가지 않았다. 보아주고, 멈춰 서고, 머물렀다. 어쩌면 모든 변화는 거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내 안에, 내 삶에 잠시 머물러주는 일... 세상이 나를 지나치고, 나조차 나를 외면할 때... 어떤 사랑이 내 집에 들어와 불을 켜고, 조용히 앉아주는 것... 그것이 한 사람을 바꾸는 일이다.
그날 저녁, 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반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속인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다. 그것은 율법의 기준이었고, 동시에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의 선언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숨지 않았다. 그는 나무 위에 숨겨진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의 눈앞에, 스스로의 고백으로 다시 서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자리가 필요한 것 같다.
숨었던 나무 위가 아니라,
진실로 불려지고, 다시 살아나는 자리가...
예루살렘을 향해 가던 길,
그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한 귀족이 왕이 되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각 미나를 맡긴 이야기였다.
나는 ‘미나’라는 말에 자꾸만 마음이 걸린다.
그 돈이 아니라,
그것을 맡긴 사람의 마음 때문이다.
그는 떠나면서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그가 없는 시간 동안,
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할지를 보고자 하였다.
한 종은 그것을 열 미나로,
또 한 종은 다섯 미나로 만들었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것을 수건에 싸서 감춰 두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주인이 냉혹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묻는다.
혹시 나도 그 종처럼, 내 안에 주어진 것을 꺼내지 못한 채, 두려움이라는 수건에 싸서 묻어두고 있지는 않은가...
사랑을,
용서를,
말 한마디의 따뜻함을...
내가 가진 게 너무 작다고 믿고, 나는 그것으로는 아무 일도 만들 수 없다고 스스로 포기하고... 그냥 감춰둔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는 말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을 것이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 말은 불공평함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것, 움직이는 것, 사용되는 것과 멈춰 있는 것에 대한 경고였다.
삶이란,
기회란,
시간이란,
그렇게 ‘움직이는 것’ 위에 있다는 걸.
하느님은 단지 ‘성공’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반응’을 원한다.
작더라도, 어설프더라도, 내가 받은 것을 가지고 반응하길 바란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나는 지금 내 한 미나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가 다시 오다면, 나는 내 삶의 수익을 내어 보일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얼마나 벌었는가가 아니라, ‘내가 시도했는가’를 내어놓을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배운다.
한 사람의 눈물이,
한 사람의 결심이,
그리고 한 사람의 고백이 세상의 외면을 이긴다는 것을...
삭개오는,
다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단지 회개한 사람이 아니라, ‘불림받은 자’였다.
그리고 그 불림은 지금도, 이 여리고의 바람처럼, 누군가에게로 향하고 있다.
예수는 말없이 떠났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날, 그가 먼저 불러주었던 이름처럼...
그는 여전히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는 다시 묻는다.
“내가 너에게 맡긴 것, 그 한 미나로 너는 무엇을 하였느냐?”
나는 그 물음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서고 싶다.
아직은,
지금은,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19:1-27"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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